자신의 객실이라 생각되는 문앞에 선 카린은 이번에도 실수한 게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도가 보이는 각도나 장식물의 배치가 눈에 익은 걸로 보아, 자신이 나온 방 같아 보이기는 하였다. 그래도 확신을 갖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는 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지만, 금방 밀지를 못하고 또 한참을 주저하다 불안한 마음에 한 번, 복도를 돌아보았다.
텅 빈 복도에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에 벽에는 그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사람처럼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낱 그림일 뿐이지만, 눈이 마주치자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림 속의 그녀는 굳게 다물어진 입으로 그려져 있었지만,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하는 듯한 착각이 밀려왔다.
'너는 가짜야. 내가 진짜라고.'
그림의 말에 주눅이 든 카린은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여왕의 기품도, 책무도 잊고 현실을 피하려는 자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면 보이는 건, 현실의 자신과는 반대로 우아함과 지성을 갖춘 이상적인 여왕의 모습을 한 자신.
"정말로 여기에 서 있는 내가 진짜일까?"
간혹 의심스럽게 느껴질 때는 있었었다. 죽도록 철야로 일하고 간신히 침대에 눈을 붙이면, 눈 한번 감았다 뜬 것뿐인데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 눈 한번 감았다 뜬 사이, 그때의 나는 과연 무얼 하고 있었을까? 잠을 자고 있었다는 게 당연한 사실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몸은 잠이 들었지만...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 자신은 과연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영혼이란 게 정말로 있다면, 어쩌면... 카린이라는 자신의 몸뚱어리의 주인은 실제로는 다른 영혼의 것일지도 모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실감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위화감이었다.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보는 이것이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면 손을 들어 손등을 올려다보며 조금씩 움직여본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힘을 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손을 움직였고... 그러면 손등에 불룩 튀어나온 뼈가 관절 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래도 의심이 가시질 않으면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도 본다. 손바닥에 닿는 얼굴의 촉감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카린이라는 여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상을 반복한다.
'그러면 왜 나는 살아있는 걸까?'
누가 시켜서일까? 어릴 적의 기억은 희미하다. 희미하다는 말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라던가, 귀신 얼굴처럼 보이는 얼룩이 배인 천장의 무늬라던가, 혹은 방 안의 막연한 풍경 같은 것은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터이다. 기억을 믿는다면... 나는 부모님께 받은 생명을 가슴속에 품고, 갓난아기부터 시작해 쭉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면 왜 생명이란 것을 받고 살게 된 걸까? 신이 빚은 진흙에 생명을 불어넣어서일까? 운명의 천사가 생사가 적힌 책을 펼쳐들고, '너는 전생에 죄가 크니 저기서 살아라.'라고 업무적인 태도로 지시해서일까?
"나도... 참....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카린은 고개를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날려버렸다. 이런 생각은 말 그대로 '할 일 없는 미친 짓거리'. 다른 사람에게 이런 생각을 들이밀어 묻는다면은 백이면 백, 웬 미친년이 있느냐는 얼굴로 내려다보기만 할 것이다. 그들도 결국 '자신은 누구인가?'를 놓고 똑같은 생각을 한 번 이상 해본 적이 있으면서도 다른 이가 그런 말을 꺼내면 마치,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금기라도 건드린 것처럼 반응한다.
그러면서도 신이라는 존재는 믿는다. '자신은 누구인가?'를 놓고 고찰하기에 사람은 자신들을 창조했을 신이라는 존재를 믿는다는 선택지를 택하기도 한다.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고, 교리에 쓰인 글 자체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모순투성이인데도 사람들은 그걸 믿는다. 예를 들자면, 등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 믿지 않는다. 설사 그들 앞에서 실제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 보인다 해도, 사람들은 속임수를 의심하고 보이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가 쓴 건지도 모를 교리는 믿는다. 소설처럼 글로 쓰인 게 전부이고, 실제 눈앞에서 증명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이를 믿는다.
