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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공부방 초청강좌 13
대종경 읽기
원기 101년 4월 13일
강사 : 정도상 작가
초벌 : 유정인
완성 : 윤성권
안녕하세요. 정도상입니다. 반갑습니다. 4월은 원불교에도 매우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4월 28일이 대각개교절이 있지요. 혹시 공산 백낙천 선생 아시나요? 1970년도에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를 처음 만드신 분이고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창시자에 가까운 분이시기도 하죠. 창작과 비평이 올해 50주년을 맞이했어요. 50년 동안 창비를 발간하면서 서울대 교수에서 해직 당하기도 하고 감옥살이도 하셨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시민문학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종경은 우리말로 쓰여진 최초의 고급 경전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천도교에 용담유사나 동경대전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말이 아닙니다. 용담유사는 우리말이 좀 섞여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말이 아니고 동경대전이 역시 우리말이라기 보단 한문에 가깝습니다. 대종경이 그래서 우리말로 쓰여진 최초의 고급 경전이라는 점에서 문학적으로 많이 조명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을 아쉬워 하셨습니다.
저는 원불교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 대종경을 읽을 때는 도무지 신심이 나지 않았어요. 왜 이 언어에는 거룩함이 빠져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룩함도 빠져 있고 영성도 빠져있는 것 같아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법구경 같은 걸 보면 왠지 거룩한 느낌이 드는데 대종경은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대종경을 읽으면서 가장 큰 문제는 맥락을 이해 못하는 것이었어요. 대종사님이 1916년도에 대각하셨고, 대종경은 1940년대에 편찬되죠. 그 당시 과연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만일 하고 싶은 걸 다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작에 원불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행간 안에 맥락을 남겨 놓고 썼기에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깨달은 성인은 학력이 높지가 않았어요. 석가모니가 하버드 박사 출신인가요? 아니죠. 예수가 이스라엘 예루살렘 대학의 박사출신일까요? 역시 아닙니다. 마호메트도 마찬가지죠. 공자, 맹자는 사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책을 가지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노자 장자도 그렇지만 세상을 깨달은 성인들은 학력이 높지가 않아요. 우리가 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아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읽어서 깨달으려고 했고, 직접 우주 만물과 몸으로 격투하지 않으니까 잘 느끼지 못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거예요.
그런데 위대한 부처들은 전부 깨달은 사람들이예요. 우주의 변화 천지 조화를 격투 속에서 깨달으신 분들이죠. 예수만 해도 약 40일을 광야에서 거의 굶으면서 깨닫습니다. 마호메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난한 사람이었어요. 마호메트가 가게 종업원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 그때 사장(여자)이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당시 사장은 적당한 부호에 이미 남편이 둘 있었어요. 마호메트에게 가게 운영을 맡겼는데 운영을 너무 잘해서 사장이 청혼을 하게되죠.(이때 마호메트 부인은 40대였고, 마호메트는 20대였어요) 많은 나이차로 놀라서 마호메트가 도망을 다니는데 나중에 부인의 남동생이 찾아와서 너 혹시 돈 땜에 도망다니냐(당시엔 결혼하려면 돈이 있어야 됐었나봐요). 너 돈 필요없고 몸만 오면 된다라고 해서 결혼을 하게 되죠.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해서 동네 창피를 당하고 살다가 40대쯤 부인의 허가를 받아서 산에 가서 산상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때 마침내 대천사 미카엘로부터 소리를 듣죠. 대각은 전부 소리를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수훈의 대각은 여몽여각(꿈도 아니고 깨어난 것도 아닌 상태)중에 상제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소태산도 마찬가지죠. 어느날 문득 대각을 하게 되고 여몽여각의 상태에서 만유의 체성이 하나라고 하는 그것을 몸 안으로 깨닫습니다.
