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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공동 학술대회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근원과 현상
기조강연 :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근원과 현상 : 길희성 교수 (서강대 명예교수)
토론자 : 한국 교회사에서 기독교 배타주의 : 이숙진 교수 (성공회대 초빙교수)
불교에서 보는 기독교 배타주의 : 유승무 교수 (중앙승가대학 사회학)
사회 및 토론진행 : 이정배 교수 (감리교신학대 통합학문 연구소 소장)
일시 : 2008년 9월 30일 화요일 오후 3시-6시
장소: 기독교회관(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
주최: 감신대 기독교 통합학문 연구소,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
후원 :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초청의 글>
21세기 변화하는 시대에 여러 갈등과 장벽이 여전히 높은 것을 실감하고 있는 때에, 감리교신학대 기독교 통합학문 연구소,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는 공동으로 교수들이 모여 종교와 사회에 대한 폭넓은 대화와 공감대를 이루기 위해, 학술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행사는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근원과 현상”이라는 주제로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주제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비대해지면서 대형화되고, 정치권력화하며, 불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사회적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점에,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점검하고, 자성하는 학문적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근원과 현상을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에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이번의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학술행사는 길희성 교수, 이숙진 교수, 유승무 교수의 토론자를 모시고, 한국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근본주의의 뿌리와 역사를 다룸으로써, 오늘 이 시대의 폐해적인 요인들의 원인과 현상들을 찾고자 했습니다. 특히 불교학자를 모시고 불교가 바라보는 기독교의 배타주의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비판함으로써, 종교간의 의사소통을 나누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발표자의 간략한 발표와 사회자와 토론식으로 진행하면서, 이번 학술행사를 더욱 진지하게 이끌어가게 될 것을 기대하며, 드러난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의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지나간 시대에는 자기 종파 중심의 사고를 하여, 자기 확장에만 관심을 갖은 과거를 반성하고, 서로 협력하고 돕는 건강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의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입니다. 특별히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와 건전한 시민사회를 이루려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세 대학교의 학술연구소가 만난 다는데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쁘신 시간 중에 참여해 주심에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통합학문 연구소 소장 이정배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원장 최영실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 소장 채수일 올림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교수 (서강대 종교학 명예교수)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유일신 신앙에 기반을 둔 그리스도교 자체의 근본 성격에 기인한다. 유일신 신앙은 지역이나 민족 공동체에 국한된 신관을 극복하고 온 인류를 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보편주의적 성격을 지니지만, 동시에 ‘참 신’과 ‘거짓 신’을 구별하고 타종교들의 신앙을 ‘우상숭배’로 배격하는 배타성을 보인다. 특히 하나님이 한 역사적 존재인 예수를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보편적 진리를 계시했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구원의 진리를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선교 열정을 고취하고 타 종교, 타 문화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낳았다.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여기에 미국 근본주의 신앙의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와 대속신앙이 더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2000년 역사를 통해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신학사상과 풍부한 영성 전통들을 도외시하는 지극히 편협한 성서 이해와 복음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과 공격적 선교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하고 결정적인 계시임을 긍정하면서도 결코 유일무이한 계시는 아니고 타 종교에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졌고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1. 최근 들어 공과 사를 가리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공직자들의 종교 활동이 우리 사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로서, 민주사회의 기본질서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이 순수한 ‘신앙적’ 동기에서 유발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그들의 행위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다수의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다원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의 갈등이 사회 전체의 관심이 될 정도로 위험수위에 달한 적은 없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이 어떤 한 종교에 의해 형성되기보다는 단일 민족, 단일 언어, 공통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교문화라는 공통 요소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분열적 요인보다는 이러한 공통 요소들에 의한 민족적 동질성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종교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한 집단의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특히 근대 세속화(secularization)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는 하나의 지배적 종교가 사회 구성원 다수를 하나로 묶어주는 집단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의 보루 역할을 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지배적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조 시대에 유교가 그런 역할을 했지만 근대 민주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유교는 적어도 제도상으로 더 이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도 유교가 한국인의 심성, 사고방식, 생활양식, 가치관 등을 음으로 양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조선조 시대에 불교와 천주교를 탄압했던 것처럼 타 종교를 억압하거나 마찰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유교는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전 한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종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불교 신자이건 그리스도교 신자(천주교, 개신교)이건 한국인으로서 유교 윤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는 우리 사회에서 거의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 사회에는 종교 갈등으로 인한 심각한 사회분열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장로 대통령’ 이명박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위협을 받고 있다. 예전에 ‘장로 대통령’ 이승만 정권 때에도 정권의 기독교 편향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 당시와 현재의 상황은 두 가지 면에서 판이하다. 하나는 이승만 정권 당시 기독교인의 수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회적 소수였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당시 불교계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기독교는 이미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된지 오래고 실제로 불교나 가톨릭보다도 더 큰 사회적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편, 불교계는 종교적 각성과 더불어 각종 개혁 세력과 집단이 등장하면서 정치의식이나 사회참여 면에서도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불교계의 집단적 행보는 이러한 달라진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의 불교계와 기독교계(소수 진보적 기독교 진영을 제외한)의 대립은 잠재적으로 매우 위험한 수위에 도달해 있다.
