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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림의 소리 스크랩 논산기행3 고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논산 천호산 개태사(1/2)
현림 추천 0 조회 29 18.07.29 11: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논산기행3 고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논산 천호산 개태사(1/2)

 

개태사는 고려의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멸하고 전승기념으로 세운 사찰로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자 했던 상징적인 장소로서 의미가 있으며,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개태사 석조삼존불 입상으로 잘 알려진 사찰이다.

 

개태사는 산속이 아니라 논산 시내 도로변에 있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절이다.

개태사의 창건 내력을 보면, 개태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天護山) 기슭에

 94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936(태조 19) 황산군(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왕건이 개태사의 낙성식을 하면서 밝힌 친제원문(親題願文: 발원문)에 의하면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음조에 부응하기 위해

관청에 명하여 연궁(蓮宮, 사찰)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산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사(開泰寺)라 하였다.

라고 하여 개태사를 창건한 동기를 밝히고 있다.

 

개태사 경내는 <어진전(御眞殿)>이 있는 데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나라에 변란이 발생할 때는 제사를 주관하기도 하고,

또한 국가 대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공민왕의 경우 왜구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하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고려의 태조 왕건이 세운 개태사는

고려 말기까지 거찰의 규모를 유지하며 지역의 거점 사찰로서 기능하였지만,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방화로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폐사되었다.

 

@폐사되었던 개태사가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일제 치하인 1930년대

이 마을에 살던 선비 유치두의 부인 김광영 여사가 받은 계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48세가 되던 1930년 정월, 꿈에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아 수 백 연간 매몰되었던 석불의 몸체를 발굴해낸다.

김광영 여사는 꿈에 계시받은 대로 석불의 몸체를 찾아 복원하려 했지만,

 또다시 "안된다"는 계시를 받게 되어 그 후 계룡산에 들어가 천일기도와 치성을 드린 뒤,

천호산의 벽력석으로 석불의 머리를 제작하여 발굴해낸 몸체와 함께 복원하였다.

김광영 씨는 미륵삼존불의 보호각을 짓는 한편,

계룡산에서 가져온 돌로 나반존자 상을 조성하여 독성각(삼일지상정천궁)에 모셨다.

 

1938년 조선독립을 기원한다는 밀고로 왜경에 체포된 김광영 씨는

재판정에서 "을유년 77(1945815) 천황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된다"라고 해서

재판관으로부터 정신이상자로 몰려 석방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해방되던 19458월 김광영 씨는 개태사를 삼천일지개태도광사(三天一地開泰道光寺)로 개명하였고

그 영향으로 개태사를 도광사로 표기한 지도들도 있다.

1946년 음력 33일 김광영 씨는 전국 팔도를 상징하는 여덟 칸 창운각(創運閣)을 지어

남한에서는 최초로 단군 영정을 모셨다.

1950년 초에는 뫼 자 모양의 우주당(宇宙堂) 건물을

음력 55일까지 급히 짓게 하여 관운장을 봉안하였는데

이는 다가올 환란(6·25동란)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개타사는 한때 대한불교 법상종의 사찰이 되었으나 지금은 조계사 소속으로 되어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 개태사지 석불입상을 비롯하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인 개태사 오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인 개태사지 석조,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 철확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시대의 독특한 조각 양식과 분위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개태사의 종루다, 개태사의 종루는 일주문과 천왕문을 겸하고 있다.

일층 벽화는 사천왕 탱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방수호신 광목천왕인데 지물은 탑과 창인데 창은 보이지 않는다.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오층석탑>

개태사 오층석탑은 구 개태사지에 있던 것을 1946년 승려 김광영(金光榮)이 현재의 장소로 옮겨 놓았다.

 1985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태사 오층석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치하기 위해 건립된 석조물로 금당과 더불어 경내의 중앙에 위치하였다.

 절 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탑은 옛터의 제일 북쪽 건물지 앞에 서 있었는데,

 절을 새로 지을 때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옮길 당시 아랫부분이 일부 없어져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1층의 탑신(塔身) 이하와 5층의 지붕돌(옥개석(屋蓋石)) 이상은 없어져

최근에 1층의 탑신과 기단부(基壇部) 및 보주(寶珠) 등을 새롭게 만들어 복원한 것이며

높직한 바닥 돌 위로 기단(基壇)이 없어진 채, 5층의 탑신(塔身)만이 차례로 쌓여 있다.

 

탑신(몸돌)과 옥개석(지붕돌)은 한 개의 돌로 다듬어져 있고 탑신부의 각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4단의 층급받침에 약간 치켜진 처마를 지녔고, 네 귀의 반전(反轉)이 아름답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 장식이 놓여 있다.