금강경은 수보리하고 석가모니하고 대화이지요. 반야심경은 사리자하고 석가모니와 대화입니다. 능엄경은 아남타하고 석가모니의 대화에요. 성경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게 신약이고 예수가 오기 전 역사를 기록한 게 구약이잖아요. 자 대종경을 빼고 여시야문이에요. 내가 이렇게 들은 것을 기억해서 쓰는 거에요. 수보리와 석가모니가 대화한 것을 여러 사람한테 듣고 기억해보면 일맥상통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죠. 그렇게 금강경이 성립이 된 거예요. 이야기인 거예요 대종경 역시 이야기의 경전이다. 세상의 모든 경전은 이야기의 경전이에요. 금강경도 반야심경도 능엄경도 전부 이야기입니다.
마음공부를 깊게 하기 위한 불경을 선택한다면 달마의 어록과 달마의 무심론으로부터 시작되는 달마의 경전들이 있어요. 짤막한 것들인데 능엄경과 달마의 경전들을 공부하면 마음공부를 깊게 할 수 있어요. 마음의 경계에서 바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표면적인 마음공부 말고 저 심해의 깊은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거죠. 대종경은 그런 깨달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이 되었어요. 대종사님이 금강경을 읽고 불교 혁신론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원불교를 만들게 되는 건데 대종사님의 불교 혁신론과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누군가가 불교유신론을 썼어요. 만해 한용운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머리를 깎은 게 언제죠? 절에서 깎아요? 절을 나오면서 깎아요? 절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깎아요. 대종사님한테는 속세가 절이었어요. 그러니까 산중의 절이 진짜 절이 아니고 난 여기로부터 떠나서 속세로 출가하시는 거에요. 속세로 출가하시니까 그때 속세의 부처들을 향해 머리를 깎으신거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소태산 대종사에 대해서 이해가 어려워지는 거죠.
이렇게 거룩함이 빠진 대종경을 읽다가 마틴루터를 계기로 거룩함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마틴루터의 종교 개혁은 인쇄술의 발달로부터 시작합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핵심은 성경 읽기였어요. 성경에는 교황청도 없고 교황도 없어요. 면죄부도 없고 마녀도 없는 거에요. 로마 카톨릭이 교황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어떠한 구절도 없는 거예요. 마틴루터 시대는 종교개혁이란 곧 성경을 읽는 것 자체였어요. 성경을 읽음으로써 잘못 놓여진 세계를 이해하고 재배치 하겠다는 것이 마틴루터가 보여주고 있는 종교 개혁의 핵심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반대하죠. 성경을 보면 동성애 관련된 내용이 있어요.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얘기하죠. 집에 있는 종이 아픈데 낫게 해 주십시오. 한글로 쓰인 성경에는 종이라고 나와 있는 데, 히브리어 원전(原典)에는 남자친구로 되어 있어요. 영어로 바뀌면서 남자친구가 빠지고 종으로 바뀌었어요.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성경을 그대로 가져오다 보니 우리나라 성경에도 종으로 되어 있는 거죠.
색즉시공이라는 말이 있죠? 이게 뭐가 빠졌냐면 색즉시(자성)공이었답니다. 색즉시자성공이었는데 자성을 빼고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쓸 때 자성을 빼고 번역을 해버렸대요. 분필이 색이죠? 이게 왜 공해질 수가 있죠 어떻게? 물이 공해질 수가 있나요? 색이 즉시 공해진다면서요? 그게 아니고 이색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성이 이 색에 대한 집착을 놓아서 우리의 자성이 공해진다 – 라고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산스크리트어 원본이나 인도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자성이 빠져있음으로써 색이 곧 공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거예요. 색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이 빠짐으로써 공이 된다는 거죠. 금강경이 뭐죠? 이 세계에 얘기하는 거죠? 목숨에 집착하지 말고 사물에 집착하지 말고 공해야 된다. 공의 세계가 금강경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라틴어 원래 히브리어 원전에서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넘어오고 경전에서는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해요. 산스크리트어나 한자로 넘어올 때 한자를 해석해 내는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 금강경의 내용이 또 달라집니다.