결국, 과거의 사람이고, 현재의 사람이고... 하나같이 웃기다. 누군가 금기를 건드리고 의심하면 그를 따돌리고 배척하면서도 막상, 그러는 본인들 역시 속으로는 타인에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이리저리 고민하면서도 말이다.
"진짜로 끝내야지..."
쓸데없다고 여겨질 생각을 관두려고 해도, 물을 퍼낸 자리를 새 물결이 채우는 것처럼 계속해서 채워지는 것을 그녀는 그림에서 눈을 떼는 것으로 완전히 끝내었다. 등으로는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디까지나 착각이라고 자신을 독려하며 그녀는 자신의 방문을 밀어 열었다.
"...어...?"
카린은 자신이 눈을 의심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방 안의 광경은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장식장에 진열돼 있던 장식품들은 쓰러지거나 불규칙하게 흐트러졌고, 방 안에는 발 디딜 공간마저 여의치 않을 만큼 옷가지며, 물건들이 난잡하게 쏟아져 있었다. 십여 개의 짐가방들은 죄다 열어져 터진 생선이 내장을 쏟은 것처럼 내용물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옷가지며 각종 여행 물품들이 뒤섞여 엉망인 방의 입구에 서 있던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방 안의 광경을 돌아보다,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도둑?'
아직 방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는 두려움에 그 자리서 못 박힌 듯 얼어붙었다. 딱 한 걸음만 뒷걸음질치면 바로 복도로 도망칠 수 있음에도, 그녀는 바늘이 박힌 관에 갇힌 사람처럼 옴싹달싹 할 수가 없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혹은 천장에서... 착각이라고 믿고 싶은 감시하는 시선이 계속 이동하며 그녀를 한 자리에 계속 묶어놓았다.
"...도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제대로 나와주지를 않았다. 두 개나 있는 허파도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는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져 갔다. 더군다나... 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그녀의 심장은 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크게 요동쳤다.
"...누구야?"
도움을 요청하는 말은 제대로 못 하면서 이런 말은 어떻게 나오는지 신기했다. 실제로 신기하다는 감각을 느낄 여유는 없기에 그녀는 인기척이 느껴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이 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렇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옷더미 속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움직임이 보이자 그녀는 가슴이 철렁해 순간 숨이 멈췄다.
"...카린 누나?"
"....푸하..."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자마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카린은 숨을 토해냈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인형처럼, 풀려가는 다리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지금까지 앓은 불안을 갚지 못한 빚쟁이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사람 놀라게 해서 죽일 일 있어!'
허파에는 소리를 칠 만큼의 공기가 남아있질 않기에, 아쉬운 대로 그녀는 속으로 외치는 것으로 이를 대신했다. 놀란 가슴을 안고 바닥에 쪼그라드는 그녀가 걱정되는지, 그 인물은 작은 몸에 그녀의 속옷가지를 몸에 칭칭 감은 채로 다가왔다.
"...누나아. 어디 아파?"
"차라리 아팠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놀라지는 않지."
작은 목소리나마, 카린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대꾸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변태 꼬맹이의 바지를 홀랑 벗겨서 돛대에 거꾸로 매달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힘이 빠져나간 몸으로는 그럴 기운도 없었다.
"[추억]. 너도 이 배에 탄 거야?"
"[인연]이랑... 랏님이랑 같이."
[인연]은 저 변태 꼬맹이 [추억]이랑 찰싹 붙어 다니는 여자아이, 랏님이라는 사람이야 라미엘을 말하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 일곱 살 쾌활한 사내아이답게, 또래의 여자애인 [인연]과는 반대로 억양이 세서 말꼬리가 올라가는 것이겠지만...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는 짓을 보자면은 이건 쾌활하다는 수준을 넘은 지 오래이다.
"그럼 [인연]은 어디에 있는데...?"
"음... 저기서 자고 있어."
어딘가를 가리킨다는 기척은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 기운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녀는 보지도 않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걸로 알겠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렇지만, 몸 상태와는 달리, 그녀의 머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근데... 둘 다 왜, 내 방에 있는 거야?"
