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프랑스 7월혁명 (~7.29) ← 1830년 7월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7일 小부르주아, 노동자, 학생이 주축이 된 파리 민중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7월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혁명은 이틀 전인 25일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가 발표한 ‘7월 칙령’이 발단이 됐다. 출판 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자격의 제한 등을 포함하고 있는 칙령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저항세력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28일에는 바리케이드가 파리 전역으로 확산되며 왕정 복고 이후 금지됐던 삼색기가 나부꼈고, 다시 그 다음날 파리 민중은 치열한 시가전을 통해 군대를 제압하고 왕궁으로 돌진했다.
혁명은 성공했고 국왕은 영국으로 달아났다. 국왕 샤를 10세는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에서 사라진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입헌정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구제도에로의 복귀를 원해 극단적인 반동정책을 실시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경제침체도 그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자유주의자들은 1830년 5월 총선거에서 하원에 대거 진출하는 성과로 국왕에 맞섰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7월 선거를 실시했으나 또다시 반정부세력이 다수를 점하자, 국왕은 결국 당시 알제리 진출에 성공한 여세를 몰아 강압수단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것이 ‘7월 칙령’이었다.
7월 혁명은 부르봉가(家) 샤를 10세의 보수적 입헌왕정을 오를레앙가 루이 필리프의 자유주의적 입헌왕정(7월 왕정)으로 바꾸는 것에 그쳤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시가전을 치른 세력 가운데는 공화파도 많았지만 자유주의 저널리즘을 통해 혁명을 이끈 부르주아지는 입헌왕정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 7월 왕정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졌다./조선
[1985년] 63빌딩 준공
동양최고를 자랑하는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1985년 7월 27일 개관돼 일반인에게 첫 선을 보였다. 아침부터 몰려든 관람객들로 연건평 5만2백평에 지하3층 지상60층 건물은 하루종일 인파로 북적거렸다. 관람객은 모두 3만여명이었다.
관람객의 인기품목 1위는 최고층에 자리한 전망대로 동시 수용인원이 1천2백여명이나 됐지만 관람 희망자가 넘쳐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하 1,2층의 대형수족관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총규모 1천32평인 수족관은 모두 54개의 전시수조로 구성됐으며 이 수조사이로 나있는 관람통로길이도 2백50m에 이르렀으나 발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별관 지하1층에 있는 입체영화관은 특히 어린이에게 인기가 높았다. 관람객들은 가로 25m, 세로18m로 일반영화관보다 3배나 되는 초대형 화면을 보고 신기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개관기념으로 처음 상영한 영화는 미국영화 ‘창공을 날아라’였다. /조선
[1980년] 팔레비(Pahlavi, Mohammad Riza Shah) 전 이란국왕 사망 ← 팔레비
1919. 10. 26 ~ 1980. 7. 27
팔레비 전 이란국왕이 1980년 7월 27일 사망했다. 1941년 아버지의 퇴위로 이란 팔레비왕조 제2대 황제에 즉위했으나 영국, 소련의 점령 및 황제제도 반대세력의 대두등으로 황제권의 기반은 약체였다. 이에 1957년 사바크(비밀경찰)를 설치하고, 미국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 황제권을 확립했으며, 그 해 팔레비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석유수출을 배경으로 농지개혁, 여성참정권을 골자로 한 근대화정책 '백색혁명'을 단행했고, 1973년에는 제5개년계획을 실시했으나 1975년부터 석유, 중공업 편중정책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해 1978년에는 반정부 데모를 초래했다. 결국 1979년 1월 이집트로 망명한 뒤 복권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미국, 파나마를 전전하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조선
[1963년] 박정희 의장, 민정(民政) 이양 일정 발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3년 7월 27일 대통령 선거를 10월 중순, 국회의원선거를 11월 하순에 실시할 것이며 군정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에 소집해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라는 총선거실시계획을 발표했다.
박의장의 민정 이양 일정 발표에 대해 재야 각 당은 "이번만은 다시 번의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전제를 붙여 환영했다. 박의장이 밝힌 민정 이양 일정은 다음과 같다.
1.공고중인 개정헌법의 개정안의 철회를 위한 조치를 즉시 취한다 2.대통령선거는 1963년 10월 중순경에 실시하고 국회의원선거는 11월 하순경에 실시한다 3.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해 정부는 선거관계법의 정비 및 그 운용에 만전을 기한다 4.총선거 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경에 소집되며 동시에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다. /조선
[1953년] 6ㆍ25전쟁 휴전협정 조인 ← 휴전회담 조인식(1953. 7. 27)
1953년 7월 27일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6·25전쟁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국제연합(UN)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1951년 1월말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이후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1951년 6월 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Y. A. 말리크가 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38˚선을 경계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제의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포로 교환 문제, 양측의 경계선 문제 등에 이견을 보이다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의 실시를 감독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가 설립되었다./브리태니커
[1949년] 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멧’(Comet) 비행 성공
세계최초의 제트여객기 ‘코멧’이 1949년 7월 27일 첫 비행에 성공했다. 코멧 1호기는 7월 25일에 완성돼 26일 지상주행 테스트를 거친 후 마침내 이날 최초비행에 성공했다.