대종사께서 금강경을 읽고 연원을 석가모니 부처에 둔다고 했어요. 이 연원에서 원불교가 탄생해요. 원이라는 게 테두리인데 금강경의 세계를 원의 테두리에 가두었을까요? 아님 확장시켰을까요? 원불교는 불교를 원에 가둔게 아니고 그것을 터버린거에요. 원이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로써의 원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당연히 원이라고 하는 것은 중심도 없고 변두리도 없는 테두리들이 전부 해체해 버린 금강경의 세계. 즉 불교의 세계가 해체된,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원불교라는 걸 만든 거예요. 원은 불교를 다른 방식으로 가둔게 아니고 원의 방식으로 열어버린 것이다. 공의 세계로 훨씬 확장시킨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원불교가 조계종이나 다른 불교보다 교세가 약하니까 약간 졸아드는 경향이 있어요.
마음공부란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굴까요? 마음공부 제대로 말하기 시작한 건 달마였어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앞 부처가 뒷 부처에 전하는 불립문자다 그랬어요. 문자로 설명되지 아니한 그 무엇이 마음이라고 무신론에서 얘기를 했거든요. 달마가 마음공부 얘기를 했어요. 달마의 마음공부를 우리나라에서 받은 사람이 원효에요.
달마는 무심론이고, 원효는 일심론이고, 소태산은 용심론이에요. 무심론의 첫 번째가 뭐예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그와 대화하겠다는 게 첫 번째 문장이고 가상의 인물이 달마에게 묻습니다. 유심? 무심? 간단해요 마음이 있냐? 아니 없다. 앞에 말하는 유심 물어볼 때의 유심과 달마가 대답할 때의 무심은 다릅니다.
안심법문 같은 데 보면 스님 내가 요새 너무 괴롭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달마가 얘기하기를 네 마음을 네 손바닥 위에 꺼내놓아 보아라. 그럼 내가 너의 마음을 잘 닦아서 돌려줄 것이다. 당연히 마음을 꺼내놓을 수가 없죠. 이때 마음은 다 다릅니다. 글자는 다 똑같은데 마음의 용일 수도 있고 체일 수도 있고 처음에 내 마음은 아픕니다 할 때의 마음은 용이고 달마가 끄집어 내라고 할 때의 마음은 체죠. 제자가 마음의 체를 끄집어낼 줄 모르니까 내가 너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그래서 안심법문이예요. 마음의 체를 알게 하여서 마음의 경계, 용을 다독여줬다는 거죠, 마음이라는 말을 주고받는데 체와 용이 왔다갔다 하는 거죠.
대종경도 읽어보면 마음의 체와 용이 번갈아서 왔다 갔다 합니다. 이것을 잘 몰라볼까봐 빚을 내어서도 성리공부를 하라고 말씀을 하신 거죠. 우리가 견성한다고 할 때 도대체 뭘 견성한다는 거예요? 본성을 보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는데 왜 본성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요렇게 둥글둥글 애매모호한 상태로 들여보내줬으니까 책을 통해서 볼 수 있잖아요? 그렇지만 문자로 보여지는 본성이라는 글자와 본성이란 무엇이다 라고 쓰인 글자와 상관없이 격투에서의 본 본성을 보지 못하면 문자로 아무리 깨달아도 소용없어요. 문자를 봤으면 격투해야 되는 거예요. 몸 공부 없는 마음공부는 다 허사예요. 내 마음으로 얼마든지 오바마와 대화할 수 있어요, 근데 내 몸은 여기 있잖아요. 허망한 얘기에요 그래서 몸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격투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문자를 아무리 읽어도 깨달아지지가 않아요.
이걸 깨달은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을 때입니다. 대종사님도 20대에 깨달으셨죠. 여기 혹시 20대 중에 30대가 무엇을 한다고 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몰라요. 그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미 그 나이에 온갖 격투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도 젊은 나이에 깨달아요. 석가모니도 그렇고 소태산도 그렇고 모든 깨닫은 자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학위로 깨닫은 것이 아니라 마음공부와 몸 공부가 한꺼번에 격투되어서 한순간에 깨닫게 되는 거예요.