오늘의 이 모임은 일부 기독교 신자 공직자들의 몰지각한 행위가 단순히 부주의나 실수기보다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사명감을 반영한 것이며 그러한 신념의 배후에는 타 종교에 대한 한국 기독교계 일반의 배타성과 공격적 선교열이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묻는다. 한국 기독교의 지독한 배타성과 공격적 선교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전 국민 복음화 운동’ 등 비 그리스도인들이 들으면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호를 아무렇지나 않게 외쳐 온 한국 기독교, 뻔히 위험지역임을 알았을 터인데도, 그리고 엄연히 기독교 선교가 금지된 국가임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전도 여행을 감행하는 한국 교회의 선교 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2.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종교적 배타성과 공격적 선교가 흔히 생각하듯이 한국 기독교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 신앙이나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고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는 본래부터 선교하는 종교다. 처음부터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종교로 시작했다. 기독교인 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선교 행위는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모든 종교가 자기가 믿는 진리를 전파하는 포교활동을 한다. 어디 종교뿐이랴. 철학자들, 과학자들, 그리고 문학가들도 진리를 추구하며 자기가 깨닫거나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 한다. 모두가 다 자기가 깨달은 진리가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믿고 행동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내가 미처 못 본 것이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주장은 내가 속한 사회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나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욕망이 나의 주장을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겸허한 자기반성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든 진리 주장은 따라서 폭력성을 띠기 쉽다. 예수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지만, 진리란 자칫하면 매우 위험한 것이 된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면 자유는커녕 진리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고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보편적’ 진리,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고 신봉하는 종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자기가 믿는 진리가 만인을 위한 구원의 진리, 전 세계를 위한 보편적 진리임을 확신하면서 그 진리를 모르는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전해야 한다는 선교적 사명감이 강한 종교일수록 진리의 이름으로 ‘제국주의적’ 폭력을 행사하기 쉽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그리고 공산주의와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을 진리의 보편성을 앞세운 세계의 5대 '선교적 종교‘(missionary religion)로 들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그리스도교다. 불교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모두 그리스도교에서 영향을 받았거나 배웠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과 우주만물을 창조한 유일신 숭배(monotheism)의 출현은 인류 역사상 매우 획기적 사건이었다. 유일신 신앙이 출현하기 전 다신 숭배(polytheism) 시대에는 인류는 토착적 지역신, 혈연에 관계된 조상신, 부족신 민족신들을 섬겼다. 따라서 한 집단이 믿고 섬기는 신을 다른 집단들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고 모든 인류를 내고 인류 역사 전체를 관장하는 ‘보편적’ 유일신 신앙의 출현과 더불어 ‘우상숭배’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참 신’과 ‘거짓 신’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극히 역설적이지만, 유일신 신앙은 시작부터 보편성과 배타성이라는 양면을 지니고 출발한 것이다.
유일신 신앙의 원조인 유대교의 경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민족신적 개념과 선민의식으로 인해 타 민족,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주의의 폭력성을 제어하는 요소가 되기도 했다. 더욱이 유대교는 역사적으로 타 민족, 타 종교를 정치적으로 지배할만한 힘을 누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힘으로 개종시키려는 제국주의적 신앙의 유혹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유대교는 유일신 신앙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메시지를 인류 구원의 보편적 진리로 전파하는 선교적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3. 이와 대조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 이스라엘’을 자처하는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강력한 선교적 종교로 출발했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 상 유대교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더불어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사라진 ‘극복된’ 종교이며 ‘극복되어야 할’ 종교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애초부터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안고 출발한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지중해 문화권 일대로 진출한 그리스도교는 가는 곳마다 토착적 다신 신앙과 문화, 이른바 ‘이방종교’(paganism)를 파괴하거나 대체하는 배타적 종교가 되었다. 그리스-로마-이집트의 다신 숭배적 요소들을 성인 숭배로 흡수하거나 대체하는 한편, 심오한 그리스 철학 사상은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흡수해서 신학을 발전시키고 정교한 교리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리의 ‘보편성’을 강화했다. 유일신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주지주의적 전통이 손을 잡고 이를 강력한 교권이 뒷받침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서양 고대와 중세를 지배하는 종교로 군림했다. 율법과 실천 중심의 유대교 신앙이 이론과 교리 중심의 신학적 종교로 변화하면서 ‘정통교리’(orthodox)의 이름 아래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그리스 철학이 손을 잡았다 하지만, 둘은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융화되기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실제로 서구 지성사는 계시(revelation)와 이성(reason), 자연과 초자연, 철학과 종교의 대립과 조화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였다. 하지만 둘을 결코 하나가 되지 못했으며, 크게 보아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둘은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으며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 사상사는 간단히 말해서 이성이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게 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유일신 신앙과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은 서구 역사 속에서 보편주의 정신의 두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양자 모두 보편주의가 지니고 있는 개방성과 배타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유일신 신앙이 인종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모든 인간을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로 보는 평등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예언자적 비판정신을 심는데 기여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타 종교와 사상을 억압하고 정죄하는 배타주의를 낳았다. 이성을 중시하는 서구의 합리주의 정신 또한 한편으로는 인간을 비합리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제도나 문화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힘으로 작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신체성과 감성을 억압하며 문화적 다양성과 정감적 유대성을 파괴하는 획일주의의 폐해를 낳았다. 특히 유일신 신앙과 근대적 합리주의 모두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고취시킴으로써 오늘의 전 지구적 환경위기를 초래한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4. 유일신 신앙의 종교적 배타성은 단적으로 말해서 계시(revelation) 신앙에서 온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모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전 인류 역사를 섭리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이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특별한 계시(special revelation)를 받았다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이른바 ‘계시종교’들이다. 유대교는 모세를 통한 율법의 계시,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의 육화(Incarnation)인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슬람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인 쿠란(Quran)을 하나님의 가장 확실하고 결정적인 계시로 믿는다. 세 종교 모두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보편적 계시, 즉 하나님이 모든 인류로 하여금 창조의 질서를 통해 그를 알 수 있도록 계시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세 종교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각 종교가 받은 특수한 계시에 대한 믿음에 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이 세 종교 간의 갈등의 뿌리이며, 나아가서 계시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 동양 종교들과 초자연적 계시 자체를 부정하는 세속적 합리주의자들의 눈에 세 종교가 그토록 배타적으로 보이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세 종교가 자기들의 계시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주장하느냐에 세 종교간, 그리고 동양 종교들에 대한 배타성과 갈등의 문제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역사의 우연처럼 보이는 한 특정한 사건을 통해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했다는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계시종교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보편성과 특별한 계시를 믿는 계시신앙과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핵심 문제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논하는 기독론(Christology), 그리고 이슬람의 경우는 쿠란(Quran)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피할 수 없는 문제의 핵이고 뇌관이다.