"아픈 형아 있다고, 랏님이 여기서 놀래."
그 말에 카린의 머릿속으로는 라미엘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인상은 '차갑다' 에서 '뻔뻔스럽다.'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나중에 돌아가면 그의 멱살을 잡아 족치겠다는 예정사항을 머릿속 계획표에 크게 새겨넣은 그녀는 슬슬 달려오는 허파를 짜내어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묻는데... 너, 왜 자꾸 내 속옷에 손대는 거야?"
"향기가 좋아서."
"...그래?"
"응..."
"..."
"..."
침묵만이 방 안을 메워갔다. [추억]이 폭풍전야라는 말을 알 만큼의 나이는 아니겠지만, 방안 온도를 떨어뜨리는 냉기가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도망치려고 슬금슬금 엉덩이를 빼고 있으니까.
"...누나... 또 나 벗길 거야?"
"그래... 너를 잡아서 껍데기를 홀랑 벗겨버릴 거야."
카린은 여전히 얼굴을 무릎에 파묻은 채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섬뜩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변신을 끝낸 그녀는, 도망칠 구석을 찾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추억]의 방향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천천히... 산발의 그녀가 한 발을 내딛자 발 주위로 균열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얼어붙은 대지가 되어, 균열 사이로 차가운 물줄기가 치솟았다. 그녀의 등 뒤로는 또 다른 감정을 대변하는 큰 불길이 치솟아 올라,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퍼져 나갔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억]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거다.
"...우선 너를 잡아서 말이야... 큭큭... 거기를 난도질할 거야."
"...카린 누나아... 내가 잘못했어..."
"그다음에는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 속옷을 입혀줄게. 치마도 입혀줄게. 분도 칠하고, 머리도 예쁘게 빗겨줄게... 인형처럼 아주아주 예쁘게 꾸며줄게. 누나 믿지? 응, 믿는 거지? 그 다음에... 그 다음에... 큭큭큭."
"...그 다음에...?"
카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추억]은, 뱀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과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메두사의 얼굴을 본 희생자처럼,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 도망치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다. 쥐새끼를 사냥하는 뱀처럼, 뱀 소리를 내며 코앞에까지 다가간 카린은 어깨에 양손을 얹고,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서는 입이 찢어진 귀신처럼 씨익 웃었다.
"너를... 잡아먹겠다!"
.
.
.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새근새근 잠자던 [인연]은 밖에서 들리는 '우광쾅쾅'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갈색 눈망울이 떠다니는 큰 눈을 깜빡깜빡 거리며 꿈과 현실의 국경 위를 한참이나 배회하던 어린 소녀는 밖이 조용해지자, 잘 못 들은 것으로 여기고는 다시 꿈동산으로 입장하고자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다시금 소음이 생겨나자, [인연]은 막 '환영합니다.'란 간판이 세워진 꿈나라 동산의 입구에서 현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경계 한가운데 서서 잠시간을 고민하던 어린 소녀는 현실에 남아있는 자신의 짝꿍이 걱정되기에 현실 쪽으로 걸어나갔다.
세상 밖으로 첫 모습을 내미는 갓난아기처럼, 비좁은 가방 안에서 상반신을 삐죽 내민 [인연]은 땅굴 속의 새끼 여우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정말로 좋아하는 카린 언니. [추억]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곳에 좋아하는 언니가 보이기에 소녀는 가방에서 나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카린 언니이~"
[인연]은 노란 헤어밴드부터 먼저 고쳐 쓰고는 그녀를 정다이 부르며 달려나갔다. 그렇지만, 막 그녀의 품 안에 매달리기 직전, 마주친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무섭게 보였기에 [인연]은 급히 달음박질을 멈추었다.
"언니...?"
"왜에?"
언제 무서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카린은 밝은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인연]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좀 전의 기억과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을 비교해보다, 기억이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하려던 것을 계속했다. 카린의 품에 매달려 안긴 [인연]은 고양이처럼 그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마구 비벼댔다. [인연] 방식의 인사를 끝낸 후에야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며 [추억]을 찾았다.
