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성격이 나쁘다’고 말했을지라도, 사실 그 말은 나를 상처 줄 만한 실체성을 지닌 말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람의 관점을 서술한 말에 불과하다. 그 사람의 관점에서, 그것도 아주 제한적인 관점에서, 나의 어떤 특정 행동을 보고 ‘성격이 나쁘다’고 말 한 것일 뿐,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면에 부정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 모든 사람들 볼 때 부정적으로 보곤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성격 나쁘다’고 한 그 말이 더 큰 문제인가? 아니면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계속해서 그 말로 반복해서 상처받고 있는 내 마음이 더 큰 문제인가? 그 말을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고 말 것인지, 그 말에 빠져 큰 상실감을 두고두고 가질 것인지는 언제나 나 자신이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즉, 그 주도권은 언제나 육외입처라는 외부 대상에 있지 않고, 늘 나 자신에게 있다.
바깥 대상인 육외입처는 언제나 끊임없이 변화한다. 언제나 비도 오고 눈도 오고 좋은 날씨도 있다. 욕하는 사람도 있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향기도 있고 나쁜 향기도 있으며, 좋은 감촉도 있고 나쁜 감촉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고 삶이다. 그것은 전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황일 뿐이다.
그 자연스러운 상황에 ‘나’를 개입시켜 놓고, 나를 중심으로 적과 아군을 만들어 놓은 채, 온갖 해석, 판단, 분별을 가함으로써 괴로운 상황 혹은 즐거운 상황으로 꾸며내는 주인공은 바로 육내입처라는 허망한 의식인 것이다.
이처럼 육근이 육경과 접촉할 때 육근을 ‘나’라고 실체적으로 생각하고, 육경을 ‘외부’라고 실체적으로 생각하여, 십이처라는 허망한 의식을 만들어내면 거기에서 괴로움이 생긴다. 이와 같이 육내입처라는 아상이 생겨날 때 모든 괴로움이 연기하는 것이다. 사실은 육내입처도 육외입처도 허망한 의식일 뿐이다. 일체 삼라만상 세계 전체가 곧 내 마음이 만들어낸 허망한 의식일 뿐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