서두가 길었지만 대종경 읽으면서 안에 있는 거룩함 같은 걸 느끼게 됐어요. 대종경의 세계가 일제 강점기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시대를 거쳐 나오면서 오랜 세월동안 변치 않는 문장으로 우리 앞에 아주 쉬운 문장으로 와 있습니다만 일제시대 때의 언어 사용법에 의해서 한자투가 중간에 꽤 많아요. 이것을 다시 쉽게 쓰기만 한다면 아주 좋은 세계를 청소년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원기 101년 5월 1일 행사를 할텐데, 그 행사에 주어진 과제가 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그게 청소년 교화라고 생각해요 청소년 교화 없이 원불교 미래 없습니다. 대종경을 청소년용으로 다시 만들어야 될 것이고 소태산이 그런 깨달음을 어떻게 얻었는지 소태산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 청소년 교화에 교단 전체의 운명을 걸지 아니하면 어려울 수 밖에 없어요. 원불교 나이는 100살밖에 안돼서 젊은데 교도들은 너무 늙어버렸어요, 이걸 심각하게 생각해야 돼요. 인구는 줄고 있어요. 현재 전국에 600개 교당이 있는데 10년 이내에 300개 정도로 줄어들 거예요. 사람이 없어서 유지를 할 수 없어요. 아무리 부흥을 시킬려고 해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익산에 북일교당, 남중교당 같은 거 막 모여 있어요. 180명 정도가 매주 법회를 보는데 원광대 대학로가 제일 가까운 곳이 북일교당이예요. 저는 교당으로써는 다른 교당과 합치고 그곳에 청소년센터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청소년들만을 위한 교당으로 해서 익산 청소년들을 자유롭게 와서 새로운 방식의 실험이 필요한 거죠. 청소년들이 법회시간 외에 와서 공부하는 곳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을 다해볼 수 있는 청소년 센터교당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600개 중에 300개가 줄어드니까 남는 재산과 건물을 활용해야해요.
다시 이제 대종경으로 가서 대종사님은 수은과 증산을 환생했다고 말씀을 하세요. 천도교, 동학은 깨닫고 난 다음에 뭐했어요? 현실을 변혁 시킬려고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혁명주의로 가게 되지요. 물론 전봉준의 투쟁에 대해서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말리는 것은 불가능했죠. 투쟁은 이미 시작돼 버린 거예요 현실변혁, 후천개벽을 후천이라는 현실을 개벽하기 위해 선택한 게 혁명이었던 거야. 동학이라고 하면 일본과 우리 관군들이 남해 끝까지 찾아가서 죽였어요. 왜 호남에 기독교가 많을까? 살아야 되니까. 동학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을 해버렸어요. 그 피폐된 환경 속에서 그래도 호남 민중들은 새로운 미륵을 기다리게 되는 거예요. 이 미륵으로 등장한 게 강증산이지. 천지공사하고 막 했어요. 그런데 강증산은 후천이라는 현실을 천지공사만 해버리는 거에요. 우주공사만 하다 끝났어요. 신비주의로 끝나버린 거에요. 수훈과 동학은 후천개벽이 현실변혁 투쟁으로 가버렸고 강증산은 현실로부터 달아나는 신비주의가 된 거예요. 소태산은 뭘 선택했어요? 소태산은 출세관으로 와버린 거에요. 현실로 와서 깨닫고 나서 한 게 방언공사에요. 저축조합을 만들었죠.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어요 과거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서 그 작은 마을에 30여 만명이 죽어버린 거예요. 이후 신부님이 부임해 왔는 데 절망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어요. 처음에 한 것이 작은 조합 하나를 만들었고, 이 조합의 이름으로 축구팀을 만들자. 이 조합의 축구팀이 레알 소시에다드에요. FC 바르셀로나도 유명한 협동조합 축구단이에요. 서울우유 협동조합 기업이에요. AP통신 이게 협동조합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그 무렵에 영광에서 저축조합을 만드시고 방언공사라는 걸 하게 되요. 종교가 현실 안에서 혁명이 되지 않고 현실을 떠나서 신비가 되지 않고, 현실 안에서 목숨 바쳐 무언가를 하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 그것이 소태산이 제자들에게 교육하는 방식이었죠.