동방교회, 서방교회, 개신교 할 것 없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은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이 특별한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든 - 계시자, 중보자, 대변자, 현현, 아들, 육화 등 -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 그의 뜻과 특별한 섭리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를 알아야 하고 예수를 이해하려면 그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계시인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는가 하는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주어지지 않는가? 이 문제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한,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가 계시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배타성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5. 현대 다원주의(pluralism)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문제를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 통로이며 타 종교와 타 문화권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 따라서 선교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 결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타 종교와 타 문화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렸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혹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 Reality는) 결코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태초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로고스(Logos), 즉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포용주의(inclusivism) 입장이다. 타 종교에서 발견되는 모든 긍정적 가치들 - 거룩함, 진리와 진실, 사랑과 정의, 아름다움 등 - 을 모두 우주적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간주하여 그리스도교 밖에도 숨겨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모르고도 ‘그리스도’라는 보편적 실재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은 타종교들에 대해 매우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종교의 논리에 따라 타 종교를 평가한다는 점에서 배타주의보다도 더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 종교를 단지 시민윤리적 차원에서 공존의 대상이나 예의바른 존중의 대상 정도로 간주하는 선을 넘어서 자신의 신앙적 논리에 따라 타 종교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존경하는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6.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하느님의 특수계시에 선행하는 보편계시(universal revelation)에 대한 믿음도 줄곧 존재해 왔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부여 받은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창조 세계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와 같은 믿음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을 수용했으며, 철학과 신학의 대화나 철학적 신학을 발전시켜 왔고, 인간의 이성과 문화 일반에 대한 긍정적 태도도 가질 수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영향으로 가톨릭은 대체로 개신교보다 이러한 전통이 강하지만, 정통 개신교 신학에서도 어느 정도 보편계시를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 칼 바르트의 계시 중심 신학의 강한 영향 아래 이러한 보편계시, 자연신학, 철학적 신학 등의 전통은 많이 약화되었고 현대 개신교 신학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계 일반을 지배하고 있는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와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복음의 핵심으로 삼는 ‘복음주의’(evangelical) 진영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다.
한국의 주류 개신교 신학과 신앙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물론이고,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이나 보편계시의 개념조차 도외시하고 있으며,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다양한 신학사상이나 영성도 무시한 채,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직 성서의 문자주의적 이해와 예수의 대속 신앙으로 축소시켜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죄 사함을 받지 않는 한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인간의 이성이나 도덕적 노력, 심오한 종교적 경험이나 통찰도 아무 소용없고, 타 종교의 성인이나 성자들도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된다. 이것이 한국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배타적 편협성과 공격적 선교의 배후에 있는 신학이다.
7. 나는 한국 기독교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일반이 지닌 배타성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타 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은 이제 이 사실을 직시하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유한성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타 종교에 대해 겸손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의 지적, 도덕적, 신학적 의무다. 사실 배타성의 문제는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대 다원사회를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이제 자기 자신의 전통만을 알았던 ‘우물 안 개구리’ 식 편협성을 넘어서 타 종교 전통들을 배우려는 겸손과 개방성을 요구 받고 있다. 이는 결코 자신의 전통을 경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와의 잠재적 갈등을 해소하고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자기 종교의 사상과 영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시대로부터 19세기 후반 내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와 같은 아시아의 위대한 철학적 종교를 제대로 알거나 본격적으로 대면을 한 일이 없었다. 서양 그리스도교는 중세 시대까지 주로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여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근대 이후로도 각종 서구 철학사상에 의거하여 신학을 해 왔다. 칸트 철학, 실존주의 철학, 마르크스주의 철학 등이 좋은 예다. 동양의 철학적 종교와의 본격적 만남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현대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출현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종교학자 스미스의 지적대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동양종교들과의 만남은 현대 과학적 세계관과의 만남에 못지않을 정도로 혁명적 사건이다. 둘 중의 어느 하나도 무시하고는 현대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사실을 먼저 깨닫고 다원주의 신학을 전개한 것은 서구 신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이며 우리 아시아 신학자들에게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현대인에게 상식이 되어버린 역사의식 내지 인간의 역사적 유한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만든 모든 사상과 제도, 종교와 문화는 역사적 산물로서 예외 없이 상대적이며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말해서,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은 절대적이지만 하나님을 접하고 알고 논하는 종교는 역사적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종교도 하나님 자신을 알지 못하며 드러내지 못한다. 하나님은 종교를 초월한다. 종교가 자기를 절대화하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항시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비를 위한 자리를 남겨두어야만 한다.
8.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특별한 계시에 근거한다 해도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지식은 여전히 유한하고 상대적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을 위한 계시인 한 역사적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역사성과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되며, 인간의 언어로 이해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하나님 자신의 육화로 간주되는 예수 자신도 한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 문화와 종교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역사적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의 언어와 개념들 역시 시대적, 문화적 제약 아래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그 뿐 아니라 성서는 시대마다 새롭게 해석되어 왔다. 인간의 언어로 이해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 인간에 의해 해석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해도 인간의 몫은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근본주의 성서신앙의 배타적 편협성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데서 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 혹은 창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별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 그리고 교회의 풍부한 전통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로와 창구들 자체는 역사적 상대성과 유한성을 지닌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의 근본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화하여 하나님 자신의 위치에 올려놓은 데서 비롯되며, 한국 기독교 특유의 배타성은 여기에 더하여 교회의 풍부한 신학 전통과 영성을 무시한 편협한 문자주의적 성서신앙과 값싼 은총을 남발하는 대속신앙에서 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 자신의 신앙이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
예수는 결코 자기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 일이 없었으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놓은 후세 그리스도교 신학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자신을 비우고 낮춘 존재였다. 그는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했다. 예수는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존재며, 모두에게 자기 비움과 자지 부정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명했다.
예수는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가르쳤다. 선한 자나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했으며, 그의 삶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편견과 차별의 장벽을 허무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을 증언하는 삶이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와 삶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무차별적 사랑과 보편적 구원의 의지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특정한 역사적 매개체에 의해 제한될 수 없음을 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자체이지, 이 사랑의 특정한 포현이나 계시의 사건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지, 예수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수용하고 증언하는 인간의 응답일 뿐,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사랑에 우선하거나 인간을 구원하는 힘은 더욱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개신교 신앙의 구호는 자칫 이러한 근본적 사실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 어떤 교리도 사상도 아니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나 인간의 믿음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힘이며, 이 사랑에서 배제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가르치고 보여 주신 분이다.
