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선포였다. 유신의 성격은 두 가지다. 반민주적 분단독재이며 군사독재 이상으로 파쇼화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타도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물론 민족통일도 불가능해 진다.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선생을 자주 만났다.
재야의 양심을 모아 반분단ㆍ반파쇼 투쟁을 일으켜 그것을 대중화해야 했다. 함석헌씨를 찾아갔다. “유신은 안 된다. 민주주의는 물론 민족통일의 토대마저 허물고 있다”며 개헌청원 운동의 뜻을 비췄다. 함 선생은 “할 만 하구먼”이라고만 언급했다. 장 선생을 만나 함 선생의 ‘동의’를 전하고 김수환 추기경의 의중을 떠 볼 것을 건의했다.
추기경의 적극적 동의를 얻어낸 장 선생은 “서둘러 여러 사람을 만나자”고 했다. 초안을 만들어 장 선생 구두 밑창 속에 넣어 주었다. 장 선생은 그 구두를 신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30명의 서명과 도장을 받고 둘이서 수락산으로 등산을 갔다. 장 선생은 일반인 상대로 서명을 받기 위해 초안의 내용을 좀 누그러뜨리자고 제안했다. 유인물 문장을 완성했으나 제작비가 없었다. 종로 5가에 있는 진명서림(당시 국내 최대의 책 도매상)에 가서 안광호 사장을 만났다.
우리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술 값이 없어 못 살겠다”고 했더니 두말 않고 서랍을 열어 돈을 꺼내 주더라. 70만원이었다. 인쇄 장비를 구입해 장 선생 집으로 갔다. 이대 교수로 30명 서명자에 속했던 김윤수(金潤洙ㆍ현 국립현대미술관장)씨 등이 있었다. 함께 밤을 새워 등사기를 돌렸다.
각자 50여장씩 나눠 갖고 아침에 YMCA 총무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새벽에 헤어졌다. 장 선생의 친구인 전택부(全澤鳧)씨가 YMCA 총무로 있었다.
12월 24일 아침 일찍 YMCA 총무실로 갔다. 조금 후 장 선생과 김 교수, 그리고 함석헌 선생, 김동길 교수 등 7~8명이 왔다. 언론사에 연락했더니 외신기자들까지 몰려왔다. 낯익은 중정 요원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기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를 제지하지 못했다.
이틀 뒤 26일 명동 대성빌딩에서 ‘항일 문학의 밤’ 행사가 있었다. 나는 김민기씨를 특별히 초청했다.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돼 있었던 때라 많은 사람이 모일 것으로 생각했다. 개헌청원 운동 취지문을 나눠주는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되는 등 약간의 소동이 있었으나 행사는 성대히 끝났다.
26일 김종필 국무총리에 이어 29일에는 박 대통령이 서명운동을 그만두라고 협박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30일 장 선생 등과 명동 모 다방에서 모였다. 우리는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계속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만들어 각 신문사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연말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1월 4일 성명을 냈다. 나흘 뒤 대통령 긴급조치(1ㆍ2호)가 발표됐다. 개헌 운운은 물론 그 조치를 비난만 해도 15년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명지는 특별한 양식 없이 백지에 이름을 쓰고 도장이나 지장을 찍은 것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모아 두었던 서명지를 소각했다. 장 선생도 그랬다. 그 때까지 우리가 모은 것이 15만명 가까이 됐다. 며칠 후 나는 잡혀갔다.
서명지를 내 놓으라고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다. 중정 6국에서 검찰 조서를 받았다. 검사 앞에서까지 헌병 2명이 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었다. 장 선생은 죽일 테면 죽이라며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너희가 모시는 사람이 일본군 중위 출신인데 나는 독립군 대위 출신이다. 내가 어떻게 너희들 조사를 받느냐”고 버텼다.
조사관들은 장 선생에게 통사정을 했다. 장 선생은 “백기완을 때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내가 조사를 받겠다”고 했다. 이후 나에 대한 매질이 없어졌다. 15년 형을 선고받고 75년 2월 소위 ‘위로 석방’으로 풀려났다.
장 선생은 제2의 운동을 준비했다. 박 정권은 월남 패망(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을 반공의 빌미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긴급조치 9호(5월 13일)의 명분이 됐다. 8월 17일 밤 장 선생의 아들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등산 갔던 아버지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갔다. 새벽 1시가 넘었다. 바위 위에 시신이 놓여 있었다. 내가 머리를 안아 드니 오른쪽 귀 뒤쪽에 선명한 타박상이 있었다. 겨드랑이를 누군가 꽉 껴안은 듯 심하게 멍든 자국이 있었다. 암살됐다고 직감했다. 전문가의 수법이었다.
빈소에서 문익환(文益煥) 목사를 만났다. 그는 장 선생과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와 함께 중국 만주에서부?죽마고우였다. 얼마 후 문 목사를 만나 장 선생과 논의했던 ‘제2의 운동’에 관한 메모를 전했다. 그것이 76년의 ‘3ㆍ1절 민족 구국선언’이다. 주모자로 법정에 선 문 목사는 “죽은 친구 장준하를 대신해서 구국선언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