"언니, [추억] 못 봤어?
"위에 있어."
카린은 못마땅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천장을 대충 가리켜 주었다. 손가락을 따라, [인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천장 한가운데에 샹들레 대신, 이상한 물체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꼭, 암거미가 실로 칭칭 묶어 매달아 둔 사냥감처럼, 붉은색 계열의 속옷이나 내의로 꽁꽁 묶여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배에 흔들림을 따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입은 꾸깃꾸깃 둥글게 말은 분홍색 팬티로 틀어 막혔고, 양 눈은 브래지어로 칭칭 감겨 있었으며, 머리에는 팬티가 모자 대신 씌워져 있었다. 남자애의 부분부분이 드러난 알몸을 [인연]은 한참이나 빤히 올려다보다, 늦게야 그게 [추억]임을 알아보았다.
"왜 저러고 있어?"
"여자 속옷이 좋다잖아."
"아... [추억]은 그런 거 좋아해."
[인연]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였다. 그리고서 긴 막대기를 집어들어 와 [추억]을 쿡쿡 찔렀다. 머리를 찔러보고, 등을 찔러봐도 요지부동. 죽은 벌레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먼저 질려버린 [인연]이 막대기를 내려놓았다.
"언니. 근데 언니가 매달아 놓은 거야?"
"응."
"왜?"
"방 안을 봐봐"
[인연]은 그녀의 말마따나 이상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한 바퀴 돌아본 방 안은 호기심 많은 강아지 수십 마리를 풀어놓아야 만들 수 있을 법한 참사가 쓸고 지나간 후였다. 찔리는 게 있는지, 인연은 얼굴이 굳어져서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엉망이다."
"너도 같이 저지른 거 아니지?"
카린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묻자, [인연]은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뚝 뗐다.
"아니, [추억] 혼자 그런 거야. 나는 얌전히 있었어."
"그래그래. 역시 [인연]은 착하니깐, 얌전히 있었지?"
"응, 나는 착한 아이니까."
거짓말이라는 거야, 언제나 커플처럼 찰싹 붙어 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두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뻔히 알고 있었지만, 카린은 [인연]의 애교와 아부가 가득한 미소에 넘어가 믿어주는 걸로 넘어갔다.
"우읍! 우읍우읍!"
"아, 깨어났다."
[인연]이 천장에서 바동거리는 [추억]을 올려다보고는 카린을 불렀다. 그녀 역시 소리가 들렸기에, [인연]을 떼어내고는 의자를 끌어와 그 위로 올라가서는 [추억]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면... 반성 많이 했어?"
"우으으읍!"
죽을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카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풀어줄 듯이 그에게 손을 내밀던 그녀는 바로 풀어주지 않고, 겁먹은 [추억]과 눈을 마주하더니 씩 웃어 보였다. [추억]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몸을 바람개비 돌리듯이 힘차게 돌렸다.
"우우우웁!"
"어지럽겠다아~"
팽이가 돌아가는 모양새로 뱅글뱅글 빠르게 도는 [추억]을 따라, [인연]이 눈알을 팽글팽글 돌리다가 어지럼증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구경하는 그녀조차 그 정도인데, 당사자는 어떻겠는가? 카린이 '이 정도면 됐겠다.' 싶어 천장에서 끌어내 풀어주었을 때에는 제대로 서지를 못하고 아기곰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제, 두 번 다시 누나 물건에 손대면 안 돼? 알았지? [추억]?"
"...으으응..."
머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제대로 교육받은(?) [추억]이 엉뚱한 방향에 대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최후로 짜낸 체력이었는지, 뒤로 자빠진 그를 착하게도 [인연]이 이불과 베개를 들고 와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많이 어지러워?"
"응."
"얼마큼?"
"이만큼."