9.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 기독교가 편협한 배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이성을 중시해온 서구 신학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 받아 반지성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잘 못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를 추구하지 이성에 반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억지 행위가 아니다. 계시와 이성은 상호 견제적이고 보완적이어야 한다.
둘째, 한국 기독교는 획일화되고 단순화된 근본주의 성서 신앙과 복음 이해에서 벗어나서 2000년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 담겨진 풍부한 신학적 다양성과 깊은 영성의 전통들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 기독교는 ‘오직 성서,’ ‘오직 믿음’이라는 이데올로기화 된 개신교 신학전통을 과감하게 탈피해야만 한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그리스도교의 울타리에 갇힌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동양의 철학적 종교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민족들의 토착적 신앙을 통해서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배우는 개방적 신학을 필요로 한다. 오늘의 세계는 더 이상 한 종교의 자기 절대화나 진리의 독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종교는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을 부추길 것이며 스스로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다. 특히 서구 사회와 달리 명실상부한 종교다원 사회에 살면서 풍부한 종교문화 전통을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 기독교는 서구 그리스도교가 세워 놓은 울타리를 과감하게 벗어나서 세계 모든 종교 전통들과 대화하고 배우는 열린 신학의 길을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교수 (성공회대 한국교회사 전공 초빙교수)
1.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불교계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 같다. 불교계는 공직자들의 종교편향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고 도심 시위를 통해 행정부 수장의 공식 사과와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최고통치자의 유감 표시와 공무원 복무규정 개정의 약속 등을 통해 불교계의 불만이 어느 정도 수그러든 감이 있지만 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사건은 공직자들의 기독교 편향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동안 기독교인들에 의한 전통문화 파괴나 타종교 상징물 훼손은 적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에서의 장승파괴, 사찰이나 캠퍼스에 안치된 불상 훼손, 공공장소에 설치된 단군상 훼손 등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종교갈등의 현장에는 개신교가 거의 항상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개신교는 한국사회의 ‘문제아’로 간주되곤 한다. 안티기독교 운동의 등장이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타종교의 상징물 파괴에서부터 공직자의 종교편향, 나아가 작년의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태에는 개신교의 적극적 선교활동이 관련되어 있다. 이는 ‘복음 전파’를 지상명령으로 삼는 기독교 전통의 산물로 볼 수 있지만 한국 개신교에서 배타주의가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은 왜일까? 한국 개신교 배타주의의 뿌리 깊은 지속성과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 근현대사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 지닌 자기-타자인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는가?
2. 폭력적 배타주의라는 종교현상은 기독교의 본성이 아니다. 다만 역사적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 십자군전쟁이나 마녀사냥 등 역사 속에 등장한 폭력적 배타주의는 기독교가 특정한 사회문화적 환경과 만나면서 발생한 병리적 현상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 배타주의도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한국 개신교의 뿌리는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이다. 초기 선교사의 대부분은 19세기 말 부흥운동과 기독교 문명론의 세례를 받고 입국한 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신앙과 신학은 온건한 형태의 ‘복음적 신앙’이었지만 이후 한국 개신교의 주류가 된 것은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이다. 근본주의란 용어는 20세기 초 미국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신학 논쟁 과정에서 등장한 <근본적인 것들 The Fundamentals>(1910~1915)이라는 책자에서 처음 등장했다. 여기서 ‘근본적인 것들’이란 ‘성경무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 등과 같은 당시 근본주의 진영이 확립한 교리이다. 이러한 근본교리를 신봉하는 자는 “근본교리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자”, 구체적으로는 교회와 신학 속으로 이미 침투한 근대주의(modernism), 자유주의(liberalism), 세속주의(secularism)로부터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를 의미했다. 그러나 미국 근본주의 신학 진영은 자유주의 신학과의 논쟁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이후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는 신근본주의, 전투적 근본주의, 온건한 근본주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4. 미국 기독교 신학에서는 근본주의가 주변부로 물러났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근본주의 신학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물론 초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인들에게 적극 수용될 수 있었던 요인은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 근현대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 수용 초기 한국의 독특한 사회정치적 상황이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을 적극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닐까?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 한국사회는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10년 뒤에 다시 터진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민중들의 삶을 황폐화시켰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연이어 벌어진 이러한 전쟁은 서양종교인 기독교의 ‘힘’을 부각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당시 민중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군대, 청나라 군대, 러시아 군대가 미국 성조기가 걸려 있는 교회나 선교사 거주 지역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전쟁 체험을 통해 한국인들은 미국의 종교인 개신교의 ‘힘’을 절감했고 이는 교회로 신자를 끌어 들이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전쟁 체험이 민중들을 교회로 끌어 들이는 역할을 했다면, 이후에 급속하게 전개된 식민지화 과정과 국권상실 이후 식민지하의 암울한 상황은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은 현실개혁과 사회참여보다는 죄의식과 죄의 고백에 강조, 내세에 대한 열렬한 믿음,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식민지하의 암울한 삶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면서 호소력있게 다가왔다. 이러한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은 일제 말엽의 혹독한 상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교회 안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해 갔다.
5.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주의 신학이 선교 초기부터 부각된 것은 아니다. 선교 초기에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근본 교리가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생경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이질성은 개신교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구 근대문명을 선교의 도구로 삼았다. 그들은 근대문명이 산출한 ‘근대주의(근대적 가치)’가 아니라 근대문명의 ‘물질적 성과’를 선교의 방편으로 활용하여 개신교에 ‘문명의 종교’라는 후광을 입혔다. 이러한 문명화 선교는 서구문명의 우월성에 입각한 문명/야만의 이분법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이분법 하에서 한국사회의 전통적 관습과 문화는 타자화되었다. 당시 개신교 잡지에 자주 등장한 ‘구습타파’의 구호는 이러한 기독교문명론의 산물이었다.
