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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6
금계
2013년 4월 12일, 목포에서 서창호 교수님의 아드님 결혼 피로연이 있었다. 서 교수님은 나보다 연세가 한참 위인데 자녀분 결혼이 조금 늦었다.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다 보니까 결혼을 늦게 하셨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첫아들을 여의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기쁘실까.
정치학과 서창호 교수님은 벽창호다. 평생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당신의 신념에 따라, 오로지 정치 민주화, 교육 민주화를 위하여 매진하신 분이다. 교단에 계실 때나, 퇴임하신 후나 늘 목포 민주시민 운동의 중심에 우뚝 서계신 분이다. 시답잖은 사람들의 시답잖은 언행에는 일절 곁눈도 주지 않고 늘 처음처럼, 청년처럼 이 나라의 민주화, 우리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 열정을 다 바치신 분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서 교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씀하실지 나는 훤히 알 수 있다.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우회한다든지 에둘러 가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대학교수들이 가장 쉬운 말을 가장 복잡하고 어렵게,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직업이라고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서 교수님의 해설이나 대응은 그야말로 단순명쾌하기 그지없다.
대낮부터 뷔페 음식에 소주를 한 잔 기울이면서 나는 우리 둘째아들의 결혼식 주례도 흔연히 맡아주셨던 서 교수님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기를 가만히 축원했다.
서창호 교수님의 아드님 피로연 자리에는 서한태 박사님도 참석하셨다. 팔순이 넘은 서한태 박사님은 여전히 젊은이와 같은 힘찬 목소리와 활기찬 발걸음으로 주위를 압도하고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신다. 지금도 여전히 식욕이 왕성하여 뭐든지 가리지 않고 잘 자신다. 서 박사님한테 배운 바로는 매일 밥상에 싱싱한 채소 한 가지 이상, 해조류 한 가지 이상이 올라야 이상적이라고 하셨다.
어쩌면 수입이 괜찮은 의사라는 직업에 안주했을지도 모르는데 서 박사님은 환경오염의 심각한 폐해를 일찌감치 깨닫고 오로지 환경 보전 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
영산포에 주정공장을 세우려 하자 영산강이 오염된다면서 목포시민들과 힘을 합하여 좌절시켰고, 삼학도에 시멘트 사이로가 들어서려 하자 니기들 시멘트 한 주먹만 먹어보라고 들이대서 취소시켰고, 유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 하자 높지도 않은 산 그냥 걸어서 올라가면 될 것을 느닷없이 아름다운 유달산 능선 위로 빨랫줄같이 흉물스러운 케이블카가 웬 말이냐고 호통을 쳐서 단념시켰다.
요즈음 서 박사님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핵 발전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미국의 드리마일 사고,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 일본의 사고 다음으로 위험한 국가를 한국으로 염려하고 있다. 지진의 위험은 일본보다 적다지만 수명이 다한 발전소의 가동을 연장시킨다든지, 발전소 부품을 제대로 안 써서 돈을 빼먹는다든지, 위험한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한번 사고가 터졌다 하면 좋은 땅덩이에서 도망갈 곳도 없다.
서 박사님 다음으로는 또 누가 목포의 환경보전, 우리나라의 환경보전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을지, 누가 서 박사님만큼 전문적인 식견과 든든한 배짱과 꾸준한 추진력으로 환경운동을 밀고나갈지 슬그머니 걱정스럽다.
4월 15일, 광주 북구청. 지난 가을에는 국화 전시회를 뻑적지근하게 열더니 이번에는 또 ‘봄꽃 잔치’다. 무대까지 설치하여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트럼펫을 연주하고 온갖 기화요초를 배치하여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 확실히 지방자치가 좋다. 시장 군수를 제멋대로 임명하던 군부 철권 통치시대보다는 확실히 발전했다. 시민들의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위하여 온갖 지혜와 성의를 다하는 지자체의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어떤 영화를 보면 미국의 어떤 지방은 학교 교육 자치제도가 확립되어 학부모 대표들이 심사하여 교사를 채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명색이 학교 운영위원회가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맡은 바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문기구 정도에 머물러 학교 자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 한다.
지방자치뿐이 아니라 교육자치도 앞으로 우리나라가 꼭 깊이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마땅하다. 주민 자치, 학교 자치, 학생 자치 - 자치란 좋은 것이다.
4월 18일, 제일중에 근무한 교사들의 친목모임인 ‘코끼리떼’ 회원들 가운데 퇴직한 네 사람이 생일도에 놀러갔다. 생일중학교에는 안영익 선생이 교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귄 지 오래된 벗을 찾아 꺼떡꺼떡 놀러 다니는 기분이 얼마나 한가롭고 느긋하고 오지게 흐뭇한지 안 다녀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해난사고가 잦아서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섬이 되라고 생일도라 했다던가. 요즘은 전복 양식과 다시마 양식이 생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단다. 외국인도 꽤 들어와 중학교에서는 한글학교를 열고 있었다.