[인연]은 [추억]이 손가락 열 개를 펴보이는 것을 보더니 자기 손가락을 헤아려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였다. 그걸로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건지, 구경하는 카린으로선 참으로 신기한 아이들끼리의 대화법이었다.
"하아... 이제 어쩐다."
카린은 개판이 돼버린 방을 돌아보자니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리는 해야겠는데... 자신을 도와줄 유일한 사람인 재상과는 사이가 틀어졌고, 라미엘은... 아직 속옷을 보여줄 정도까지의 관계는 아니고... 저 애들은 도움이 안 될 터이고, 생판 남인 선원에게도 당연히 무리이다.
'결국, 혼자 해야 하네.'
카린은 한숨만 연달아 푹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일할 생각을 하니, 아프지도 않은 허리가 갑자기 아파오고, 멀쩡하던 머리가 욱신거리며 꾀병을 부려왔다. 놀 때는 멀쩡하다가, 공부하라고 하면 아프다고 생떼를 부리는 아이가 되어버린 카린은 일을 금방 내 시작하지 못하고 한참을 주저했지만, 그런다고 구해줄 사람도 없기에 결국 홀로 정리를 시작했다.
.
.
.
"카린 언니이~ 이건 어디다가 넣어?"
"빈 가방 아무거나. 잘 개서 안 들어갈 때까지 꾹꾹 눌러 담아."
"응~!"
한 아름 옷가지를 안고 촐싹거리며 달리던 [인연]은 바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래도 씩씩하게 일어나더니 쏟아진 옷을 안아 들고 부지런히 달렸다.
카린은 [인연]이 한 사람분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도움이 되기에 따로 지켜볼 필요 없이 자신의 손에 잡히는 일에만 신경을 돌렸다.
"카린 누나아~ 이거 어디다가 넣어?"
[추억]이 그녀의 속옷을 한 아름 안고 달려와 묻자, 카린은 고마움을 가득 담아 그를 걷어찼다.
"누나가 누나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이 변태 꼬맹아."
"이잉... 누나는 나만 미워해. [인연]은 예뻐하면서."
"우는 척해도 소용없어."
"우우우우."
"귀여운 척해도 소용없어."
"에에에..."
"삐친 척, 화난 척, 안 들리는 척... 뭘 해도 소용없어."
다채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추억]의 노력에도, 카린은 나이도 많고, 짜증도 많은 유모처럼 매서운 눈매를 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홀로 구석으로 쫓겨나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대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홀로 핍박의 시간을 이겨내려는 [추억]을 한 번 흘겨본 카린은 자신이 조금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만으로 끝내버렸다.
'저 녀석 장래가 훤하네.'
여자를... 아니, 정확히는 여자 속옷을 저렇게 밝혀서야, 지금은 어린애라 어떻게든 웃어 넘어가 줄 수 있다쳐도... 성인이 돼서도 저 버릇 못 고친다면은 얼마 못 가 감옥에서 성추행범으로 면담하게 될 광경이 상상이 됐다.
'그래도 얼굴은 괜찮게 자라려나...'
지금이야 아직 한창 자라기 전이니... 얼굴형은 아직 동글동글하기만 하지만, 윤기 있는 갈색 머리에 똘망거리는 눈매로 보건대, 장래에 자라면 '귀한 도련님' 이미지로 여자들이 꽁무니 따라다니게 될 법해 보였다.
'하는 짓은 아니지만...'
내면을 보자면 영락없이 계집들 치맛자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도련님이 되겠지만 말이다.
"언니~ 이건 어디다가 넣어?"
"그냥 아무 빈 가방에다가 넣어."
"응."
목소리도 들린 김에... 이번에는 [인연]쪽을 돌아보았다. 자기 몸집보다도 크게 옷가지를 안아 들고서도 낑낑거리며 야무지게 일하는 모습이 장래에는 꽤 솜씨 있는 신부로 자랄 것 같았다.
'음...'