‘구습타파’가 문명/야만의 이분법에 근거한 타자화 전략이라면 이 시기 개신교 선교의 현장에 자주 등장한 ‘우상타파’의 구호는 유일신 신앙에 근거한 타자화 전략이었다. 유일신 신앙의 언어에서 볼 때 한국인들의 전통적 신앙은 대부분 우상숭배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조상의 위패나 무덤 앞에 절하는 유교식 조상제사, 불상 앞에 절하거나 제물을 봉헌하는 행위, 도교나 민간신앙에서 등장하는 모든 의례는 ‘귀신예배’나 ‘악마숭배’와 같은 우상숭배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초기 개신교 배타주의는 기독교문명론에 근거한 ‘문명/야만의 이분법’과 유일신 신앙의 관점에서 전통문화와 전통종교들을 ‘미신’과 ‘우상’의 범주로 설정하면서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요컨대 초기 개신교는 문명, 과학, 종교의 이름으로 전통문화와 전통종교를 야만, 미신, 우상으로 표상하는 타자배제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근대 문명에 부합하는 ‘참 종교’로 명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6. 1900년대 대부흥운동을 분기점으로 개신교 배타주의는 방향을 바꾸어 분출하기 시작하였다. 선교 초기의 개신교는 문명화 선교의 패러다임에 따라 구습타파, 개화와 계몽, 구국 등을 주요 슬로건으로 제시하였지만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죄의 고백과 회개가 강조되고 교회의 조직화와 교회보호가 주된 과제로 설정되었다.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에 내재한 신학적 신앙적 특성이 식민지화라고 하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전천년주의에 입각한 재림과 개인의 영혼 구원,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교회의 정치개입이나 독립운동을 금하는 정교분리원칙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교회조직의 정비와 전도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는 1930년대에 접어들게 되면 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신학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의 근본주의는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 엄격한 교리주의, 가부장적 신앙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 자유주의적 성서 해석, 체험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여성 교인의 권익 주장과 같은 내부의 타자들이 등장한다.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1934), ‘아빙돈 주석번역 사건’(1935), 각종 신비주의 운동과 신비주의 집단의 출현, ‘김춘배 목사 여권옹호 발언’(1934) 등은 이 시기의 근본주의 신학에 도전하여 일어난 대표적 사건들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당시 근본주의 진영은 강력한 배타주의를 발동시켰다. 교권을 장악한 근본주의 세력은 성서비평에 근거한 성서의 시대적 재해석을 성서의 절대적 권위(성서무오설)를 붕괴시키는 위험한 해석으로 비판하고, 형식화된 신조나 교리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신앙 집단을 위험한 신비주의 집단으로 공격하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언권 요청을 부당한 요구사항으로 비판하였다. 내부의 타자들에 대한 근본주의의 이러한 배제의 정치는 물론 정통/이단의 이분법을 통해 행사되었다.
7. 개신교 근본주의에 나타난 이러한 자타인식의 이면에는 ‘구별된 자’ 혹은 ‘구원받은 자’라는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자의식은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가져오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성을 분출하는 원천이 된다. 이 시기의 타자인식에는 윤리적/미학적 표상도 생산되고 있다. ‘미혹하는 자,’ ‘불쾌감을 주는 자,’ ‘거짓 신자,’ ‘불결한 악인,’ ‘죄악과 마귀의 궤계,’ ‘마귀의 종’ 등과 같은 온갖 부정적 메타포들은 ‘거짓’이라는 윤리적 판단과 ‘불결’이라는 미학적 표상들로서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분기점으로 작동하였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성도’와 ‘외인’이라는 이름짓기(naming)를 통해 ‘순수한 우리’와 ‘타락한 그들’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을 작동시켰다. 이러한 차별의 장치는 근대적 이분법의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서구 근대의 인간 이해에는 합리적 주체를 항상 타자와 대립시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내재한다. 그러한 인식론 속에서는 타자가 없는 주체는 입증될 수 없으며 주체가 입증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끊임없이 생산되어야만 한다. 이런 경향은 인간 내부에까지 적용되어 자기 내부에서도 타자성의 영역이 설정된다.
외부와 내부에서 순수와 오염, 순결과 불결을 끊임없이 구별해내는 이러한 분류체계 속에는 매우 폭력적인 메타포들이 내재하고 있다. “한 군사의 날카로운 칼로 불공대천 원수 사탄, 억만 마귀 베일 때에 한 명인들 용서할까, 승전하고 개가하세 기쁘고도 즐거워라”1)는 어느 찬미가의 구절에는 정복주의와 승리주의가 엿보인다. 이러한 정복주의적 승리주의 의식은 개신교 근본주의의 전투적 성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찬미가는 언어, 표상, 상징의 차원에서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는 행동코드의 지시에 따라 언제든지 실제적인 행위로 표출될 수 있다. 상징은 인간의 잠재의식에까지 깊이 뿌리내린 사고의 표현이며, 특히 종교적 상징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창조하여 심리적 혹은 정치적으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고려해 볼 때 한국 개신교의 전투적 세계관이 상징적 영적 차원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공격적인 선교 지상주의가 배태한 잠재적인 종교 갈등과 개신교내의 권위주의적 성격에는 이러한 전투적 세계관의 영향이 깃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기는 십자가, 우리의 전술은 성서, 우리의 대장은 예수 그리스도이다”2)라는 글에서도 공격적이고 군사적인 메타포가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전투적 세계관은 창가나 찬송가, 설교를 통해 공동체 외부에 존재하는 적과 자신의 내부의 적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분리해내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인식틀을 강화시킨다. 지속적 반복적으로 이러한 메시지에 노출되면 언제든지 악을 완전 소멸시키는 전쟁에 뛰어들 수 있는 순교자의 신앙이 몸에 각인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군사주의적 가치를 자신의 몸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매순간을 악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일상적 삶 자체에서 전장이 준비되고 있다. 모든 마귀를 쓸어버려야 태평안락을 얻는다는 믿음과 세계 곳곳에 신자들을 파송한다는 선교관은 공동체 외부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는 이데올로기적 신앙적 장치이다.