코멧은 길이 28.35m, 폭 35.05m의 날씬한 유선형 기체였다. 주날개에 장착된 터보제트엔진은 총중량 48톤이나 되는 비행기를 시속 760km의 순항속도로 최장 4000km나 비행할 수 있게 했다.
4명의 승무원과 36명의 승객이 별도의 장비없이 고도 1만2천m 상공에서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다. 영국은 최초 비행에 성공한 후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로부터 주문을 받아 1952년 5월 2일에는 영국 런던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간의 정기항로에 취항했다. /조선
[1921년] 캐나다 의사 밴팅, 개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리하는데 성공 ← 밴팅
밴팅(Banting, Frederick G.)은 1891년 11월 14일 앨리스턴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1917~1919년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정형외과학을 수학하여 온타리오주(州) 런던에서 개업했으나, 1년도 안 되어 그만두었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서부(西部) 온타리오대학교의 비상근(非常勤) 강사가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특히 당뇨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으며 1921년 토론토대학의 생리학 교수 J.J.매클라우드의 연구소에서 베스트, 매클라우드와 함께 당뇨병 치료약 인슐린을 발견하였다. 1923년 의학연구교수가 되었으며, 또 매클라우드와 공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30년 밴팅 연구소를 창립하였으며, 1934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1941년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다. /naver
*1921년 5월 16일, 프레데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는 토론토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밴팅은 개업이 잘 되지 않아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틈틈이 의학도서관에 들려 논문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던 29세의 젊은 정형외과 의사였다. 한편 베스트는 생리학교실의 주임교수 맥클로드가 밴팅의 실험조수로 추천한 21세의 의과대학생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췌장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당뇨병 관련 물질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의학계에서 췌장과 당뇨병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1889년에 폰메링과 민코프스키가 개에서 췌장을 제거하여 인위적으로 당뇨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 이 후 여러 사람들이 당뇨병 관련 물질은 췌장의 랑겔한스 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록 이 물질을 실제로 분리해 낸 사람은 없었다.
밴팅은 아직 아무도 이 물질을 분리하지 못한 이유가 췌장에서 분비되는 효소액이 실험과정에서 당뇨병 관련 물질을 소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의 췌관을 묶어 소화액을 분비하는 조직을 위축시킨 뒤에 나머지 췌장조직에서 원하는 물질을 추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밴팅의 가정은 틀려 있었다. 췌관을 묶은 지 10주가 지나도 조직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개의 췌장전체를 원료로 실험을 계속했다.
7월 27일, 결국 그들은 당뇨병 관련 물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비결은 췌장조직을 분리 즉시 찬 링거액에 담가 저온 상태를 유지하면서 산성 알코올을 추출액으로 사용하였던 데에 있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이는 췌장의 단백질 분해효소작용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중대한 조건들이었다. 9월 8일에는 추출한 물질을 췌장을 제거한 당뇨병 개에게 다시 주사하여 혈당이 저하하는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이 추출액 속에 들어있을 물질을, 랑겔한스 섬에서 추출한 물질이라는 뜻에서 ‘작은 섬’을 의미하는 ‘아일레친’이라고 명명했다가 나중에 같은 뜻의 라틴어인 ‘인슐린’으로 고쳤다.
이제는 더 많은 양의 인슐린을 얻기 위해 지혜를 짜낼 때였다. 그들은 먼저 도살장에서 소 태아의 췌장을 얻어 다량의 추출액을 얻었다. 이 추출액으로는 당뇨병 개를 70일 동안이나 생존시키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얼마 후에는 어른 소의 췌장에서 추출하는 데에도 성공해 인슐린을 더욱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21년 12월 2일, 최초로 인슐린 치료를 받기 위한 당뇨병 환자가 토론토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13세 된 환자의 이름은 레오너드 톰슨이었다. 톰슨 소년이 당뇨병 진단을 받은 것은 2년 전인 1919년 12월의 일이었다. 엄격한 식이요법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체중은 자꾸 줄었고 다량의 당뇨를 배출했다. 이제는 인슐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해가 바뀐 (1922년) 1월 11일, 드디어 새로운 치료법이 시행되었다. 소의 췌장 추출액을 약하게 희석한 첫 번째 주사를 맞은 톰슨의 혈당은 당장 25퍼센트 저하했다. 매일 주사를 놓자 소년의 소변에서 검출되는 포도당의 양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월 초 열흘간의 주사가 끝나 치료를 중단하자 소년의 상태는 곧 입원 당시로 되돌아갔다. 다시 인슐린 주사가 개시되었고 한 달 후 환자는 매일 주사를 맞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톰슨은 그 후로 13년을 더 살았다. 사망원인은 당뇨병과 전혀 무관한 오토바이 사고였다.)