카린은 그녀의 현 이미지를 바탕으로, 장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저렇듯 부지런하니, 아마 요리면 요리, 재봉이면 재봉, 살림이면 살림... 못하는 게 없을 때까지 배울 것이다. 거기다 한쪽 팔에 과일 바구니를 안고, 꽃 장식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쓰고서, 노란빛 원피스를 팔랑거리는 청순한 모습으로 한 바퀴 마을을 돈다면, 마을 총각들의 구혼 행렬이 줄줄이 이어지리라...
'그러면 누구를 사위로 맞아야 하나...?'
제 딸도 아닌데... 카린은 벌써부터 꽃다발이나 선물을 안은 훈남들이 몰려와 '어머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는 흔한 멘트로 애걸하는 사윗감들을 꼽으며 상상 속의 면접에 들어갔다.
부잣집 자제나, 상류층 자제는 무조건 반대. 그런 애들은 아마 받들어지는 것에만 익숙해, 종 부리듯 부릴게 훤히 보였다.
‘암, 내 딸, 남자에게 쥐어짜이며 살게 할 수는 없지.’
배우고 능력 있는 사람 역시 반대. 아는 것 좀 있고, 능력 좀 있다고 딸이 뭔 말을 하던 무시하고 깔아뭉갤 것이다.
‘젠체하는 작자들 비위 맞추며 살게도 할 수 없지....’
상인이나, 공인(公人)이라도 반대. 손익만 따지는 인간들은 너무 계산적인지라, 가족관계 역시 계산적으로 굴게 뻔했다.
‘가족 관계 역시 돈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은 진짜 돈으로 때려죽여야 해!’
"아우... 왜 이렇게 괜찮은 사윗감을 구하기 어려운 거야...!"
본인의 사람 보는 시야가 잘못됐다는 것을 모르는 카린이 허공에 시야를 두고 투덜거렸다. 그 말을 우연히 들은 [인연]이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가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불렀다.
"왜?"
퍼뜩 정신이 돌아온 카린이 평소 습관대로 [인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인연]은 그녀의 팔에 안기자마자, 이유도 없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언니, 뭐가 어려워?"
"좋은 남자."
"좋은 남자?"
[인연]은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어떤 좋은 남자?"
"[인연]에게 어울릴 것 같은 남자."
그 말을 듣고서야 [인연]은 이해를 했는지 손가락을 들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우는 [추억]을 후보감으로 지목했다. 당연히도 카린은 이를 기각했다.
"쟤는 안돼. 바람둥이 기질이 훤히 보여."
"에에? 바람둥이가 뭐야?"
"남자가 줏대 없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거."
"만나는 거?"
"너는 따돌리고."
"우웅... 나쁜 거네."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이는 [인연]이 토끼처럼 귀엽기에 그녀는 한 번 더 꼭 안아준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풀려난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나간 [인연]은 [추억]에게 다가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바람둥이."
"...바람둥이가 뭐야?"
[추억]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올려다보며 묻자, [인연]은 똑똑한 체, 허리에 양손을 대고 선생님 흉내를 내며 조목조목 설명하는 시늉을 하였다.
"이 여자랑 저 여자랑 만나고 다니는 거."
"다른 여자는 만나면 안 되는 거야?"
"...우응... 안돼. 그럼 언니가 싫어해."
"으응... 그렇구나. 알았어."
[추억]은 중요한 걸 배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갑자기 몸을 발딱 일으켜 카린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뭔가 싶어 그녀가 내려다보니, [추억]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해왔다.
"누나아~ 누나만 좋아하면 나 안 미워할 거지?"
"그래서 네가 바람둥이라는 거야."
어이가 없어진 그녀는 한 대 콱 쥐어박아 주었다.
.
.
.
카린은 방 정리가 대강 끝나자마자, 고작 잠깐 일한 거 가지고 지쳐서는 소파에 늘어졌다. 그러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추억]이 등 뒤로 달려와서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거리며 아부를 떨어왔다.
"카린 누나아~ 시원해?"
"응. 시원해."
