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많으면 돈 벌 일도 많을거라 생각한 시골청년 하나가 상경한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학벌이래봐야 이름없는 시골의 농고를 졸업했을 수준인 그가 한탕 치기 위해서는 사람 등쳐먹는 일일 뿐이다. 몸뚱아리 하나 믿고 달려온 인생, 옆방에 하숙하는 퇴물 춤선생에게 사사받고 카바레에 진출, 어렵사리 돈 많은 과부하나 꼬셔서 사기결혼에까지 이르지만 한탕치기는 여전히 순조롭지 않다. Boys, be ambitious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 말을 내뱉을 수록 더욱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그는 홍식이다. 그 홍식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서울까지 따라온 또 하나의 시골청년이 있다. 매사에 티격태격하며 홍식을 몰아세우고 인간답게 살라며 일침을 놓지만 그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그 도시를 떠나려 하면서도 동네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영부영 눌러앉는 중이다. 시골서 얻어온 돈으로 가게를 차리지만 그마저 사기당하고, 맨발로 술집에서 도망쳐 나온 불쌍한 시골처녀를 데려다 먹여줄 만큼 어리숙하면서도 순박한 구석이 남아있는, 그는 홍식의 친구 춘섭이다. 그 둘의 사이에 영숙이란 아가씨가 있다. 허드렛일 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녀는 언제나 돈많고 멋진 남자를 만나 달동네를 탈출하게 되기를 꿈꾼다. 조그만 공장의 사무실에 다니는 그녀이지만 눈은 턱없이 높아 웬만한 남자에겐 코웃음도 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사랑하게 된 건 돈 없고 비전없고 동네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못 되먹은 홍식이다.
우리는 거의가 가난하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기억속으로만 찾아갈수 있는 어린시절의 모습은 그러했다. 매일밤 엄마를 졸라 누나들과 함께 콜라나 환타를 맛보는 것이 유일한 사치였을 만큼 우리집은 가난했고 적어도 나의 이웃과 학교친구들은 모두가 가난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냉장고가 완전히 보급된 것이 아니어서 동네 한켠엔 얼음을 파는 집이 있었고 그 옆엔 한시간에 200원 하는 식으로 자전거를 빌려주는 험상궂은 아저씨가 항상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장마가 지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불어난 개천에 떠내려오는 짬뽕공을 줍기위해 나뭇가지를 들고 몰려들었고, 아... 주머니속엔 딱지 몇장과 구슬 한웅큼 뿐이었다해도 동네 공터에선 얼마나 재미난 일이 끊이지 않았었는지... 이문세가 새로 내놓은 앨범의 빨간내복 인가 하는 노래가 향수를 자극하는 것도 지금은 궁상맞게 들릴지언정 우리가 쉽사리 찾아갈수 있는 기억의 저편, 유년기의 한구석은 그러했기 때문이다. 내가 저 못 된 홍식과 지 앞가름 못하긴 별반없는 춘섭과 눈물나게 쓸쓸한 영숙이가 등장하는 드라마 서울의 달을 잊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그 밑바닥에 깔린 정서가 가난하고 지지리 궁상맞고 그러다보니 얄밉고 속보이는... 그러나 비록 그러하다해도 진심으로 미워하기는 힘든 그 모습이 그리 낯설진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가난했고 나의 이웃과 나의 학교친구들 역시 그러했으니까...
우리보다 잘 산다 하는 -십년넘게 불황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보단 잘 사는... - 일본 역시(이놈의 나라가 왜 망조가 들었고 다양한 자구책이 왜 효력을 못보는지 알고자 한다면 이원복의 먼나라이웃나라 일본편을 보자^^) 서민들의 속살림은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지 메존일각(국내판명 도레미하우스)라는 만화를 보면 가난한 시절이 그네나 우리네나 다름없었다는 의미에서 상당히 공감이 간다. 우리에게 국민가수 국민배우가 있듯이 일본의 국민만화작가라는 타카하시 루미코가 80년대 초반부터 7년 넘게 연재한 이 만화는 오래된 하숙집을 무대로 가지각색의 사연을 가진 하숙인들의 처량한 모습들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음에 가끔은 존경스럽지만 대개는 뭔지모를 아련한 그리움이 빚어내는 미소속에 한숨짖게 된다. 중학교 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이란 짤막한 수필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골목을 지나갈 때 발을 멈추고 한참이나 서 있게 하는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 나는 비 오시는 날 저녁때 뒷골목 선술집에서 풍기는 불고기 냄새를 좋아한다. 커피 끓이는 냄새, 라일락 짙은 냄새, 국화, 수선화, 소나무의 향기를 좋아한다. 봄 흙 냄새를 좋아한다. 나는 사과를 좋아하고 호도와 잣과 꿀을 좋아하고 친구와 향기로운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호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그 소박한 삶이 나는 좋다. 그 솔직함과 꾸미지않음이 멋스럽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하고 그러한 안빈낙도의(^^;;;) 삶을 존경한다 해도 탐욕과 아집에 찬 이마음 어쩔 수 없어 오늘도 국민은행가서 로또용지를 한웅큼 쥐어왔더랬다. 세상엔 가지고 싶은 물건들은 너무나 많고 먹고 싶은 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어서 마치 홍식이 처럼 한탕 한탕만 치면 말이야... 딱 이번 한번 뿐이야. 이제 두번다시 로또 같은 건 안 할 거야... 이번 한번만 큰놈으로 터져만 준다면... 사라만다... 혹은 피닉스... 불사조는 죽을 때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태우지만 그 불꽃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던가... 헛된 꿈을 안고 스스로 내던지는 것일 테지만... 부처님 하나님 알라님 ... 홀로 완전하시고 홀로 위대하신 모든 신들과 인간이 따로이 만들어낸 모든 신들이시여. 이번 한번만 부탁드리나니 제발 꿈속에 숫자 여섯개만 보여주십사... 이 마음 다하여 기도드리나니... 하늘이시여... 치켜든 이 오른팔에 마이더스의 행운을 깃들게 해주시기를... 비나이다...
*** "주머니속의 전쟁" 이란 제목은 건담0080 부제에서 빌림. 지금은 주머니속에 숨겨둔 로또의 전쟁이 한창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