학소산,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뜻이겄제. 절 마당에 색색의 연등이 예쁘게 걸려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오는갑다. 우리는 안 교감의 안내를 받으며 생일도 이곳저곳을 꺼떡꺼떡 구경 다녔다. 참으로 복 받은 하루였다.
“아이, 나 몇 살 먹었냐, 여든 살이냐, 아흔 살이냐?”
“여든 아홉 살, 큰아들은 예순 아홉 살,”
총기가 떨어진 어머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이를 물어보고 날짜를 물어본다. 여든을 넘으면 집에 있으나 산에 있으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어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이를 물어보아도 그 때마다 번번이 기꺼이 대답해드린다. 총기가 떨어졌을망정 산에 누워 계시는 것보다는 집에 계신 것이 훨씬 다행스럽고 행복스럽기 때문이다.
4월 20일, 광주의 어느 식당에서 89회 생신 잔치. 서울 대전 광주 목포에서 대강 스무 명 정도가 모인다.
어머니는 5남2녀를 생산하셨다. 금성산을 오르내리며 억척스럽게 땔나무를 이어 나르고 돼지를 길러서 가용에 보탰다. 주조장에서 아랭이를 버리는 날에는 뜨겁거나 말거나 가장 먼저 양동이를 구멍에 디밀었다. 새콤하고 달콤한 아랭이를 구유에 부어주면 돼지는 음음, 신음을 토하며 미친 듯이 핥았다.
십여 년 동안은 아들들이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통학을 하는 바람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지으셨다.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은혜를 어이 잊을손가.
4월 22일, 날씨가 화창해서 도저히 집에 박혀 있을 수 없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고창에서 내려 모양성으로 갔다. 언제부터 한 번 가보려니 별렀던 곳이다. 철쭉꽃이 만발한 성곽 위를 걷는 기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납작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 길을 몇 바퀴 돌면 복을 받는다든가 어쩐다던가.
진주성이나 해미읍성이 비교적 평평한데 비하여 모양성은 거의 산성 수준이었다. 성안의 면적도 꽤 작은 편이었다. 예전에는 성안에 학교가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옮겼단다. 무성한 솔숲 사이로 기와집이 몇 채 들어앉은 성안은 관광객만 몇몇 어슬렁거릴 뿐 괴괴하고 고즈넉했다. 예전 조상들이 살았던 숨결이 느껴졌다.
성곽 위를 밟으며 한 바퀴 도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내가 똑딱이 사진기를 누르는 동안 전문적인 사진가들이 삼각대를 세우고 여기저기 열심히 찍고 있었다.
사진 촬영에는 아주 매력적인 장소 같았다.
모양성으로 소풍 나온 아이들의 정경이 정다웠다. 화창한 봄날, 잔디밭에서 재잘거리는 복 받은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고창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이 학교는 특히 담장이 없이 툭 트여서 보기에 좋았다.
멀리 고을을 막고 서 있는 고창의 진산 방장산,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는 그 넉넉한 품이 참 아늑해보였다.
군청 마당에 서 있는 조각상도 봄볕을 담뿍 받고 있었다. 군청 중앙 홀에 설치된 도예 작품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고창 군청은 2011년에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에서 최우수군에 뽑혔다고 바위에 새겨놓았다. 청렴이 자랑거리가 되는 나라!
고창읍은 다른 고을보다 넓고 평평하고 깨끗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모양성을 한 바퀴 돌고 성 부근에 조성된 문화적 공간의 세련된 분위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는지도 몰랐다.
4월 24일, 나는 축복 받은 봄날이 너무 후다닥 지나가는 것 같아서 조바심이 일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영산포로 갔다. 예전에는 영산포가 오히려 나주보다 더 붐비고 활기찼던 것 같다. 영산강을 타고 목포에서 배가 들어와 수산물도 풍부하고 철도와 더불어 여러 가닥으로 나뉜 자동차도로도 고스란히 영산포에서 합쳐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제 철로가 다른 곳에 뚫리면서 예전의 영산포 정거장 일대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어느 곳에서도 옛날의 영화로웠던 자취는 찾을 길 없다. 증기기관차의 우렁찬 기적도 잠잠해졌고 사람과 화물을 싣고 내리던 소란스러움도 자취를 감췄다.
옛날 영산포역에서 이 다리를 건너면 옛날 영산포 선창이었다.
목포에다가 영산강 하구둑을 막기 전까지는 밀물 때면 이 다리까지 바닷물이 밀고 돌라왔다.