지붕의 전각부는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있다. 몸체는 1매의 석재로 제작되었고

모퉁이에는 우주가 양각되어 있다. 몸체에서의 조각은 살필 수 없다.

초층에서 5층에 오르기까지 지붕돌과 몸체는 완만한 체감률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백제 정림사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낙수면 아래에는 2~4단의 옥석 받침이 각형으로 치석 되어있다.

옥석 받침은 2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며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보주가 올려 있다. 석탑의 현재 높이는 4.69m이다.


태조 왕건의 영전을 모신 어진전








극락대보전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주포식 팔작지붕으로 법당 안에는 보물 제219호인 석조 여래 삼존입상이 있다.

본존상의 높이는 415, 우협시 보살상 높이는 346, 좌협시 보살상 높이는 349이다.

개태사는 936(태조 19) 태조가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므로

이 삼존불상은 개태사 창건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적 편액을 보면 용회대보전이었으나

법당 안에 봉안된 주불이 아미타불이므로 극락대보전으로 개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석조 여래 삼존입상의 보수 전의 모습은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14권에 있는 사진으로 볼 수 있는데,

 우협시 보살상만이 완전한 상태이고 본존상과 좌협시 보살상은 다리 부분만 남기고 절단되어 있었다.

 

1934년 중창 때 없어진 부분이 발견되어 복원되었는데

 좌협시상의 머리 부분만은 당시에 발견되지 않아 새로 만들어 얹혔다.

그 뒤 1988년 법당의 해체·복원 때 좌협시의 머리가 발견되어

새로이 얹혀지면서 개태사 삼존불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삼존불 중 좌협시상의 표현이 가장 뛰어나고 개성이 있으므로

 좌협시상만 개태사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불상이고,

본존상과 우협시상은 후대에 좌협시상을 모본으로 하여 복원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존불>

@중앙의 본존불(本尊佛)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여래입상으로 납작한 세모형의 얼굴이 우협시상과 비슷하다.

본존불상은 사각형 연꽃대좌 위에 서 있는 거불의 입상이다.

높이 415의 거대한 아미타입상으로 민머리(소발素髮)에 얼굴이 둥글지만,

 평면적인데 귀가 몹시 커서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여래상인데도

특이하게 귀에 보발(寶髮)이 표현되어 보살상을 모방했다는 느낌을 준다.

보발은 원래 보살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좌우 협시보살상과는 흘러내리는 방향이 반대로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관계를 표현하는 삼도(三道)가 굵게 새겨져 있다.

어깨는 좁고 가슴은 평면인데, 오른손을 가슴에 들었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별석으로 만들어진 방대형대좌(方臺形臺座:사각형대좌) 위에 입상으로 서 있는데,

발톱까지도 선명하게 새겼으며, 발등 위로 두꺼운 천의 자락 끝이 돌대(突帶)처럼 가로로 얹혀 있다.

@4각형의 대좌(臺座)의 하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대좌의 중심은 복련(伏蓮)이 새겨진 것이다.

이 연꽃무늬는 빗긴 것으로 이런 모양의 연꽃무늬 4각형 대좌는

 역시 9세기부터 나타난다. 하지만 이 연꽃은 꽃 테두리를 굵은 띠 모양으로 만든 특이한 것으로,

신라 후기 형식과는 다른 것이다.

10세기경의 부도탑에 이런 무늬가 나타나지만,

충청남도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머리 관석연화문(冠石蓮花紋) 등과

매우 비슷한 것이어서 동일한 형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본존상은 좌협시상에 비해 조각 솜씨가 월등히 떨어진다.

굴곡이 없는 기둥 같은 불신에 옷 주름도 몇 줄의 납작한 주름으로 간략히 표현했으며

두 손도 유난히 크고 뭉툭하다.

이와 같은 도상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는 개태사 창건 당시의 본존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이 본존상이 후대에 좌협시상을 모본으로 하여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잘못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양식 파악은 개태사가 심하게 파손된 적이 있었고

이후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므로 어느 때인가 좌협시상을 모본으로 하여

 본존상과 우협시상이 복원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지나치게 둔중하나 제작 시기가 거의 확실하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의 의지가 담겨있으며,

고려 전기 지방 석불 상으로는 수작에 속하여 이 불상의 가치는 높게 평가된다.


@본존불 양발 사이에 유독 하나의 둥근 돌이 놓여 있는 데 이 돌을 <문댐돌>이라 한다.