밴팅과 베스트는 이 경험을 <캐나다의학협회잡지>에 발표했다. 세계 최초로 당뇨병 치료법을 알아내려던 두 젊은이의 모험이 멋진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밴팅과 베스트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2006-12-1 서울아산병원)(이재담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Google
[1914년] 주시경(周時經) 선생 사망 ←주시경
1876. 12. 22 ~ 1914. 7. 27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다.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줌으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다. 그러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린다. " - 주시경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지나니라". 한말의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1914년 7월 27일 타계했다. 38세였다.
황해도 평산 태생으로 호가 한힌샘인 선생은 우리 말과 글을 과학적이고 체계화한 국어 중흥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국어사랑은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쓰자는 주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독립신문 교열을 보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쏟은 선생은 이 신문에 기고한 `국문론`을 통해 한글이 한자에 비해 과학적으로도 훨씬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생은 1897년부터 배재학당에서 4년간 신학문을 공부했고,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협성회보를 발간했고, 한글 기사체에 대한 통일과 연구에 몰두했다. 여러 학교와 강습소를 찾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김두봉 이규영 최현배 장지영 이병기 등 선생이 길러낸 문하생들은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창설했고 1933년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요절한 탓에 비록 우리말 연구의 끝을 맺지는 못했지만 선생이 길러낸 제자들은 20세기 전반기 국어학의 대가로 우뚝솟아 선생의 뜻을 이어갔다. 1980년 선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월남망국사’ ‘한문초습’ ‘국어문전음학’ ‘국문초학’ ‘말의 소리’ 등이 있다. /조선
[1894]년 갑오경장 단행 ← 김홍집
1894년 7월 27일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박정양·김윤식·유길준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개혁사업을 추진했다. 국왕의 권한이 축소되고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 사용을 의무화했다. 또한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가 반영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한국 최초의 법령인 홍범14조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간섭이 더욱 심해진 이후 개혁은 거의 일본의 뜻대로 진행되었다./브리태니커
[1862년] 신소설 작가 이인직 출생 ← 이인직
"일청전쟁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띠끌뿐이라." - 이인직, <혈의 누>
이인직은 신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 작가이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900년 대한제국 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했다. 1906년에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와 <만세보> 주필을 지냈다. 1907년에는 이완용의 도움으로 <대한신문>을 창간했다. 1910년 이완용의 심복으로서 한일합병이 체결되는 매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혈의 누>(1906)·<귀의 성>(1906~07)·<은세계>(1908) 등 신소설을 쓰는 한편, 1908년에는 원각사를 세워 한국 최초의 신극이라 할 <은세계>를 상연했다. 그의 작품들은 반봉건 계몽사상을 강력히 고취하기는 했으나, 봉건관료제에 대한 맹목적 부정과 근대문물에 대한 무조건적 긍정에서 결국 친일개화론으로 낙착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는 구소설에서 근대소설로 이어지는 전통적 연결을 확립하고 문장에서도 구어체와 묘사체를 도입하는 등 문학사에 큰 기여를 했다./브리태니커
[1835년] 이탈리아의 시인 카르두치(Carducci, Giosue) 출생 ← 카르두치
1835. 7. 27 ~ 1907. 2. 16
토스카나주(州) 발디카스텔로 출생. 아버지는 의사이며 애국적인 정치가였다. 아버지를 따라 볼로냐(1839∼1849)·피렌체(1849∼1850) 등으로 옮겨 살았다. 스코로피학교에서 신부(神父) G.바르소티니에게 배우고, G.T.가르가니 및 E.넨초니와 교유(交遊)하였으며, 이어서 1853∼1855년 피사의 사범대학 문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고전문학을 애호하여 당시 전성을 자랑하던 낭만주의 문학을 반대하고 가르가니, 토제티 등과 함께 낭만파인 브라치를 상대로 논쟁을 벌였다.