솔직히... 어깨가 결릴 나이도 아닌데다가, 요령도... 힘아리도... 없는 일곱 살배기 꼬맹이가 조약돌만한 손마디로 힘주어 주물러 줘봤자 시원하기나 하겠는가는... 그래도 이렇게 매달리는데 너무 내치기만 하는 것도 미안해지는지라, 그녀는 이쯤에서 받아주었다.
"힘들어..."
[인연]이 맞은 편 소파에 털썩 누우며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렸다. 카린은 그녀 쪽을 잠깐 보았다가 눈을 감고 등받이에 늘어져, 등 뒤에 있을 [추억]을 하인 취급하듯 명령을 내렸다.
"마실 것."
"여기...!"
던져진 말을 따라 [추억]이 공을 물어오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나갔다 금방 내 돌아온다.
"나도 줘..."
"여기...!"
[인연]의 말에도 충직하게 움직인다.
"다리도 좀 주물러봐."
"응."
소파에 앉아 두 다리를 탁상 위에 턱 하니 걸치니, 시킨 데로 달려와 다리를 주무른다.
"나도오~"
"응."
[인연]도 그녀를 따라 하는지, 똑같이 다리를 탁자에 걸쳤다.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고, 팔짱까지 끼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카린을 흉내 낸 모양이었다. 다만, 그녀에 비해 키가 작은지라, 발을 올린 대신에 엉덩이를 소파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야 했지만 말이다.
지금이야 그냥 좋다고 따라 하는 거겠지만, 카린과 똑같이 나쁜 습관이 들어버린다면 훗날, 주위에 민폐 끼치는 여성으로 자라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모친과 마찬가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카린은 신발까지 벗고 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추가 지령을 내렸다.
"발바닥도 주물러봐."
"싫어... 냄새나..."
이것만큼은 싫단다.
"천장에 매달리면 재밌어? 다시 해 줘?"
"우우..."
[추억]은 마지못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발바닥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오만상을 찌푸리며 목을 뒤로 빼는 모양새가, 발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취가 지독한 모양이었다.
"하아~ 이래야 여왕답지..."
요령 없는 주물거림이지만, 의외로 상당히 시원한지라... 카린은 그 쾌락에 몸을 맡기고 점점 더 늘어져 갔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필요 없이, 침대에 누워 시중만 받으며 사는 삶이 그녀가 원하는 삶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런 삶을 괜히 바라왔던 게 아니구나 싶어하며 피로를 푸는데, 이번에는 입이 심심해져 왔다.
"이제 그만 주무르고... 마실 것 좀 타와."
"나... 그런거 할 줄 몰라."
"시키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해야지... 사내자식이 못한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차라도 타오면 되잖아."
언제 적엔가 리프 공작에게 들은 적 있었던 말이 우연히 떠올라 카린은 써먹어 보였다.
"...우우... 차는 어디에 있는데?"
"짐가방 안에... 저기 왼쪽에서 두 번째 가방."
"응. 근데 두 번째가 어느 두 번째야? 건너뛰어서 두 번? 아니면 그냥 두 번?"
그녀에게는 평소, 말귀 어두운 아랫사람을 부릴 때가 제일 짜증이 났다.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는 카린에게는 자주 겪는 일이기도 하였다. 평소라면은 그다지 신경질을 내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 주겠지만... 몸이 편하니 설명하는 것조차 귀찮아져 짜증만이 올라왔다.
"저기 갈색 있잖아? 회갈색."
"회갈색이 무슨 색이야?"
"검은색 섞인 가방 있잖아...!"
"검은색 가방?"
[추억]은 그녀의 올라가는 말꼬리에 다시금 겁을 먹었는지 그녀의 눈치를 보다, 중간에 쌓인 가방을 성급히 끌어당겼다. 가방 무더기 가운데에 있는 주춧돌 역할을 하는 가방을 빼냈으니... 다시금 대형참사가 벌어지는 일 역시 당연한 수순으로 일어났다.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가방무더기를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피한 [추억]은 무사했지만, 불행히도 일거리는 산처럼 다시 쌓이고 말았다.