이러한 담론의 특징은 제거해야 할 악을 우리 ‘외부’에서 찾는다는데 있다. 외부에 악과 마귀가 있다는 인식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귀와 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장치는 외부의 악에 집중함으로써 우리 내면의 악을 은폐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타자를 마귀로 몰아세움으로써 자신은 마귀가 아님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는 심리적이건 물리적이건 타자에 해를 입히면서도 자신의 가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진리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정의의 사도로 자기 자신을 미화할 뿐이다.
8. 해방 이후 개신교 근본주의의 주요 타자로 등장한 것은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이며 미국은 선망과 모방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친미-반공 이데올로기는 한국 개신교의 신앙고백이자 교리로 승격되었다. 물론 한국 개신교의 반공주의는 미국 개신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미국 근본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무신론적이며 반성경적이라는 이유로 ‘적그리스도’ 혹은 ‘붉은 용’으로 표상하면서 강력한 반공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정서는 1950년대 매카시 열풍과 맞물리면서 미국 사회를 광적으로 몰고 갔다. 전투적 근본주의자들의 적극적 동조가 없었더라면 미국 사회에서 ‘빨갱이 사냥’은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미국을 ‘이상적 타자’로 욕망하는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정서는 그대로 수용되었고 친미는 곧 반공을 의미하였다.
한국사로 눈을 돌려보면 식민지 시대에 이미 공산주의에 대한 개신교의 부정적 인식과 태도가 발견된다. 1920,3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과 반기독교운동, 만주와 노령 등지에서 공산당의 박해에 의한 기독교인의 순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부정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종교적 신조나 교리 차원으로 끌어 올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6.25전쟁이다. 협소한 공간에서 3년이란 장기간 동안 같은 혈연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졌던 한국전쟁의 고통지수는 상상을 불허한다. 전쟁의 깊은 상흔은 심리적 외상(trauma)으로 신체에 깊이 각인되었다. 주디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에 따르면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은 기억이나 망각의 해법으로 고통을 견디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망각의 해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전쟁 이후 냉전이 고착화되자 남북한의 군사정권은 전쟁의 상흔을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증오의 정치학’을 작동시켰다.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표어가 말해주듯 상흔은 증오의 정치학으로 인해 끊임없이 현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저항의 에너지를 ‘반공’에 투사시켰다.
이러한 증오의 정치학이 작동하는데 개신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월남 개신교인들의 해석된 기억과 “공산화된다면 제일 먼저 죽을 사람들은 목사들이며 크리스찬들”이라는 ‘빨갱이’에 대한 증폭된 두려움이 한국교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양시키는 주요 자양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반공이 종교적 신조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적 교회에서는 공산주의와의 대화나 공존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9. 2003년 3월 1일 반핵반김자유통일국민대회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목이 쉬도록 외쳤다.
“미친개 김정일 처단 2000만 북한동포 탈출!” “외신기자들과 미 대통령 부시와 미국의 상하원의원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도록 ‘영어’로 기도합시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사랑합니다. 아이 러브 유 유에스에이! 아이 러브 유 아메리카!” “통성기도만이 미국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쓰러질 때까지 우십시오. 미국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비명 속에는 ‘정복대상인 타자, 북한’과 ‘욕망대상인 타자, 미국’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이중적 타자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선/악, 미국/북한, 하나님/사탄, 보수/진보, 우익/좌익, 애국/반역, 더 노골적으로는 기독교인=친미, 사탄의 꼭두각시=반미라는 기괴한 이분법적 도식들이 타자에 대한 부정적인 메타포를 생산하고 있다. 북한-공산주의를 지칭하는 적그리스도, 사탄, 악의 화신이라는 메타포들은 타자에 대한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인식론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마니교적 선악 이원론, 전천년주의 종말론에 영향받은 사탄의 음모론, 사탄과의 싸움에서 미국이 감당하는 주도적 역할에 대한 믿음, 근본주의적 성경무오설과 문자적 성경해석 등의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탈냉전의 기류가 일상화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냉전적 사유가 유효하다. 사회전반에서는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급격히 달라져가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의 숭미적 에토스는 변함없다. 교회 안의 숭미-반공주의는 신앙심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지금 여기,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대규모의 반공친미 집회, 그때마다 태워지는 인공기와 나부끼는 성조기, 한국인 앞에서 영어로 설교하는 한국인 목사, 아멘으로 열렬히 호응하는 신자들....이러한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몇 차례 반복되고 그치는 해프닝이 아니다.
10.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 영역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원의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문화적 다원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시민사회 담론의 활성화와 시민사회 운동의 확산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사회문화적 다원주의의 확산은 권위주의 시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의 약화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시절에 억압되었던 사회문화적 소수집단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민주화, 다원화되어 가고 있지만 한국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는 권위주의 시대의 에토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개신교의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개신교 위기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내적으로는 교회성장의 감소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교회가 시민사회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개신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은 안티기독교 운동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표출되었다. 2000년대 초반 개신교인에 의한 단군상 훼손 사건이 발생하자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개신교를 비방하는 글이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에서는 여러 개의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개설되고 그 사이트들에서는 단군상 훼손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비난하는 글들이 수없이 올라왔다. 개신교는 타종교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친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비난 내용이었다. 요컨대 개신교 배타주의가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안티기독교 운동은 점점 확산되다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통해 그 실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사건의 핵심은 탈레반에 의한 한국인 피랍이었지만 당시 인터넷에서는 한국 개신교인들의 무분별한 해외선교활동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던 것이다.
얼마 전 지하철공사가 차량 안에서 승객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구걸’이나 ‘상행위’와 동일한 차원의 규제 대상으로 지정한 것도 개신교의 선교 행위가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공공장소에서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개신교의 선교 활동은 이미 선교자유의 한계를 넘어 시민의 사생활과 권리를 침해하는 오만한 행위로 비쳐지고 있다. 이는 개신교 배타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그것이 처한 위기를 보여준다.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더불어 지방자치 단체들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통문화를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통종교나 민간신앙과 관련된 몇몇 요소들이 전통문화 복원의 차원에서 활용되거나 개축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계가 이러한 사업들이 특정 종교를 지원하거나 미신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사업들에 대한 국고지원 금지를 요구하면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전통문화에 대한 개신교의 편협한 배타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이 지속되면서 냉전주의적 태도가 약화되자 개신교 보수 진영은 배타주의적 냉전 이데올로기를 다시 강화하고 있다. 한기총, 기독교뉴라이트연합, 기독당과 같은 개신교 보수진영의 단체들은 시국집회와 같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반북반김, 좌경세력 척결, 미군철수 반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냉전체제하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종교권력의 몸짓으로 비쳐질 뿐이다.
