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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오산 이야기(7)
서동에서 벌음동까지
이 원 규
서동저수지 왼쪽은 여들, 오른쪽은 배나무 밭이다. 여들길에 있는 동촌노인정에서 충신정려각 가는 길을 물었다. 바로 건너편 작은 매봉산 중턱에 있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로 올라가니 막다른 골목이다. 옛집들이 많았다. 마당에 빨래를 널어놓은 집에는 인기척을 하여도 사람이 없다. 모두 밖으로 일을 나간 모양이다.
나팔꽃이 빨갛게 핀 아랫집 대문으로 마침 사람이 들어가기에 뛰어가 물었더니 아까 올라갔던 윗집 밭머리에‘이상재 충신정려각’은 있었다. 노인은 안내하겠다며 절룩거리며 나오신다. 간신히 만류하고 올라갔다. 정려각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앞에 있고 밭에는 고추를 심어놓았다. 이상재 선생 정려각은 1815년(순종15년)에 세워졌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당시 충청간사 정세규의 부관으로 있던 선생은 적의 화살을 맞으며 최후까지 싸운 충신이다. 매봉산 부평이씨 선영에 묻혔으며 1996년에 세운 시비도 있다. 시제는 매년 음력10월10일에 지낸다고 11대손이라는 이하진(73세) 옹은 말한다.
당잿길을 내려와 길을 건너 다시 노인정이 있는 논둑길을 걸었다. 구룡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가장천은 가로질러 흐르고, 머리 위로는 고압철탑이 지나가는 초평뜰로 흐른다. 논두렁에 심은 콩들이 튼실하게 잘도 익었다. 왼쪽으로는 한일농원 후문, 오른쪽은 신동아아파트 뒤편이다. 길옆에 들깨밭이 있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난다. 직진하여 올라가니 커다란 현대식 대문과 담이 산 위로 세워져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낮은 마당에 미륵불이 서있다. 22개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다. 1982년에 창건된 법화종 계열의 사찰이다.
구룡사 뒤편 고개는 뒷자리고개 혹은 여우방굴이라고 부른다. 그 너머 변전소 근처 안산에도 오스카빌 늘푸른주택 건설현장 타워가 높게 올려져 있다. 그 앞으로 변전소와 오산초등학교도 보인다. 햇볕이 잘 드는 위치이다.
다시 뒷자리 고개 길로 올라왔다. 언덕으로 올라가 서동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데 마침 등산객이 지나간다. 신동아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김치관(48세) 씨는 매일 이 길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신동아 아파트를 출발하여 한일농원 사무실 앞까지 약 1시간 코스가 된다고 한다. 비록 잘 닦여진 산책로는 아니지만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서1동 서녘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구룡사 길을 타고 논둑길을 건너 사발뫼 길 입구에 깨끗한 공장이 있다. 올해부터 이곳으로 왔다는 탑산식품이다. 우동과 짜장 소스를 생산하고 있단다.
큰매봉재 마루에 올랐다. 배 과수원이다. 과수원 전체를 그물을 씌워놓고 과실 하나마다 포장한 뒤 허수아비까지 세워두었다. 맥고모자를 쓰고 운동복 상의와 비옷 하의를 입혀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엽총을 어깨에 메고 있다. 필자의 친구 강학배 씨도 30년 동안 배과수원을 경영한다. 가끔 들리면 잘못된 과일이라며 겉보기에는 아무런 흠집도 없는 것 같은데도 질이 떨어진다며 주기도 했다. 하여튼 배 과수원은 신경이 까다롭게 쓰이는 농사인줄로 필자는 인식하고 있다.
서동에서는 오산시를 이끌었던 인재들을 많이 배출한 마을이다. 특히 서1동은 예전부터‘옥박골’이라고 불렀다. 옥(玉)과 박(璞)처럼 귀한 인재가 많이 나올 마을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실제로 유태현 오산시 초대 민선시장, 2대 유관진 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주로 400년 이상을 창원 유씨 집안이 거주했다고 한다. 마을 안쪽에 있는 서촌경로당을 중심으로 북으로 산이 있고 남으로는 논이 있는 분지 형태이면서도 시원스런 마을이다.
몇 그루의 백목련 나무가 유난히 크게 자란 고택이 있어 올라갔더니 뒤편으로 은행나무 묘목이 있는 아담한 집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방기현(50세)는 이 마을에 유명한 서당이 있었다고 귀띔해준다. 70년대 말 쯤에 돌아가신 유풍노 선생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이 마을 뿐만 아니라 정남면에서도 그 선생께 글을 배우기 위해 이곳 서당까지 찾아왔다고 말한다.
서당이 있던 집은 정남면 음양리로 넘어가는 대화곡 고개의 안쪽에 있다. 작고하신 유풍노 선생댁에는 둘째아들이 살고 있으며 외관은 개량되었으나 내부는 옛 서당의 운치가 상상되고도 남았다. 마을의 길과 장구배미 논들이 한눈에 보이고 뒤편으로 산이 막고 있어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러한 마을의 분위기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덕택에 대처로 나가 큰일들을 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서당길 뒷산을 넘으니 넓은 벌판이 훤하게 뚫려있다. 정남면 음양리와 수면리 그리고 망월리로 이어지는 평야지대가 북에서 남으로 황구지천을 끼고 늘어서 있다. 남쪽으로 고압송전탑이 서에서 동으로 지나가고 있다. 필자의 논 10마지기도 망월리 쪽에 있다. 지금은 둘째 동생이 직장을 다니면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예전에는 부모님을 따라 이곳까지 농사를 짓기 위해 욌던 곳이다.