"..."
"..."
"...화낼 거야?"
양 볼에 손가락을 대고 아양을 떨며 잘못을 무마하려는 [추억]의 행태에 카린은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어 헛웃음부터 새어나왔다. 그냥 작은 머리통에 꿀밤 하나만 가볍게 먹여준 그녀는, 다시 정리를 하고자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귀찮은 몸을 억지로 질질 끌어 짐 더미 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쏟아진 짐을 착착 정리해 나갔다.
같은 일도 계속 하면 는다고... 빗자루 한 번 쥐어본 적 없고, 직접 청소를 해 본 적은 없었던 그녀이지만 같은 일을 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연속하다 보니 이제는 요령이 생겨 좀 전보다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건 여기... 저건 저기..."
그녀의 손은 살림이 익숙한 가정부처럼 착착 움직여 나갔다. [추억]은 본인 잘못이란 걸 알지만, 그녀 옷에 손을 댔다간 천장에 다시 매달릴 걸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기만 하였다. [인연]은 그 사이 잠들었는지, 아니면 정리하기 귀찮아서 자는 척하는 건지... 새근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창 밖 파도소리에 맞추어 음악처럼 조용히 들려왔다.
"그리고 이건... 저기고... 이건..."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녀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빈 액자. 재상을 통해, 할아버지가 주신 물건이자... 꿈에서 보았던 아버지가 선물로 주셨던 빈 액자에 손이 닿자, 매우 조심스럽게 변했다. 그 액자를 집는 그녀의 손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 같았다. 아니, 소중한 보물이었다.
"카린 누나. 그거 지금은 비어 있어."
갑자기 해오는 [추억]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추억]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침울한 얼굴로 그녀 손안의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비어 있어. 추억은..."
[추억]은 좀 전과 같은 말을 하고는 [인연] 쪽을 돌아보았다. 그를 따라 돌아간 그녀의 눈에, 언제부터 깨어나 있었는지 [인연]이 상반신을 일으킨 채로, [추억]과 같은 침울한 얼굴로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그거 비어 있어."
"추억이?"
"응... 그리고 인연도..."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공허감이 밀려왔다. 마치, 소중한 가족을 잃었을 때 얻을 감정. 매우 차갑고 무거운 감정이자, 주인에게 고통만을 주는 감정... 그것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나 그녀의 전신을 갉아먹어 왔다. 견딜 수가 없는 고통에 그녀는 그 자리에 홀로 몸을 굽혀 주저앉았다.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노력했지만, 지금 자신은 혼자... 자신의 주위에 의지할 이가 없는 이상, 혼자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나락에 빠진 고독한 죄수가 되어버렸다.
"누나... 아파?"
"언니... 아파?"
두 아이가 그녀의 양 품에 매달려 물어왔다. 카린은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얼굴에서 억지로 지웠지만... 지우려 할 때에만 보이는 뻣뻣한 얼굴로 그 두 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아파..."
말로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이라는 건, 사람이 사람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니까...
"그래도 말야... 그건 채우면 돼."
"어떻게?"
[추억]의 말에 되묻는 카린은 그 아이를 돌아보았다. 갈색의 건강한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추억]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마치, 그녀가 잃어버린 신체의 일부 같았다. 자신의 아이, 자신의 동생, 자신의 혈육... 실제로 같은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감정은 그것과 같은 언어로 그녀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인연이 있으니까..."
"추억이 있으니까..."
"추억은 인연을 부르고..."
"인연은 추억을 부르고..."
멋대로 몸이 움직여 두 아이를 안았다. 놓치고 싶지 않기에 세게 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두 아이의 숨결은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처럼 온화했고, 품에 닿는 두 아이의 체온은 살갗이 맞닿은 것처럼 따뜻했다.
'아이들이란 참... 따듯하구나...'
그녀는 두 천사로부터 밀려온 뜨거운 무언가로 가슴의 공허함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