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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원문보기 글쓴이: 장미비
바람 부는 어느 초가을 해거름녘에
장석훈 베르나르도 수사
늘 바라보던 하늘이 저만치 앞서가며 우리를 재촉한다. 시간은 늘 새로운 시간 안에 자리를 내놓듯이 아파했던 몇 개의 상흔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타인의 고통은 아무리 애를 써도 나의 고통이 될 수 없나 보다.
시간은 흐르고 인연의 모습도 세월과 더불어 지나가나 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의 조건이라는 것, 모두가 서야 할 자신의 자리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마지막 글을 쓰던 날이 언제였던가…… 완성치 못했던 글을 마무리해 본다.
“이 비가 그치면 떠나리다, 마음의 짐을 훌훌 떨어버리려 먼 곳으로. 갈 곳이 어디라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저 먼 곳이라는 곳으로 빈손으로 떠나리라. 맷돌을 돌리리라. 찌는 삶을 멍든 가슴을 갈아버리리라.
기운이 쇠약해서 돌림이 멈추일 때 그 위에 엎드려 뇌성벽력 같은 울음을 터뜨리리라. 쓰러져 잠든 뒤에 고요함이 나를 깨울 때 먼 곳이 내 안에 있음을 보리라.” 병고에 지치고 영혼은 아파 오고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고독의 공간과 일상의 하루하루 지나쳐온 날들이 이젠 헤아릴 수 없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슬픔인지 모를 감정들이 다가오고 작은 파문이 인다. 어느 해 겨울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떠난 날이 회상된다. 출가였다. 몸에 지닌 몇 권의 책과 여벌 옷 그리고 몇 푼의 돈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14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열정은 어디에 있고, 미지를 향한 개척자의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그분께 안고 가던 그 시간과 공간은…… 그래서인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관조하는 영혼을 만날 때마다 통회의 눈물을 흘린다. 현실은 한정된 공간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혼은 얼마든지 넓은 공간을 향해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다지도 세상사와 인연의 끈에 연연해하는 나의 모습이 왠지 서글퍼진다. 생을 헤아려 보기에는 너무 이른 듯하지만 서산 너머 왠지 깊게 드리워져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고,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갈 수만은 없기에 이제는 조금씩 생을 헤아려 보아야겠다.
나는 어디에까지 와 있는가? 인생의 황혼길 불혹이라는 사십 세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살아갈수록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하면 할수록 두렵고 떨린다. 죄인에까지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때마다 그 사랑 앞에 할 말을 잊어버린다.
그 신비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세상이 얼마나 하느님의 창조의 질서를 흩트려 놓았는가를 보게 되고 나 역시 그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믿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그리스도의 가슴에 묻으시고
우리의 미래 또한 친히 돌보아 주심을’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네가 가장 극심한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너의 절망 그 밑바닥을 나는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명심하여라 찬란한 희망의 뿌리에도 내가 있음을.”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일생을 통해 쉼없이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가진 것 없어 가진 것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좀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가슴에 아픈 뼈아픈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십자가 성 요한의 영혼의 노래 28장이 나에게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 ‘님 하나 섬기는 일에 내 영혼 밑천마저 다 들였네 양 떼도 간데없고 아무 할 일도 다시 없네 다만지 사랑함이 내 일일 뿐일세.’
기억하는 벗들이 이 지상 어느 한 곳에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기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회상하며 사랑하는 벗들의 삶이 ‘하느님 안에 믿음의 노래, 사랑의 노래,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삶이’ 되길 기도해 본다.
I Will Wait for You , Connie Francis 기다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