민주화 이후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개신교 근본주의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소수자의 인권 보호 차원이 아니라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성차별금지법 제정 문제에 있어서도 편협한 도덕주의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동남아 지역에서 쓰나미나 지진 등의 거대한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이를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에 내재한 배타주의가 어느 만큼 위험한 수위에 와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1. 이처럼 무수한 타자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배제하는 개신교 배타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개신교 근본주의는 최근 자신들이 직면한 위기상황을 정치세력화와 종교권력화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지만 이는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또한 포용적 제스처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위기는 세력화가 아니라 위기를 초래한 배타주의 자체에 대한 심층적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그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고 나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독선적 자의식을 성찰대상으로 삼는다면 배타주의적인 태도의 극복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는 기독교 배타주의
유승무 교수 (중앙승가대학교, 사회학)
1. 머리말
-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종교편향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가 교회내외를 막론하고 타종교에 대해 편향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어제 오늘일 아니다. 오히려 관행화된(혹은 일상화된) 태도가 친기독교 정부인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좀 더 공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란 판단이 더 정확하다는 판단이다. 해서, 이 글에서 우리는 최근의 종교편향사례를 기독교 배타주의의 현상 일반의 범주 내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현상적 차원에 머문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그러한 현상의 배후(혹은 심층)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종교편향사례는 그야말로 잎사귀(혹은 이른바 깃털)에 불과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 고유의 독특한 근본주의가 기독교 권력(경제권력 및 정치권력)을 매개로 타종교에 대한 일방주의적인 배타적 태도로 현상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 그 사회적 결과는, 다종교사회인 한국사회에서는 당연히 종교간 갈등과 종교로 인한 사회갈등의 심화로 귀결될 것이다. 비록 최근 불교계의 대정부시위가 기독교와 직접적인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정치적 태도와 한국기독교 고유의 배타주의적 태도와 무관한 현상은 결코 아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사회학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기독교 배타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나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종교계(기독교계나 불교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 글은 기본적으로 기독교나 불교의 교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종교사회학적 인식관심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와 사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배타주의현상 및 종교갈등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기독교 배타주의의 根幹
2.1 뿌리: 역사적(세속적) 근본주의
- 일반적으로 기독교 근본주의는 세속주의에 대한 저항하면서 가능한 한 신의 소명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동아시아문화 고유의 현세지향주의적 태도와 결합함으로써, 현세주의적 특성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띠고 있다. 혹자는 이를 초월적 근본주의와 대비하여 ‘역사적 근본주의(최우영, 2006)’라 부르기도 한다.
- 때문에 한국기독교 근본주의는 국가권력이나 물질주의(과학주의나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한국기독교 근본주의는 자본이나 국가권력, 심지어 제국(미국)과 매우 친화적이다. 그 대신(혹은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기독교 근본주의는 다른 종교나 이단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인(혹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
- 요컨대 한국기독교 근본주의야말로 기독교 배타주의(혹은 최근 종교편향사례)의 뿌리라 할 수 있다.
2.2 줄기: 물질적 축적과 종교권력
- 이러한 뿌리에 기반하고 있는 한국기독교는 배타의 실질적인 힘(power) 즉 경제 권력이라 할 수 있는 자본축적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추구할 수 있었다. 때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과업을 달성하는 것인 양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그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일부 보수적인 교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물량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세력은 친기독교적 보수 정부 하에서는 정치권에 접근하거나 참여하기도 하였다.
- 이렇게 축적된 물질적 기반과 정치적 기반이야말로, 기독교 배타주의의 ‘뿌리’ 즉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와 기독교 배타주의의 ‘잎’ 즉 최근 종교편향사례를 연결하는 ‘줄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기독교 배타주의는 물량적 축적과 정치적 권력이란 실질적인 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호조건이면 왕성해지는 것은 단연한 이치이다. 이렇게 볼 때, 최근의 종교편향사례는 기독교 배타주의가 친기독교정부인 이명박 정부라는 호조건 속에서 활성화된 것이 다름 아니다.
3. 기독교 배타주의의 타자로서 한국불교의 응전
3.1 사회구조적 원인: 다종교사회, 기독교의 급성장, 종교간 경쟁 격화
- 주지하듯이 우리사회는 다종교사회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적․ 신앙적 노선에 따른 균열, 즉 종교간 경쟁이나 갈등의 잠복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 이러한 다종교 상황에서, 해방이후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는 기독교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의 지형이 크게 확장된 반면 불교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전통종교들은 상대적 저발전을 경험하였다. 게다가 개교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들 사이에는 시장경쟁이 점점 더 격화될 수밖에 없고, 이는 기독교시장의 과포화상태를 연출한다. 국내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 제국주의가 고개를 쳐들듯, 기독교시장의 과포화상태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공세로 이어진다.
- 이렇게 볼 때 다종교사회인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종교지형의 급팽창과 그 모멘텀이야말로 최근 우리사회의 종교문제의 원인(遠因)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우리사회의 종교지형변화가 최근 종교문제의 사회구조적 배경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하나의 원인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는 최근 우리사회의 종교문제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점 즉 근인(近因)이 따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근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최근 일련의 종교편향사례가 그것이다.
3.2 촉발 요인: 종교편향사례 및 불교공격사례
- 종교사회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가장 주목할만한 주제는 바로 기독교와 타 종교의 관계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100 일 동안 수많은 종교편향사례들이 발생했다.