산길을 타고 남쪽으로 걸어가니 한올전원마을이 있다. 그곳에서부터 남쪽으로 1972년 설립된 SK임업 오산사업소가 울창한 숲을 자랑하며 건재하고 있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에는‘서해개발’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필자의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동네 아줌마들은 그 당시 이곳으로 와 나무를 심고 풀을 뽑으며 품삯을 받아 우리들의 학비를 마련했던 곳이다.
18만2천 평의 대지 위에 100여 종의 조경수들을 가꾸고 있다.‘오산사업소’라는 정문의 현판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소장 박용호 씨를 만났다. 그러나 행정구역상으로는 대부분 화성시 땅이라는 말을 전해준다. 명함을 건네받고 보니 오산사업소이긴 한데 주소가 정남면 음양리로 되어 있다.
SK임업 오산사업소 숲길을 따라 벌음동 쪽으로 향했다. 울타리를 야쪽으로 오산과 화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길이다. 양문교회 첨답이 보인다.
장지네골 혹은 장천곡이라고 부르는 언덕이다. 장뚝길을 넘어서니 베이스모텔과 사랑채 토속음식점 사이에 이천서씨들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탑동으로 넘어가는 타마루 쪽에도 선영은 있다며 서훈택(74세)옹이 약도까지 그려주었다. 이곳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열녀 서랑의 묘가 있다. 세로로 눕혀 세운 묘비명을 옮겨 적는다.
만고 열녀 서희 지묘(萬古 烈女 徐姬 之墓)
병자호란 때에 오랑캐에 굴복치않고
오랑캐의 손이 닿은 유방을 스스로 도려내고
순절하신 열녀 이곳에 영면하시다
1985. 10.
이천서씨 벌음리 종중 건립(利川徐氏 伐音里 宗中 建立
오랑캐(여진족)들이 벌음동에 쳐들어와 서희 장군의 후손인 서봉학 공은 부원수로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한다. 그들은 약탈과 부녀자 폭행을 일삼았다. 서랑의 집에도 그들이 들어와 강제로 서랑을 껴안고 젖가슴을 주물렀다. 서랑은 물로 씻고 또 씼었으나 오랑캐에게 능욕당한 그 더러움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은장도로 가슴을 도려내고 순절한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열녀문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서랑의 부친이 패전 장수였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후손 서훈택 옹은 말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며 서랑의 정절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재조명되었으면 좋겠다고 말끝을 흐린다.
다시 남쪽으로 걸었다. 오산과 화성시의 경계구역 삼거리이다. 서쪽으로 가면 발안, 남쪽으로는 시원스럽게 뚫린 남부대로를 타면 갈곶동 앞에서 1번국도와 만난다. 이조가구 할인마트 삼거리 모서리에 측량표(수준점)이 있다.
국토의 높이를 현지에 보존하고 표현하기 위하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설치 ․ 관리하는 국가 중요 측지시설이다. 수준점에 대한 설명 입간판을 옮긴다.
이 점의 높이는 인천항의 평균수면(높이 0.0m)을 우리나라 높이의 기준(출발)으로 하고, 그곳으로부터 이곳 측량(수준점) 표석 상단면까지의 높이를 정말 수준 측량방법으로 측정하여 산출한다.
H = h1 + h2
H : 측정점의 높이
h1 : 평균 해수면으로부터 수준점까지의 높이
h2 : 수준점으로부터 측정점까지의 높이
필자가 수준점에서 오산시를 내려다보니 고층건물의 중간지점까지가 같은 높이로 보였다. 오산시의 지대가 확실히 낮은 것은 확실하다. 옛날에 배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이곳에 와서 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동쪽으로는 신동아아파트와 이림아파트가 보인다. 초평동사무소 앞에 벌음교가 있다. 논이 있는 서동쪽 길로 내려갔다. 저수답 양쪽의 여들길은 황금빛 완연한 가을의 색채이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430년의 팽나무가 있다. 생김새가 버섯 우상 모양으로 퍼져있는 보기 좋은 나무이다. 남쪽으로 뻗은 가지는 제 힘을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있다. 철재 버팀목을 세워 보호하고 있고, 조그만 정자도 세워놓았다. 그 곁에 둥치의 밑 부분이 벌어진 커다란 음나무도 꽤 오래된 나무이다.
벌음동의 지명 유래는 풍수지리에서 음양의 이치에서 산의 지향이 벌어져 있고 여성의 음부를 닮아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어 양기를 차단했다는 설과 음나무가 많아 떼 벌(筏) 자를 써서 벌음리라는 주장도 있다.
북서쪽을 막고 있는 정원수 농장의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현재 초평동사무소가 있는 곳은 오산에서 최초로 천주교가 시작된 공소가 있었던 곳이다.
허리가 자꾸 줄어들더니
구멍을 두 칸이나 조여도 헐렁하다
기성복 바지춤 하나
편안하게 추스르지 못하는
가엾은 허리
얼음장 밑으로
말고 깨끗한 냇물 소리 간간이 울린다
고층 아파트 뒷길로 올라가면
깎아내린 산마루가 보인다
송전탑이 높게 자리 잡았던 곳이다
회관 아랫목에 모여앉아 시간을 죽이며
컬컬한 막걸리를 돌리던 남정네들
밤도 깊어
사타구니 축축하게 녹아내릴 때쯤
은은하게 울음 울던 전깃줄
그 거문고 소리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이원규 시 <송전탑이 있던 자리>
첫댓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