3,1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제자들은 3,1운동에 합류하고자 했어요. 만약에 장터 나가서 만세 부르고 그러다가 영광 불갑사 아래에서 만세 부르고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그럼 다 잡혀가고 끝장났겠죠. 소태산은 이걸 알았던 거에요. 멋지게 만세 부르고 끝장이 날지, 이것을 꾹꾹 참고 기도를 할지, 이게 백지혈인의 기도입니다. 너희가 이 회상 이래, 이 삶 이래, 파도와 같은 경계, 목숨 걸고 견뎌내고 참고 판단하라는 마지막 요구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눈에 핏발이 서 죽기 살기로 기도하면 온몸에 핏발이 서는 거야. 격투한다고 했죠? 격투하게 되면 온몸에 핏발이 서게 돼있어요. 그래서 찍으니까 백지혈인이 나타나는 거에요.
대종사님은 독립운동 하기 싫어서 안하는 게 아닙니다. 수훈과 증산의 뒤가 어떻게 됐는지 그래서 뭘 만들어냈는지를 본거에요. 그래서 이렇게는 못가겠다 하시는 거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은거예요. 방언공사라는 게 요새 말로 간척공사잖아요 우공이산의 새로움을 만들어내자고 하는 증거를 보여준 게 방언공사하고 백지혈인이에요. 방언공사에서 우리가 육체적으로 노력하니까 됐지? 육체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 마음으로만 해 보자. 그래서 죽기살기 기도로 들어간 거예요. 이 이야기가 백지혈인 기적의 이야기죠.
대종경 읽으면서 가장 놀란 부분이 천도품입니다. 천도품 보고 정말 깜짝 놀랐는데 인간의 죽음에 관련된 의식과 환생에 관련해서 얘기한 책은 ‘티벳 사자의 서’로 1928년 옥스퍼드출판사에서 영어로 출간됐으니 대종사님이 읽었을 리가 만무하겠지요. 입교하고 대종경을 보니 천도품과 티벳 사자의 서 내용이 너무 똑같아서 놀랐어요. 누군가가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은 지공을 초월하는 힘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러면 우리 대종사님이 저 오래전 티벳 1200년 전 티벳에 티벳 사자의 서가 쓰여져서 밀봉되게 되는데 그 무렵에 가서 읽었는지 그랬을 수도 있으시리라고 봐요. 왜냐하면 우리가 대종사님이 한 말 중에 영겁다생 여러 번의 생애를 이야기 하잖아요. 다생이 어떻게 가능한건지에 대한 이야기를 고민해 봐야 되는 겁니다. 니체는 영원회귀사상을 갖고 있는데 영원회귀는 영겁다생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본성과 자아가 끝없이 회귀하는 거에요. 이것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 사상이고 다생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여러사람의 생애를 사는 게 아니고 한 사람이 여러생을 사는 것이 다생이예요. 끝없이 다생을 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거예요. 우리 전생 기억하지 못하죠. 다생한다면 전생이 무한히 있을 거 아니예요. 우리가 6식 안이비설신의 육식의 세계조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에요 이걸 넘어가면 7식의 세계가 있죠. 이건 무의식의 세계 안의비설신의(의식) + 무의식을 7식의 세계라 합니다. 그 다음 8식이 있죠. 무의식 다음 잠재의식인 거야. 프로이드가 꺼낸 게 이 잠재의식인 거죠. 우리는 현생을 어디다 보관하냐면 아래하식에 보관합니다. 아래하식을 다른 식으로 하면 저장식이라 불러요. 우리 현생애의 모든 인과를 아래하식에 저장하고 다음 생애로 건너갑니다. 그래서 다생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영원회귀라 하는 거죠 이것이 천도품이라 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티벳 사자의 서에도 반복되고 있어요. 대종경이 티벳 사자의 서보다 천년 뒤에 쓰여진 경인데 똑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하는 점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면 우리 원불교는 생과 죽음을 훨씬 더 초월한 다생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하고 있는 거예요. 다생이 끝나야 부처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윤회가 끝나야 되니까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지 부처가 되는 거니까. 그 이야기를 천도품에서 하고 계신 거예요. 티벳 사자의 서에도 보면 사자가 죽어서 장래를 치르는데 사자의 유가족이 재산을 가지고 싸우거나 제를 제대로 안 지내면 인간계에 있으면 축생계 같은 걸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천도재를 열심히 지내야지만 인과응보, 업이 녹아내릴 수가 있어요. 죽은 사람의 천도재를 열심히 지내는 것 이걸 통해서 다생을 끝낼 수가 있다고 본 거죠.