여기쯤이 옛날 목포를 오르내리는 배가 닿던 선창. 60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무들 따라 구경 왔던 나는 복작이는 사람들 틈새에서 넋을 놓았다. 어물전마다 가지런히 누워 있는 갈치 병치는 은회색 비늘을 찬란하게 번쩍거렸고, 광장 귀퉁이에 쌓여 있는 옹기 항아리들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휘황한 빛을 되쏘았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선창에 다다르자 때마침 목포에서 도착한 배에서 승객들이 내리고 짐짝이 옮겨졌다. 그리고 하류 쪽을 바라보자 강심에 돛단배 두어 척이 돛폭에 바람을 잔뜩 받고 두둥실 떠서 석양빛을 노랗게 뿜으며 미끄러지듯 선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답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치 요지경이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한참이나 홀린 듯 정신을 놓고 구경하다가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동무들이 안 보였다. 나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해서 나는 엉엉 울었다. 어떤 아저씨가 왜 우느냐고 묻기에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울지 마라, 울지 마. 괜찮다. 나 따라오너라.” 내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가 나주 가는 버스를 태워주던 것이었다.
오호라, 60년 전의 그 복작대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우람하고 위풍당당하던 돛단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산포에서 버스를 타고 나주로 왔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이 나주초등학교. 교생 선생의 입교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예쁘게 걸려 있었다. 교문 왼쪽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관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내가 48회 졸업생이니까 그 사이 반백년이나 흘렀네.
뒤뜰에 줄지어 서 있던 히말라야시다도 몇 그루 여전히 단발머리를 하고 웅숭깊게 그대로였다. 나는 차마 내 손자뻘들이 얼씬거리는 그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히 어설픈 노인네가 얼쩡거리면 그들의 시선을 흐트러뜨릴까 염려가 앞섰다.
물론 악취 풍기는 콜타르를 덕지덕지 바른 별관 교실들은 없어졌겠지. 그 열매로 곧잘 친구들 뒤통수를 후려갈기던 운동장 가의 플라타너스는 잘 있는지 몰라. 가을대운동회 날이면 검정 팬티에 흰 러닝셔츠만 입고 자랑스럽게 무릎을 높이 들어 올리며 행진하던 개선문! 운동장 가로 빙 둘러쳐진 차일 밑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곰국 냄새. 해가 설핏 서산에 걸리면 상으로 받은 공책 몇 권을 보듬고 개천 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조금쯤은 스산하고 허무한 기분이 들곤 했더랬지.
학교 앞 문구점. 사탕을 담은 플라스틱 통들이 봄볕을 담뿍 받고 있다. 예전에는 저 가게에서 세모꼴 봉지에 터질 듯 탱탱하게 들어 있는 설탕물을 사 먹었다. 빨강, 초록, 노랑, 색색으로 아롱거리는 그 세모 봉지가 불량식품인지 아닌지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나주초등학교에서 남고문(南顧門) 쪽으로 뚫린 골목길에 들어선다. 이 골목 언저리에 살던 기웅이는 해병대라고 각진 모자를 쓰고 뻐기더니 월남에 파병 가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뒤로는 가끔 일찍 세상을 등진 그 친구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뜬금없이 떠오르곤 하던 것이었다.
그 골목 어디에서는 또 영기가 살았다. 영기는 샘이 많은 아이였다. 담임선생이 자기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늘 급장인 나만 예뻐하고 신용을 준다고 나 듣는 데서 투덜거렸다. 고등학생 때 한수동 저수지 길에서 짬빡 양기를 만났다. 그는 양담배 켄트를 꺼내어서 한 개비 건네주었다. 기가 죽기 싫어서 불을 붙여 빨았다. 처음 피어보는 담배 맛이 해괴망측했다.
말썽꾸러기들을 떠올리다보니 느닷없이 잿등 사는 고기장수 동석이가 생각났다. 어른이 되어 가끔 만나면 술잔을 나누었다. 한번은 술을 마시다가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꺼냈다. 6학년 때 담임 선생이 자기를 분단장에 임명하여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지 몰랐단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담임선생이 괘씸하더란다. 동석이는 학교에서 아무도 대들지 못하는 짱이었다. 담임선생은 교실의 말썽쟁이들을 몽땅 모아놓고 자기한테 분단장을 시켰더란다. 자기를 이용해 먹은 게 아니고 뭐냐고 투덜거리며 동석이는 또 술잔을 기울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송월리 과수원집 아들 성민이는 조선대 약학과를 나왔는데 폐암으로 죽었다. 극장 집 아들도 몇 년 전에 병으로 죽고, 또 누군가도 시글시글 아파서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떠나는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천 년 목사골 나주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박경중 가옥. 그나마 나주에서 조상들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맡을 수 있는 집은 장흥 군수를 지냈다는 박경중 씨의 선조가 지은 이 집뿐이다. 도의원을 역임한 박경중 씨는 나와 동갑이고 광주제일고등학교 동문이다. 박경중 씨의 웃어른도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광주고보를 다니셨다. 나주역에서 누나를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한테 격분하여 벌어진 싸움이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때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의 뺨을 때린 사람이 우리 할머니의 남동생이었다고도 전한다.
