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경식 鮮宇景植(1445~2008)】「큰식당을 운영했던 의사, 쪽방촌의 슈바이처」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15회)와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나 Kingsbrook Jewish Medical Center Brooklyn N.Y.에서 내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의과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주말에 무료진료 봉사를 하다가, 1987년 8월 29일에 동료 의사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도움으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자신의 세례명에서 유래한 무료 진료소 "요셉의원"을 설립했다. 아프지만 치료를 받을 돈이 없는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들을 상대로 피를 뽑고 검사하는 게 죄스러워 그 때부터 요셉의원은 밥을 주기 시작했다. 돈을 받지 않고 약에 밥까지 주니 적자를 면치 못했지만,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도움(후원)의 손길이 나타났던 덕분에 병원은 운영될 수 있었다. 한미참의료인상의 1회 수상자로서, 위원회의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선우경식 원장이 결정되었다. 선우 원장은 처음에는 수상을 사양하였으나, 쉼터 건립을 위해 수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선우 원장은 갈 곳 없는 노숙자 환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기 위해 모금하고 있었으며, 해당 상금을 전액 쉼터 건립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평생 자가용도 없이 작은 진료 가방 하나만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며, 일생동안 독신으로 오로지 환자들만을 위해 무료 진료에 투신한 모습에서 '쪽방촌의 슈바이처'라는 별명이 붙었다. 1997년에 요셉의원을 신림동에서 영등포구 영등포동으로 이전했다. 2006년 위암 투병 중에도 환자를 진료하는 데 열중하였으나, 불행히도 2008년 4월 15일 뇌출혈로 쓰러진 후 사흘 뒤 사망하였다. 사후 약 2개월만인 2008년 6월 12일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
선우경식, 1945년 평양에서 태어나다.
선우경식(요셉)은 1945년 7월 31일 평양 선교리에서 부친 선우영원(베드로)과 모친 손정복(비르짓다)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51년 1.4 후퇴 때 평양에서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대구 피난민 수용소에서 5년 동안 지낸 후 서울로 올라왔다.
1963년 의과대학에 진학하다.
서울금양국민학교(현 서울금양초등학교, 1957.3), 서울중학교(1960.3.3), 서울고등학교(1963.2.2)를 졸업하고 1963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전쟁으로 피난생활을 경험한 그는 어린시절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6.25 때 선우경식의 외삼촌이 전사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군인이 되기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중학생이 된 선우경식과 부친 선우영원 선생
진로를 고민하다.
선우경식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닌 부모 아래서 어릴 때부터 깊은 신심을 길러왔다. 의대 본과 진학을 앞두고 고교 시절부터 뜻을 두었던 사제나 수도자의 길로 방향을 바꿀까 고민했지만 부친의 설득으로 의학공부를 계속했다. 의대 본과를 다니면서도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고 도중에 포기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생명을 다루는 일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귀찮다고 미룰 수도 없고, 실패도 실수도 용납이 안되죠."
1964년 가톨릭의과대학학생회 피정 기념 (앞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선우경식)
대한가톨릭학생 서울대교구 연합회에서 주최한 지도자 강습회 과정 수료증
의대 시절의 선우경식
1969년 2월 28일 가톨릭의과대학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1969~1970년 인턴 과정을 하다.
대학 졸업 후 1969년 4월부터 1970년 3월까지 1년 동안 인턴 생활을 하면서 선우경식은 돈이 없어서 돌려보내지는 응급환자들과 치료비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가난한 환자들을 보며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다.
"병원이라는 곳이 돈 없고 아픈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더군요."
1970~1973년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인턴 과정을 마치고 1970년 5월 해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87함 군의관으로 발령받았다. 병원선을 타고 낙도의 주민들을 진료했고, 사병이든 장교든 몸이 아픈 이들은 돈이 있든 없든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로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병원이나 사회나 군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했고, 그의 근원적 회의는 계속되었다.
복무 중인 선우경식은 수첩에 이렇게 썼다.
"... 오늘 하루의 일과는 내 몸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번잡했다. 앞으로 나의 해상 생활이 조금이라도 천주님의 영광에 도움이 된다면 보람찰 것이다. 성실만이 거룩하게 한다. "
해군 중위 임명장
1971년 5월. 해군 복무 중인 선우경식
선우경식이 군의관으로 발령받은 87함
함정 위에서
1975년 미국으로 떠나다.
1973년 제대 후 선우경식은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했지만, 인턴 때와 같은 갈등과 회의를 다시 겪게 되었다. 그는 선배들로부터 미국에서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무 치료제도가 있어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결심을 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킹스브룩 주이시 메디컬센터(Kingsbrook Jewish Medical Center)에 레지던트 과정을 신청한 선우경식은 1975년 뉴욕으로 떠났다.
1975~1978년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하다.
선우경식이 내과 전문의 과정을 신청한 킹스브룩 주이시 메디컬센터(Kingsbrook Jewish Medical Center)는 환자 병상이 700여 개, 의료진을 포함한 직원 수가 2,000여 명에 달하는 대형병원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많은 임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미국에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무 치료제도가 있어서 가난한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 거부가 없었다. 그는 3년 간의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마치고 병원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Kingsbrook Jewish Memorial Hospital)의 내과 의사로 근무했다.
1980년 한국으로 돌아오다.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선우경식은 새로운 갈등에 빠졌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의사라는 직업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귀국 직전 그는 '왜 나는 의사가 되기를 이토록 싫어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답을 얻기 위해 일주일 동안 한 수도원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의술이 싫은 게 아니라 기존 병원의 진료행태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돈 안 받는 의사가 되면 되겠구나, 그렇게 결심하고 귀국했지요." (2006년 5월 <착한이웃> 인터뷰에서)
1980년 9월 한국으로 돌아온 선우경식은 무료 자선진료를 할 곳을 물색했지만 병원들은 경영상의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귀국한 지 거의 일 년이 되도록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1년 가을, 친구의 제안으로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강남성심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983년 정선 성프란치스코의원에서 일하다.
1983년 봄, 선우경식은 근무하고 있던 강남성심병원에 휴직계를 내고 강원도 정선 탄광촌에 있는 성프란치스코의원으로 향했다. 정선 성프란치스코의원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1976년에 개원한 병원이었다. 그곳 원장 수녀가 자리를 비우는 3개월 동안 진료를 맡아줄 의사를 구하고 있었는데 선우경식이 그 자리에 자원한 것이었다.
성프란치스코의원에서 그는 주중에는 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2주에 한 번씩 주말에는 팀을 이루어 이동진료를 나갔다. 선우경식은 이 일에서 보람을 느꼈다. 아직 의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정선에서의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