티벳 사자의 서에 자세히 기록돼 있는데 천도품에 그런 말들이 나오죠? 여러 번 계속 사는 게 우리의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는 죽으면 대한민국 서울에 태어날까요? 안 그래요 어쩌면 지구에 안 태어날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어린왕자가 태어났던 행성에 여우로 태어날 수도 있고 나무로 태어날 수도 있고 아주 엉뚱한 다른 행성에서 태어날 수도 있는 거예요. 다생한다고 할 때 꼭 지구에서만 환생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다양한 종류의 생물로 삶으로 얼마든지 우주 곳곳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거예요. 생애의 범위를 지구에 한정하지 말 것 이 얘기가 다 천도품에 있는 얘기에요. 인과응보는 소립자로부터 해서 우주 전체에까지 다 작동을 하는 거죠.
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사람이 죽어서 심판받고 다시 태어나는 그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엉뚱한 구절들이 나와요. 도대체 플라톤은 왜 국가론 뒤편에 환생 이야기를 자세히 써놨을까요? 생각해 보면 국가론을 보면 국가에 충성하고 잘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환생할 때 안 좋게 된다. 즉 그리스 시대에도 환생 사상이 있었다는 얘기죠. 스코틀랜드에 드루이드학파라는 기독교 집단이 있는데, 이 집단이 환생을 믿었어요. 기독교는 죽고 나서 딱 한 사람만 부활했죠. 예수만 부활하고 그 흔적이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기독교의 생애는 일생의 생애인 거야. 그래서 기독교 믿기가 쉬운 거예요. 아무리 연쇄살인범으로 살아도 죽기 직전에 예수 믿으면 천국가요. 아무리 부처님으로 살아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요. 너무 간단해 모든 인과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생에 전체를 업으로 쌓아온 건데 죽기 직전에 예수 믿어서 인과가 사라진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생애 일회성 주의가 사람들이 너무 편한 거에요. 열심히 살지만 죽기전에 믿으면 되지. 뭐 신부님한테 가서 고해성사 받으면 죄사해주는 데 뭐 그래서 마음껏 범죄를 저지르는 거죠. 마음껏 저지르는 거고 성직자는 마음껏 저지르게 부추기기도 해요. 그게 면죄부에요. 돈만 내면 다 그걸 주는 거야. 인과의 일들이 죽어서 심판받을 때 같은 것들이 티벳 사자의 서에 자세하게 쓰여 있고 뭐 그렇습니다.
(질문)
강의 처음부터 대종경이 거룩하지도 않고 영적이지도 않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부분을 언제부터 발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세 번째 읽으면서부터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름다운 글의 크기를 새롭게 느끼기 시작을 했어요. 쓰여진 글은 거룩하지 않지만 읽다 보면 정말로 거룩한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담겨져 있다. 이철수 화가의 그림은 대종경을 선과 화두로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대종경에 대한 각자 다른 시선들의 글이 많이 쏟아지는 것이 원불교의 발전을 위해 좋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근데 한번 진짜 마음 놓고 읽어보시면 세계가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다른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맥락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사은 얘기하잖아요? 특히 동포은이 인상적이었어요. 서구의 철학에서 세계는 나 더하기 너입니다. 나를 주체라고 하고 너를 타자라고 부르죠. 너는 나 이외의 모든 것을 너라고 불러요. 이것을 이분법이라 그래요. 세계는 나와 너로 딱 구분되어 있으니까 주체와 타자로 구분하죠. 그런데 대종사님은 나를 제외한 모든 너가 동포라는 거예요. 소름이 쫙 끼치는 거예요. 이 탁자도 나한텐 넌데 나의 동포도 교당도 나의 동포고 공기도 나의 동포고 이 전기불도 이 마이크도 이게 다 동포인 거예요. 세계는 나와 너로 구성돼 있는데 분리된 구성 서구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자아와 인간으로 분리합니다. 서구철학의 핵심은 분리예요. 서구는 자아를 키우라고 얘기하는 데 우리는 이 자아의 집착을 없애라는 거죠. 나 아니면 넌 데 이 세상 모든 것이 너인 거죠 이것을 동포라고 표현을 하신 거구나.