나주는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묻혀 있다. 고려 왕건은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금성산성에서까지 견훤의 군사들과 전투를 벌여 금성을 점령했다. 또 바가지 물을 얻어 마시다 천천히 마시라고 버들잎을 훑어서 넣어준 처녀와 눈이 맞아 둘째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단발령이 내렸을 때에는 시범적으로 삭발한 나주 목사에 격분한 유림이 습격하여 목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창녕 조 씨 가운데에서도 사정공(司正公)파인데, 나의 선조이신 사정공은 사람 살기에 더없이 평화롭고 넉넉한 곳이라고 감탄하며 나주에 정착하여 새로이 한 계보를 이루셨다 한다.
금성관, 조선 시대 지어진 관사, 객사, 객관. 관청의 주요 행사가 열렸다던가. 최근에 깔끔하게 복원되었지만 우리 어렸을 적에는 나주 군청 청사로 쓰였다. 지금은 뜯겨서 사라졌지만 금성관 구역 안의 동남쪽에는 우리 친구 기문이의 집이 있었다. 그 집의 살구나무에는 해마다 통통한 살구가 숱하게 달렸다. 그 보드랍고 향기롭던 맛이란....... 나는 그 집에서 밥도 여러 번 얻어먹었다. 기문이 어머님의 음식 솜씨는 근방에서 알아줄 만큼 깔끔하고 웅숭깊었다. 특히 그 사근사근하고 입에 짝짝 달라붙던 배추김치 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나주군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쳐서 금성시를 만들었다. 금성관, 금성산, 금성천은 예전부터 내려온 말이지만 금성이란 고을 이름은 다른 지방 사람들한테는 생소해서 지명도가 떨어졌다. 결국 금성시는 다시 친숙한 나주시로 바뀌었다. 지금은 나주군 전체가 나주시가 되었다.
조선시대 전라남도의 중심지였던 나주는 도청소재지가 광주로 옮겨가면서 침체 일로를 걸었다. 그나마 이제 동서남북 네 성문을 복원하고 (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 금성관 일대를 정비하고, 정수루와 목사 관아를 정비하여 옛 고을의 모습을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5월 11일, 혼자 버스를 타고 영광으로 갔다. 영광초등학교는 역사가 오래 되어 학교 건물이 평범하였는데 영광중앙초등학교는 비교적 새로 지은 건물이라 분위기가 산뜻하고 호방함마저 느껴졌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나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장 구경을 무엇보다 좋아한다. 한쪽에서는 솜사탕을 뽑아내고 남녀노소가 온통 쏟아져 나와 북새통을 이루며 재래시장 곳곳이 활기로 가득하다.
한참을 부지런히 쏘다니다가 축협 식당에 들어가 비빔냉면을 먹었다. 6천 원짜리인데 쇠고기 육회가 한 숟가락 정도 얹혀 나왔다. 부드러운 고깃점이 목구멍으로 아주 수말스럽게 넘어가고 냉면 맛도 썩 좋았다. 목포에서는 만 원씩 받으면서도 고기 한 점 없는 냉면이 대부분이다.
[글로리 영광, 대한민국 일등 군 영광] 원래 영광군은 영광(榮光)이 아닌데 글로리 영광으로 둔갑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영광 군청 앞 도로에 숱하게 내걸린 노란 리본이 바람에 휘날렸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 한 번 못 가보았다. 그 시절에도 가끔 수학여행 다니는 버스가 사고를 내서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일이 있었다. 큰아들의 안전을 지극히 염려한 나머지 아버님은 나를 절대로 수학여행에 보내지 않으셨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보니 맨 먼저 아버님이 떠올랐다. 그 동안 세월이 50년이나 흘렀는데도 여러 어른들의 잘못으로 선진국이 되어간다는 나라에서 이런 비극이 벌어졌다니 민망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학생들 수학여행을 여러 번 인솔하고 다닌 나는 물론이려니와 수많은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참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완전한 대책을 마련해야겠다.
삼가 비명에 가신 분들의 영전에 엎드려 명복을 빈다. (끝)
첫댓글 선생님의 '봄날은 간다' 편은 6회로 끝납니다. 회원 여러분, 재밌으셨는지요? 달고 행복하며 뜨겁고 자랑스러운 전반을 지나 또 인생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천천히 둘레를 살피고 회상하고 짓고 부어 선생님을 사랑하는 여러 분들께 지난 보람을 안겨주신 기행기 늘 감사합니다. 온라인으로나마 만남의 회포가 즐겁습니다.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