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오늘-8월 30일 자에 문정왕후 금보를 찾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문정왕후 금보, 미국으로 유출됐다
해방후·한국전 등 혼란기에 종묘서 불법 유출된듯
소장 미술관 반환불가 입장…학계 “환수교섭을”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 권력자였던 중종(재위 1506~1544)의 왕비
문정왕후(1501~1565)의 금보(왕실도장인 어보의 한 종류)가 미국으로
유출돼 현지 유명 미술관이 소장, 전시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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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은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
(LACMA·라크마)이 문정왕후 금보를 구입해 구내 한국실에 전시중인
사실을 확인했다”고 29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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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금보는 높이 6.45㎝, 가로, 세로 각 10.1㎝의 크기다.
금동 재질로 비늘과 등딱지 달린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아래 인면(도장을 찍는 면)에 문정왕후의 존호(존경해 올리는 호칭)인
‘성열대왕대비지보(聖烈大王大妃之寶)’란 명문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조선 초기 왕실의 금보 제작 양식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공예사,
문화사적인 가치가 높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547년 그의 아들인 명종(재위 1545~1567)이
경복궁 근정전 섬돌 위에 나가 ‘성렬인명대왕대비’라는 존호를 올리고
덕을 칭송하는 옥책문과 악장을 올렸다는 기록이 나와
금보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정왕후 금보는 해방 직후 또는 한국전쟁 당시의 혼란기에 종묘에서
무단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라크마쪽 학예사로부터
수년전 한 개인 수장가한테서 금보를 구입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상세한 경위는 알 수 없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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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도장인 어보는 임금과 왕비, 세자, 세손 등 왕족들의
주요 통과의례 때마다 만들어졌다.
태종 이래 조선 주요 임금, 왕족의 어보는 모두 350여점 가량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10여점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사라져
현재는 330여점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남아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을 수렴청정하며 당시 국정을 주도했으며,
친동생인 세도가 윤원형을 앞세워 윤임 등의 유교 사대부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는 을사사화(1545)를 일으켰다.
한겨레신문 8/30일 자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제공 문화재청
기사 전문은 다음 주소;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73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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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하니 갑자기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살던 문정숙이 생각난다.
마침 국새(國璽)를 만들면서 금을 빼돌리고, 그 빼 돌린 금으로
금 도장을 만들어 유력 인사들에게 돌렸느니 어쨌느니,
듣기 장히 민망한 소식이 들리던 중 이런 기사가 났다.
금인줄 모르고 놋쇠도장인줄 알았다는 인사도 있다.
아니… 금하고 놋쇠를 분간하지 못한단 말인가?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걸 가지고 노무현 정권 때 사람들,
별로 해 먹지도 못하고 욕만 실컷 먹는 사람들,
골라서 망신주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지, 놋쇤줄 알았다는 식으로 대답하면 곤란하다.
각설(却說)하고, 위 기사 본문 중,
“문정왕후의 존호(尊號) ‘성열대왕대비지보 (聖烈大王大妃)” 란 구절이 있다.
존호(尊號)란 뭘까?
존호(尊號)
옛날 임금 칭호에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가 있었는데,
성열대왕대비는 그 중 존호(尊號)였다는 뜻이다.
임금이나 왕비가 이름이 없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 그냥 이름 부르면 되지, 왜 머리 아프게 여러가지로 지었을까?
휘(諱)
諱는 꺼릴 휘다.
높은 이의 이름을 부르기를 피한다는 뜻이다.
높은 이나 죽은 이의 이름도 된다.
한자(漢字) 문화권에서는 사람 특히 높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 꺼리는 전통이 있어 이와 같은 글자가 생겨난 것이다.
별로 높지 않아도 이름 불러 제끼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욕 먹는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집안 어른도 정작 이름을 물으면 모르는 수가 있다.
아버지, 할아버지야 어떻게든 외우겠지만, 그 보다 좀 멀면
그 어른 이름이 뭐더라 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엄마 동생 찾았더니 외삼촌이 나오더란 우스개도 있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한국에서는 부부끼리도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거던,
하면 너넨 대체 뭐라고 하니? 하고 되게 신기해 한다.
요즘 한국인도 죤이니 톰이니 하고 서양식 닉네임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기본적으로 우리 이름이 걔들 발음하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쪼깐 놈들이 함부로 어른 이름 불러 은근히 기분 나쁜 것 막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름 부르기를 꺼려 했을까?
터부(TABOO)
터부란 어떤 행위나 대상을 신성하다거나 위험하다는 의례적인 구분에 따라
그 행위나 대상의 사용을 금하는 것으로, 금기(禁忌)라고 번역한다-사전설명
제임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The Golden Bough) 터부 편에서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과 사물을 명확히 구별할 능력이 없는 미개인은 흔히 어떤 명칭과
그것이 가리키는 사람이나 사물이 임의적이고 관념적인 연관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곧 머리카락이나
손톱, 그밖의 신체 일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통해서도 쉽게
어떤 사람에게 주술을 걸 수 있다고 상상한다…(황금가지 터부편에서)
이런 설명과 함께 에스키모, 셀레베스, 오스트레일리아, 고대 이집트,
여러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등의 문화에서 이름을 가지고 주술을 거는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진짜 이름-좋은 이름 또는 큰 이름과 작은 이름
두 가지가 있었는데, 진짜 이름-큰 이름은 숨겼다.