법률은 이란 탁자가 탁자이게 하는 논리 혹은 시스템. 이 전깃불이 오는 시스템. 바람이 불어가는 시스템. 논리. 변화. 운동. 에너지 같은 것들이지요. 내가 알고 있는 헌법 상법 민법이 아니었구나. 우주 만물이 작동하는 원리를 법률이라고 하셨구나. 사은이 4가지 인데, 독립된 게 아니고 연계되어 있다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철수 화가는 대종경 읽기를 선과 화두를 읽으셨다고 하시면 선생님은 어떻게 읽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말씀하시면서 동포와 법률을 이야기하셨는데 깨달으신 연계와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계가 같은 것인가요?
같은거죠. 우리가 아는 지식적 인과로는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예요. 흔히 아는 인과인 거죠. 팥 심은데 팥 안나고 콩심은데 콩 안나면 연기적 인과인 거예요.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 게 연기적 인과고, 분석적 인과는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를 믿고 있는 거예요. 인과의 이해가 깊어지면 사물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조금 다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돼요. 나는 법률과 동포은이 이해되지 않았는 데, 어느 날 이해가 되버린 거에요. 그런 순간이 동포가 뭔지를 알았다는 거지, 깨달았다는 건 아니에요. 저는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직장이나 일하는 곳에서 어떠한 형태로 원불교 교법을 활용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현실에서 교도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잖아요? 직장에서는 끝없이 화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나는 화가 날 때가 참 많아요. 매우 사소한 것부터 큰 화까지 화가 날 때가 상당히 많은데 이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 저한테 주어진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예요.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인터뷰 하나를 했는데 그것 가지고 국정원과 통일부로부터 불평을 받았어요. 저는 과거에 도청당한 적이 있어요. 감시를 직접적으로 부딪칠 때마다 힘들죠. 내가 쓴 글을 직원들이 국정원에 보고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걸 견뎌내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정말로 견디려고 애를 많이 써요. 직원들한테 웃어주고 내가 먼저 인사하려고 하고 티를 안 내려고 하고 그러다가 문득 복수심이 생기기도 했어요. 사람마다 누구나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이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갖고 있을 텐데 저는 상처 때문에 입교를 했습니다. 권유도 있긴 했습니다만 내 상처를 견뎌내기 위해 입교를 해서 내면 깊숙이 복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꽤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것이 내가 원불교를 믿어서 생긴 좋은 것인 거 같아요.
그러나 아직도 예쁜여자 보면 눈길이 가요. 이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이것 때문에 실제로 괴로움을 느껴요. 여전히 내가 이러고 있나?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것마저도 극복되면 좋겠습니다만 그것마저 극복돼버리면 내가 영원히 동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예쁜여자 보면 눈길이 가고 관심이 가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으니까 내 안에서 복잡한 감정이 매순간 부딪히고 있는데 그때마다 대종경을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읽으려고 하고 노력하고, 쉬운말로 바꾸기 위해 생각 많이 하고 그러는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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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역시 성권짜응이 최고죠👍🏻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도상 작가님께서 배경지식이 많으셔서 그런지 대종경이 이렇게 재밌게 이해가 될지 몰랐어요 ㅎㅎ 와~ 다시 한 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