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7:23-40 - 하나님이 함께 하신 길(39강)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시편 37:23-40)
<설교>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주 공간 어딘가에 절대자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참여하셔서 그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삶에 참여하셔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고 계신다는 것을 현실의 세계에서 감지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악자가 번성하고, 믿는 자가 실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로 인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도우심과 인도하심에 대해서도 마음이 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현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그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면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행악자가 가는 길에 함께 서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행악자가 가는 길에 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을 구한다면, 그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합니다. 적어도 행악자보다는 더 앞서고 더 잘되는 결과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증거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결정적인 사실은 신자가 가는 길은 행악자의 길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그 길이 다른데 어떻게 행악자의 길에서 행악자가 누리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신자의 신자다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37-39절을 보면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의인의 결국과 악인의 결국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길이 다르기에 마지막 역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과 악인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으로 구별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걸어가며 그 마지막이 다르다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길에 있는 악인이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자신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신자가 어떤 길을 가는 존재인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나약함입니다.
신자는 악인이 가는 길과 신자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는 길에서 누리는 번영과 풍요로 인해서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이 가는 길은 여호와가 함께 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지막은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인은 구원이 되시는 여호와가 함께 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여호와가 소망이 되심으로써 승리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불의한 존재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놀라운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복은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마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나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일에 대한 도우심이라는 것은 다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여길만한 일들이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을 마치 정치인들이 하는 공약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신32:10-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고 새끼들 위에서 맴도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시고 보호하시고 호위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실감 있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힘이 되지 않는 이유는 말한 대로 여호와의 도우심과 지키심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시고 함께 하시며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알다시피 광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 길의 마지막인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니면 이해는 하겠는데 그래도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까? 그것은 여전히 이방인이 가는 길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23,2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의 걸움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걸음을 우리가 정하시고, 우리가 정한 걸음을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행악자와 같은 길을 갈 것이고, 같은 결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하는 걸음은 항상 자기 욕망에 부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한 걸음을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만으로 신자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걸음이라고 해서 형통함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 길에도 넘어짐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주 엎드러지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붙드셔서 일으키시며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희미하나마 천국에 소망을 두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토록 입술로 예수님을 말은 할지언정 사도의 기쁨이 무엇인가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어떤 경우에도 신자의 자손은 남에게 빌어먹는 거지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겨우 거지꼴을 면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이 말은 비록 신자에게 고난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을 당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그 어떤 고난으로 인해서 마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실상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거나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내 영이 하나님에 대해 산 영이 되게 하기 위해 나를 가르치시고 낮추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굳게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34-36절에서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고 말하는 것처럼, 악인이 비록 푸른 나무의 무성함처럼 무성하다고 해도 결국은 베어져 사라질 운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운명의 길에 있는 악인이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현재를 한탄하고 원망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자의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를 그 마음에서 버렸음을 뜻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정해 놓으신 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기업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길에서 하늘의 기업을 향한 걸음을 걸어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는 부족합니까?
신자의 존귀함은 세상의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붙드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길로 인도받는 존재라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의 존귀함을 세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신자만큼은 신자가 왜 존귀한 자인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존귀함을 헛된 세상의 것으로 인해 잃어버리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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