- 문제는 최근의 종교편향사례 중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공공기관이 친기독교적 행위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에 의한 불교공격행위까지를 빈발하고 있다. 특히 붓다의 부정, 사부대중의 대표자에 대한 모독, 사찰붕괴 기도 및 훼불 시도 등은 불교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구체적인 불이익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불교계의 분노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하다.
- 이렇게 볼 때, 최근 종교편향사례는 2008년 8월 28일 한국불교가 종단이나 종파를 초월하여 시청 앞에 모여 반정부구호를 외친 범불교도대회의 직접적인 도화선, 즉 촉발요인이었다.
3.3 불교계의 응전: 범불교도대회
- 주지하듯이 범불교도대회라는 집합행위는 명백히 반정부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실제로 범불교도대회는, 내용적으로는 기독교 배타주의(혹은 종교편향사례)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상으로는 대정부투쟁으로 현상되었다. 법불교도대회의 4대 요구사항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이 종교간 갈등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불교계가 초유의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향후 종교간 갈등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최근 인터넷 댓글을 보면, 한국사회도 더 이상 종교갈등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4. 소결: 기독교 배타주의와 종교간 갈등
4.1 장로 대통령과 종교갈등: 불교계의 사례를 중심으로
- 제 2 장에서 살펴본 기독교 배타주의의 근간은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사회적 조건이 지속되는 한, 종교갈등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문제는 촉발요인이다.
- 실제로 한국불교근대사를 보면, 불교계의 격변은 기묘하게도 모두 장로대통령의 국정운영시기와 일치한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정화운동이 발생하였고,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종단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명박 정부 등장 100일 만에 불교역사상 초유의 대정부 시위가 발발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장로 대통령의 통치기간동안 불교계의 불자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어 폭발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기독교적 정부 하에서 실제로 종교갈등을 촉발시킬 수 있는 사회적 사건이 발생함을 실증하고 있다.
-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친기독교정부야말로 기독교 배타주의가 왕성하게 현상할 수 있는 호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만(제 2 장에서 서술햇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종교간 갈등을 촉발할 가능성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장로 대통령일수록 종교간 갈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 대통령이 통치하는 친기독교 정부인 이명박 정부는 종교간 갈등의 가능성을 방치하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 자신이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한 사례도 있다. 때문에 불교계의 응전은 자연발생적 현상이며, 종교갈등의 가능성이 현실화한 것이다.
4.2 기독교 배타주의와 종교갈등의 잠재성
- 제 2 장에서 우리가 기독교 배타주의의 뿌리로 지목한 기독교 근본주의는, 이단에 대한 배타적 태도만이 아니라 이상사회 즉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헌신적인 태도를 길러주는 영양제이기도 하다. 비록 객관적으로 볼 때, 이상사회를 향한 헌신적 태도가 아무리 비현실적일지라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결코 그것을 실현불가능한 일이라고 포기하지 않는다.
-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성시화운동은 그 전형적 사례이다. 한국사회의 전체 인구 중에서 개신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20%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성시화운동은 한편으로는 비현실적 운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종교와 갈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높여 준다.
- 실제로 최근 불교계는 각 지자체에서 전개하고 있는 성시화운동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갖고 있으며, 공직자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 물론 성시화운동이 하나의 전형적 사례일 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히려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배타주의는 최소한 한국교회 내부에서는 이미 일상화되고 관습화된 태도이다. 때문에 다종교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종교간 갈등은 상존하고 있는 셈이다.
4.3 사회갈등의 종교적 변수(?)
-주지하듯이 한국근대사는 이념갈등, 지역갈등, 그리고 다소간의 계층 위화감 등으로 인해 심각한 사회갈등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민족분단과 같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도 하였고 정치발전의 지체와 같은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국사회가 다종교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한국사회는 종교갈등으로 몸살을 앓지는 않았다.
-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최근의 기독교 배타주의와 그에 대한 반대논리는 단순히 종교간 갈등을 넘어 종교가 사회분열 및 갈등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할 것 같은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대립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현실공간으로 옮겨 붙을 수도 있다. 한국사회가 다종교사회인 한 한국인의 가족 사이, 친구사이, 직장 동료 사이에도 종교적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배타주의와 그에 대한 극한적 반대논리와 같은 종교갈등은 자칫 종교로 인한 사회갈등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5. what to be done?
5.1 국가 및 정부의 역할
- 앞에서 논증해 왔듯이 친기독교정부일수록 기독교 배타주의는 더욱 왕성하게 나타나고 그럴수록 다종교적 상황 속에서는 종교갈등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종교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나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 무엇보다도 국가는 사회구조적 요인과 촉발요인의 연결고리를 차단해야 한다. 물론 사회구조적 요인을 하루아침에 해결하는 것이 무리라면,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촉발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대안이 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근의 종교편향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가 종교평향을 금지하는 대통령의 지시, 시행령 혹은 법제화 등을 시행하는 것이다.
- 물론 더 근원적으로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 혹은 정치와 종교의 실질적 분리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실제로 인류역사가 실증하듯이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정경유착 이상으로 큰 위험성을 동반할 수 있다. 그것은 종교간 형평성과 공정성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독점자가 정치권력마저도 독점하는 순간, 그 권력은 반드시 절대화되고, 그 절대화된 권력은 엄청난 비극을 낳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위임하고 가이사의 일은 가이사에게 맡겨야 하는 이유다.
5.2 종교계의 역할
- 종교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념의 노선을 따라 갈라진 균열을 일상적으로 봉합해 나가야 한다. 앞에서 제시한 해결책이 촉발요인을 해소하는 일시적 해결책이라면 사회구조적 균열을 봉합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통합성을 유지함으로써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장기적인 해결책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종교인 자신들이 종교간 대화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일상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물론 대통령이나 사회지도자들도 사회통합의 리더쉽을 발휘하여 종교갈등이나 종교로 인한 사회갈등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 나가야 하겠지만, 종교인들 스스로가 소통의 기회를 더욱 활발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6.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배타주의와 그로인한 종교 간 갈등을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해 보았다.
1) "찬미가," <신학월보> 1903년 12월호.
2) 金昶濟, “敎會의 反省을 求함-靑年의 志氣가 果如何?” <청년> 192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