이 돌을 돌리거나 들었을 때 움직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진다.


<좌협시불>

좌협시보살상은 오랫동안 땅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조각이 덜 마멸되었으며

머리 부분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인데 몸체보다 머리는 다소 큰 편이다.

높이는 약 350이고, 어깨가 벌어진 상체에 비교하여 하반신이 짧은 편이며, 양다리를 볼륨 있게 조각하였다.

목의 삼도는 굵게 표현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허리 부분에서 네 손가락을 구부린 여원인(與願印)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린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넓은 띠 모양의 얇은 옷 형태를 표현한 천의가 다리 양옆의 공간을 메우고 있고

 팔찌와 천의(天衣) 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한 편으로, 어깨와 가슴이 좀 더 부드럽고,

팔찌와 천의(天衣) 자락에 장식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손목이라든가 구부리고 있는 손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며 손톱이나 손금 등

세부적인 묘사가 되어있는 등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하고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구성이다

@좌협시 불상은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양감과 천의나 팔찌 등에서 보이는

장식적인 표현이 어우러져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는 상이다.

머리에는 높은 보계(寶髻)가 있는데 머리카락의 표현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이마 위에만 동글동글하게 앞머리가 표현되어 있다. 보관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다.

 

온화한 표정에 코와 입을 작게 조각해 얼굴 아랫부분이 풍만해 보인다.

귀는 양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며 굵은 띠 모양의 머리카락이 귀 중간 부분을 지나고 있다.

불신은 다소 육중하게 보일 정도로 힘 있는 양감이 표현되었으며,

천의가 가슴 위에 대각선으로 걸쳐 있고 허리 아래에만 군의(裙衣)를 입고,

 꽃 모양이 장식된 화려한 팔찌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이래의 보편적인 보살상 형식과는 달라서

허리에서 늘어지고 있는 군의 자락이 마치 앞치마처럼 표현되었다든가

옷에 꽃무늬[花紋]가 장식되어 있는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도식화나 장식화의 경향이 보인다.

손은 육중한 크기에 비교해 부드럽고 사실적인 표현이 보이지만 발은 각이 지고 투박하다.

<우협시불>

우협시불은 높이가 321, 머리 형태나 옷의 표현 양식이 좌협시 보살상과 매우 흡사하지만,

얼굴과 몸체 등 전체적인 표현 양식에 있어 좌협시 보살상과 차이가 있다.

우협시 보살상은 머리 부분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래서인지 귀로 돌아 내려간 머리칼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깨까지의 신고(身高)263인데 무릎 부분의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복원해놓았으므로

 머리와 함께 세 부분으로 절단되었을 것으로 본다. 어깨만 약간 움츠린 듯하지만

 우견편단(右肩偏袒)한 상체는 가슴이나 어깨의 굴곡을 제법 표현해서 본존불상과는 조금 다른 수법이다.



머리에는 둥근 보계가 있고, 이마 위에 늘어진 앞머리는 둥글둥글하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역사다리꼴이고 목에는 두꺼운 삼도(三道)가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려 주먹 쥔 상태에서 집게손가락만 편 시무외인이고,

 왼손은 약지와 새끼손가락만 편 여원인으로, 좌협시 보살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발은 몸보다 매우 크고 두껍게 표현되었다.

양다리를 감고 있는 아랫도리의 옷 주름은 얕은 음각선이고

그 위에 늘어지고 있는 천의는 낮은 부조로 나타내고 있어서,

군의와 천의가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옷의 부피감이 표현되지 않아

 좌협시 보살상에서 돋보이던 아름다운 장식적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통통한 몸집, 큼직한 두 손과 부피감 있는 팔,

다소 두꺼워진 천의와 선으로 새긴 옷 주름 등은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고려 초기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협시상은 좌협시상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한 짝을 이루는 보살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1988년 좌협시상의 머리가 발견된 이후 두 상을 비교해보면 우협시상의 조각 솜씨가 현격히 떨어진다.

불신은 굴곡이 없이 기둥처럼 표현되어 탄력 있는 양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도 부드러운 양감이 없으며 손도 뭉툭하게 형태만 표현하고 있다.

 

옷의 표현에서도 기본적인 형식은 좌협시상과 같으나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고,

곳곳에서 편의적인 표현이 보인다든가 치맛자락에 있는 꽃무늬장식이 생략되는 등

 좌협시상을 모방한 상임을 알 수 있다. 상 전체의 조형성에 있어 당당한 느낌이 별로 없다.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지장탱.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시립하고 있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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