고대 인도 브라만도 이름이 둘인데, 하나는 일상적으로 쓰고
다른 하나는 부모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이름이었다.
비밀 이름은 결혼식 같은 주요 의식에서만 사용한다.
이런 관습은 당사자를 주술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한자 문화권에서 이름을 휘(諱)하는(꺼리는) 관습이 유독 심하지만,
실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현상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호적(胡適) 박사인가가 쓴 명교(名敎)에 대한 수필을 읽은 적 있다.
중국인이 이름에 대하여 주술(呪術)적으로 집착하는 현상,
미워하는 사람 있으면, 벽에다 이름을 거꾸로 쓴다던가 하는 내용이었다.
호적(胡適)의 글 아니라도, 중국 갑골문(甲骨文)은 원래가 주술(呪術)문자였다.
제사 지방(紙榜)에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하고 쓴다면,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 영혼이시여!
부디 나타나시라, 수리수리 마하수리 펑 하는 정도의 효과인 것이다.
이름 뿐 아니라 글자도 주술적이었던 것이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사람 이름을 붉은 글씨로 쓰면 야단 맞았다.
글씨는 그냥 기호인데 어떤 색으로 쓰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건 요새 내 생각이고 옛날 사람들은 달랐던 것이다.
임금의 휘(諱)
이런 문화에서 다른 이도 아닌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제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얼마전 사극(史劇)에 ‘이산’이라고 있었다.
난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정조대왕 이름이란 것을 알고 나서,
야! 참 세상 좋아졌다. 버르장머리 없어도 너무 없다 는 생각을 했다.
옛날 국왕 이름은 어디서 그런 글자가 다 있나 할 정도로
어렵고, 실생활에서 쓸 일이 없는 글자를 골라서 지었다.
연(淵)개소문이 천(泉)개소문이 된 것은 당 고조 이연(淵) 때문이고,
고구려 평양을 함락시킨 이세적이 세(世)를 빼앗기고, 이적이 되어버린 것도
당 태종의 이름 이세민 중 ‘세’ 때문이었다.
이름 뿐 아니라 글에도 들어가면 안 되었다.
아무리 유식해도 글 짓다가 역대 임금 이름을 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까딱하면 있을 수 있는 실수 정도가 아니라,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거의 쓰지 않는 글자로 임금 이름을 짓는 편이 서로 좋았던 것이다.
묘호(廟號), 시호(諡號)
묘호(廟號), 시호(諡號)는 죽고 나서야 붙이고
존호(尊號)는 살아 생전에 지어 올렸다.
묘호(廟號)는 죽어서 신주(神主)가 종묘에 들어갈 때 붙이는 이름이다.
태조, 태종, 세종 등이 묘호다.
조(祖),종(宗)에 대하여, 공이 있으면 조(祖), 덕이 있으면 종(宗)이라는
소위 공조덕종(功祖德宗)론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썩 적절하지도 않다.
이 글의 주제가 아니라 더 이상 설명 피하지만, 중국 시법(諡法) 상
왕조를 개창하면 조(祖), 이어 받으면 종(宗)이었다.
묘호는 천자만 쓸 수 있어, 조선은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중국에 쉬쉬했다.
그런다고 중국이 눈치채지 못했느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내놓고 하지 않는 이상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 나타내지 않는 이상)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임금의) 시호(諡號)는 묘호 뒤에 붙는다.
예를 들어 세종장헌(世宗莊獻)대왕이라고 한다면
처음 세종은 묘호(廟號)고, 장헌(莊獻)은 시호(諡號)다.
묘호는 태조, 태종 등 두 글자지만, 시호는 여러 글자인데,
그 중 처음 두 글자는 조선의 부음을 받고 중국에서 지어 보내온 것이다.
세종장헌(世宗莊獻)대왕의 장헌은 중국에서 보낸 글자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두 글자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에서 보낸 시호 말고, 좋은 글자란 좋은 글자는 다 골라서 더 붙인다.
실록 세종 32년(1450) 2월 22일
존시(尊諡) 올리기를,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는데......
이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가 바로 조선에서 지은 시호였다.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는 당연히 이 조선에서 지은 존호와 묘호는 빠지고
중국에서 받은 장헌(莊獻)으로 표기하였다.
존호(尊號)
앞서 말했지만 묘호(廟號), 시호(諡號)는 죽고 나서야 붙이지만,
존호(尊號)는 살아 생전에 지어 올렸다.
임금이나 왕비라고 다 존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대개 오래 산 대비(大妃)에게 지어 올렸다.
인조의 계비 조씨의 죽은 뒤 시호는 장렬왕후(莊烈王后)지만
살아 생전 존호는 자의대비(慈懿大妃)였고,
영조의 계비 정순(貞純)왕후의 생전 존호는 수경(綏敬)이고
그 며누리 곧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의 존호는 휘목(徽穆)이었다.
이번 문정왕후의 경우 시호는 문정(文定)이지만 존호는 성열(聖烈)
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그 도장은 문정왕후가 생전에 쓰던 것이었다.
이상.
첫댓글 우리 역사의 일부를 알기 쉽게 올려주셔서 모처럼 역사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현실로 돌아와 국새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비리가 들어 났는디 짧은 기간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정치인들의 너도 나도 한몫 챙기느라 국민들의 혈세는 그들에게 끝 없는 노략질 당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