1856∼1857년 성미니아트의 중학교 교사로 있었고, 1857년 동생의 자살, 이듬해 부친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고교 교사로 있던 중 문교장관의 초청으로 볼로냐대학의 이탈리아 문학 교수가 되면서 많은 저술을 하게 되었다(1860∼1904). 1890년 상원의원에 임명되었고, 1899년부터 반신불수로 고생하다가 교수직을 사임하였고, 19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그 이듬해 볼로냐에서 죽었다.
그는 국어의 순화, 국민 문학의 제창, 고전연구 등으로 이탈리아 근대문학의 정통적 방향을 잡았으며, 헬레니즘과 소박한 휴머니즘 정신에 입각하여, 순수한 자연과 인간의 생명감, 애국적 정열 등을 추구하고, 그리스·로마의 운율(韻律)을 현대 이탈리아 율격(律格)에 되살려 장중하면서도 명랑하고 전아(典雅)한 고전적 이상주의 시풍을 창조하였다.
주요저서로 《레비아 그라비아 Levia gravia》(1861∼1871) 《악마송가(惡魔頌歌) Inno a Satana》(1863) 《신가집(新歌集) Rime nuove》(1861∼1887) 《의고시집(擬古詩集) Odi barbare》(3권, 1877∼1889) 등이 있다. /naver
[1824년]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뒤마(Dumas, Alexandre) 출생 ← 소(小)뒤마
뒤마 [Dumas, Alexandre, 1824.7.27~1895.11.27]
소(小)뒤마라고도 한다. 파리 출생. 《몽테크리스토백작》의 작자인 대(大)뒤마와 벨기에 부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창녀의 순애(純愛)를 그린 《춘희(椿姬)》(1848)를 냄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이 소설은 대단한 호평을 받아, 이듬해에 그 자신이 극화(劇化)했으나, 엄중한 검열제도 때문에 상연(上演)이 허가되지 않았다. 1852년에야 겨우 상연되어 각광을 받았고, 그 후로는 극작가로 맹활약하여 《드미몽드 Le Demi-Monde》(1855) 《금전문제 La Question d’argent》(1857) 《사생아 Le Fils natural》(1858) 《여성의 친구 L’Ami des femmes》(1864) 등 사실적인 문제극을 썼다. 남성의 이기주의를 중심으로 이것을 조장시키는 돈의 힘, 그것을 묵인하는 항간(巷間)의 관습이나 법률을 테마로 하였다. 그의 희곡은 견실한 기법으로 솔직하게 사건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사회추이(社會推移)에 따라 오늘날에는 다소 진부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1866년 이후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naver
그밖에
2005년 행정계층구조 개편을 위한 주민투표 제주에서 첫 실시
2005년 美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2003년 미국 코미디언 밥 호프 별세
2002년 정부 ‘항공기운항 안전법’ 시행결정. 기내 휴대폰·흡연 벌금 최고 100만원
2002년 우크라이나 에어쇼에서 저공곡예 전투기가 관중석 덮쳐 83명 사망
1999년 ‘해방신학’ 대가 카마라 주교 별세
1998년 클린턴 미국대통령 섹스 스캔들과 관련, 클린턴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르윈스키양이 특별검사에게 실토
1996년 경기-강원 북부지방에 내린 집중호우로 인한 군부대 매몰로 군인들 사망
1996년 애틀랜타 도심 올림픽공원서 폭탄테러 - 2명 사망, 110명 부상
1991년 콘돌호 통일쌀 5천톤 북송
1989년 대한항공 여객기, 리비아 트리폴리공항에 착륙중 추락(사망-실종 80명, 부상 119명)
1989년 살아있는 사람의 간이식 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1981년 경남 거창서 신석기시대 지석군 발견
1981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남북체육회담 개최 촉구
1976년 중국 당산에 강진 65만명 사망
1976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수상, 록히드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미국 하원 사법위 닉슨대통령 탄핵 결의
1972년 AFP통신, 임표(林彪) 쿠데타사건 보도
1969년 양평서 시외버스 남한강 추락, 50여명 사상
1965년 고 이승만 전대통령 장례식
1965년 미군기 월맹미사일기지 첫 폭격
1961년 한국-니제르 국교 수립
1956년 야당계 민의원 지방선거에 대한 관권개입 규탄(국민주권옹호투쟁위 결성)
1955년 오스트리아 독립
1954년 베트남, 제네바협정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
1950년 공산군, 하동서 진주방면으로 침입(채병덕소장 전사)
1945년 영국 총선거(26일)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애틀리 내각 성립
1938년 서울 시장에 가격표를 붙인 상품 등장
1917년 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 사망 - 1909년 갑상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1915년 평남북에 대홍수
1909년 舊 한국은행 조례 공포
1907년 보안법 공포
1877년 ‘자장가 변주곡’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도흐나니 출생
1844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사망
1498년 무오사화 일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