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사우(山地祠宇) 원계서원
그곳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의로운
의사(義士)의 그리움이 있다.
○ 위치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95-10
○ 지정 대상 문화재 : 서원형 목조기와 한옥
○ 지정 대상 점수 : 5동
○ 조성 시기 : 붙임과 같음
필자는 구비문학(口碑文學)을 전공한 전직 박물관장 출신이자 민속학예사이다.
오늘은 경산지방에 팔공산(八公山)자락과 연이은 환지봉(還芝峯) 위에 사방 빽빽한 삼림(森林)으로 가린 듯 은연지중(隱然之中) 한 원계서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본 고는 산지사우(山地祠宇)의 비지정문화재로 건축물은 상세도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하였음을 덧붙인다.
원계서원(遠溪書院)은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95-10번지에 소재한 1900년대 초기 서원(書院) 건축양식으로, 본 원계서원(遠溪書院)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義兵) 창의(倡義)로 순절(殉節)한 양오당(養吾堂) 송응현(宋應賢) 선생 부자(父子)를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사후(死後) 300여 년이 지난 1927년에 지방 사림의 공의(公議)에 의하여 지어졌다.
서원의 입구 우측에는 입향조(入鄕祖)인 남계 송공 추모비가 있고, 정문(正門)은 솟을삼문 형식으로 축조한 후 선생의 유업을 기려 이를 충의문(忠義門)이라 편액(扁額)하였다.
충의문(忠義門)이란 편액이 걸린 솟을 산형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 사이에 강당(講堂)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강당(講堂)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며, 평면(平面)은 가운데의 2칸 대청(大廳)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단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좌측방은 집의당(集義堂), 우측방은 경의재(敬儀齋)라 하였다.
가구(架構)는 삼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당(祠堂)은 강당 뒤의 경사진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위에는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두고 있다.
평의문(平大門)으로 이루어진 내 삼문(內三門)에 들어서면, 서원의 우측은 봉성실(奉誠室)로, 편액한 협실(夾室)이 있으며, 정당과 협실 사이 길을 따라 뒤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양오당 송응현(宋應賢) 선생과 양곡 송걸(宋傑)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충덕사(忠德祠)가 있다.
충덕사 평면(平面)은, 전면에 툇간(본채 뒤 퇴칸마루 놓기)을 두지 않고, 내부를 모두 통간(通間)으로 구성하고, 기둥은 정면과 측면에만 원주(圓柱)를, 기둥 위에는 이익공으로 장식하였으며, 가구(架構)는 대량(大樑) 위에 동자주(童子柱) 대공(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설(長舌)를 받게 한 삼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맞배기와집인데 양측 박공면에는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원계서원에 배향되는 양오당(養吾堂) 부자는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사희(士希), 호는 양오당(養吾堂)이고, 아들 송걸(宋傑)의 자는 관옥(冠玉), 호는 양곡(陽谷)이다.
송응현 선생은 일찍이 조정에서 관직에 봉직하다 만년에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악산(華岳山)에 전거(奠居)하였다. 선생은 이곳에 양오당(養吾堂)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아들 송걸과 함께 화악산(華嶽山)에서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왜적(倭敵)과 맞섰으나, 결국 부자가 중과부적으로 함께 의사(義死)하였다.
이로써 1605년에 부자(父子)가 나란히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원계서원이 자리한 현 경산시 와촌면 계전리는 1791년 선생의 후손인 은진 송씨 남계 송경윤 선생이 최초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 서원은 1927년에 지방 사림의 공의로 건립되었다. 본 건축물의 배치 구획은 모두 2단으로 1단은 후손들과 지역 유생들의 자유로운 활동구획으로, 2단은 토담을 경계로 세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신역(神域)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1단의 서원 건축물 배치 양식은 동시대 서원 건축물의 배치 형식을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弓”자 형식으로 기획하여 담장 밖에서 들여다보면 서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인지할 수 없도록 구성되어 있고, 비교적 좁은 공간이지만 경내에 들어서는 산형 대문을 비롯해 모두 6칸으로 이어진 충의문은 마치 조선 하대의 건축양식을 꾸밈없이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특히 뒤편 4칸의 강당과는 처마 끝에 낙수(落水)를 한곳으로 끌어모으는 형식을 도입하였으며, 강당의 내부는 4칸 툇마루를 두어 필요시 통문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이는 1900년대 초기 서원 건축양식으로 본이 될 뿐만 아니라, 특히 가구(架構) 구조(構造)의 소박함에서 독창성이 있다.
또한 제의(祭儀) 시 크고 작은 일을 맡아 처리하는 봉성실(奉誠室)은 모두 3칸 겹집에 툇마루를 두었으나, 방 6개를 동시에 통문(通門)할 수 있는 건축 형식을 활용하였음은 동시대 작품으로 그 배치 기법이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2단의 충덕사로 들어서는 내삼문은 40cm 달하는 사각 주춧돌 위에 앉듯이 올려놓은 삼문(三門)은 마치 작은 성문을 들어서듯 남북으로 2m 높이의 담장을 가로질러 그 안이 신역임을 구획하고 있어 경외감(敬畏感)이 있다.
신역 안에 충덕사는 3칸 겹빕의 통문으로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아놓았다.
목재에는 흑단청을 하였고, 풍판에는 붉은색 단청과 그 안에 벽체는 백색으로 미장하였다. 정면의 처마에는 2단의 처마 부분에는 부연(附椽)과 서까래를 얹었다.
앞면에 단 3개에 문틀에는 모두 6짝의 문을 달았고, 매 문짝에는 4분하여 아래로부터 위로 1, 2, 3단은 얇은 나무판을 조각으로 마루를 놓듯 이어 외부와는 단절시키고 그 위에 마지막 부분은 “정(井)자형 문살을 달고 그 위에 창호지를 붙였다. 4방 10개의 주춧돌은 모두 50cm 화강석 위에 둥근 원기둥을 세우고 맞배지붕 좌우측에 단 풍판은 균형감을 주고 있다.
또한 이는 산지에 축조된 서원(書院) 건물로, 비교적 습한 공간이지만 서원 내부에는 나무를 심지 않아 스스로 온습을 조절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부함으로 100여 년에 가까운 목조건축물로서는 비교적 보존이 원만 한편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원계서원의 고건축 양식은 비록 100년이 체 되지는 않았지만, 건축양식의 독창성은 물론, 무엇보다 임란 창의 의사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우(祠宇)로 다양한 평가가 요구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하지만, 목조건축물의 한계가 100년이라면 이는 무엇보다 지붕 위에 놓인 기와의 무게로 자칫 번와 시기를 놓치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도괴(倒壞)되거나 훼손(毁損)될 위험 또한 간과할 수 없는바, 이를 지방문화재로 지정 체계적인 보존방안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경산자치신문 문화부 국장 김 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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