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공산당은 1982년 개정헌법에 명기된 5년 중임의 임기 규정을 파기하고 습근평(習近平, 시진핑) 주석에게 종신집권의 길을 터줬다. 등소평 지도 아래 채택된 5년 중임 임기규정은 실상 모택동식 일인지배를 막기 위한 헌법상 안전장치였다. 등소평 지배 이후 거의 30년 유지된 중국 특유의 집단지도체제가 이제 안전장치를 상실한 채 바야흐로 일인지배체제로 전환되고 있다. 홍콩 자유언론(Hong Kong Free Press)은 공산당의 그 결정을 “대약진”(Great Leap Forward)에 빗대 “대후진”(大後進, The Great Leap Backward)이라 조롱한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1958-1962)은 인류사 최대 규모의 대기근을 초래했다. 습근평이 이끄는 “대후진운동”은 과연 중국의 미래에 어떤 일을 불러올까?
모택동의 이념과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을 흔히 마오주의자(Maoist)라 부른다. 현재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자체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재건운동을 추진하는 좌파 계열과 중국식 자본주의를 인정하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우파 계열이다. 습근평은 권력을 잡기 무섭게 사회주의 혁명 재건을 내걸고 모택동사상의 부활을 주도하던 중경(重慶)의 맹주 박희래(薄熙来, 보시라이, 1949- )를 부패혐의로 걸어 종신형에 처했다.
당시 박희래(보시라이)의 중경 모델은 사회주의 정책의 복원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겐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는 범죄와의 전쟁을 개시했고, 복지재원을 확충했으며, 두 자리 수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문혁기의 홍위병 문화를 부활시키려 했다. 그런 그가 부패혐의로 종신형에 처해지자 중국의 몇 안 되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새 정부가 좌파 마오주의에 맞서는 자유주의 개혁의 시발점이라 희망했었다. 습근평은 그러나 서구식 자유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중국몽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는 일당독재의 전체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언론·출판 검열, 대민감시, 사상통제 면에서 그는 현재 모택동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출범 초기로 거슬러 가보자. 2012년 11월 습근평은 정무국 상임위원 아홉 명의 선택을 받아 중공 총서기의 지위에 올랐다. 이듬 해 3월 그는 전국인민대표 회의에서 약 3천 명 대표단의 투표를 거쳐 (반대 1 명, 기권 4명, 그 밖의 전원 찬성)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2013년 1월 5일 그는 중국현대사에 관해 묘한 한 마디 선언을 남긴다.
“개혁개방 (1978- ) 이후의 역사를 들어 개혁개방 이전의 역사시기를 부정할 수 없으며, 개혁개방 이전의 역사를 들어 개혁개방 이후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
모택동 집권기(1949-1976)와 등소평 집권 이후 (1978- )의 역사를 동시에 긍정하는 절충사관 쯤으로 보이지만, 실은 문화혁명에 관한 등소평 집권기의 공식입장을 뒤집는 중요한 발언이다. 1981년 중공 중앙위원회의는 “건국 이후 28년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혁의 궁극적 책임을 모택동에 묻고 있다.
"문화혁명(1966년 5월-1976년 10월)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 모두가 겪은 가장 극심한 후퇴와 심대한 상실을 초래했다. 문혁은 모택동 동지가 시작하고 지휘했다." (건국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
“개혁개방 이후의 역사를 들어 그 이전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습근평의 입장은 모택동의 복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등소평 개혁개방 이래 먼지 쌓인 책장 속에 유폐됐던 “모택동사상”은 현재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듯하다. 국내외의 반발과 조소를 무릅쓰고 종신지배를 부활시킨 습근평이 바로 “마오주의자”인 셈이다. 도대체 왜 중국공산당은 왜 하필 지금 이때 모택동의 망령을 불러내야만 할까? 답은 바로 1954년 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헌법에 놓여 있는 듯하다.
2. 중공 정부의 스탈린화(Stalinization) 과정
스탈린은 1949년 7월과 1952년 10월 모택동에게 신(新)중국에 어울리는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라 권한다. 스탈린의 거듭되는 강요에도 모택동은 헌법 제정에 큰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당시 스탈린은 동독과 폴란드를 제외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소련식 일당독재 헌정질서를 확립하고 있었다. 1949년 유고의 조지프 티토(Josip Tito, 1892-1980)가 스탈린식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3년 후 (1952년 7월) 폴란드에서도 스탈린식 헌법질서가 확립되자 경쟁의식을 느낀 모택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제헌(制憲)을 추진한다.
모택동의 발의에 따라 1954년 9월 15일 북경에선 전국인민대표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스탈린 사후 1년 6개월 후의 일이다. 인민대표회의에는 그해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1211명의 대표단이 참여했다.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췄지만, 대표로 입후보한 대다수는 이미 공산당원들이었기에 공산당 전당대회나 다를 바 없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1954년 9월 20일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중국 헌법의 모태는 1936년 12월 5일 제정된 소비에트 헌법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탈린의 총 지휘 아래 서른 한 명의 특별위원들이 제정한 소비에트 헌법은 흔히 스탈린 헌법이라고도 불린다. 명목상 스탈린 헌법은 인류 역사 최초로 보편적 참정권을 보장하고, 노동권, 휴식권, 여가생활권 등의 광범위한 권리조항은 물론, 의료보험, 노후보장, 주택, 교육, 문화생활의 혜택 등등 사회주의적 이상을 법제화한 파격적인 헌법이었다. 정부 조직의 모든 구성원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규정도 담고 있었다.
이 헌법이 공표되자 사회주의적 이상에 도취해 있던 유럽과 미주의 지지자들은 최고의 민주적 헌법이라 칭송했다. 스탈린 헌법에 보장된 민주적 절차 및 다양한 권리는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에 기여한 스탈린식 전체주의 독재의 시녀일 뿐이었다. 스탈린 헌법의 제정 직후 소련에선 60만의 생명을 앗아간 스탈린 대숙청(1936-1938)의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당연히 소련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권리, 개인의 자유, 민주적 절차는 무시되었으며, 스탈린 사후에도 장시간 사문화되었다.
스탈린 헌법은 연방제를 표방하고 각 연방의 탈퇴권까지 보장하고 있지만, 1954년 중국헌법은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고 지역적 이탈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반면 레닌주의 민주집중제 및 인민민주독재 등의 핵심가치는 스탈린 헌법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했다. 1954년 헌법의 제정으로 중국에서도 스탈린식 공산체제가 확립된 셈이었다. 크게 보면 1948년 시작된 중국의 “정치적 스탈린화”(political Stalinization)는 1954년 헌법제정을 통해 완성됐다 할 수 있다.
습근평 장기집권 프로젝트는 등소평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한 1982년 개정헌법을 재개정해 서 1954년 모택동 헌법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으로도 읽힌다. 5년 중임제의 임기조항을 철폐한 이상 습근평은 모택동에 필적하는 절대권력의 지위를 누리게 될 듯하다. 2013년 중국 지식계를 잠시 뜨겁게 달궜던 헌정논쟁을 살펴보면 습근평 정부의 이념 지향이 읽힌다.
3. 2013년 중국의 “헌정(憲政)”논쟁
2012년 12월, 국가주석으로 선출되기도 전에 습근평은 곧바로 비판언론을 향한 사상탄압의 포문을 열었다. 2013년 1월 광동의 성(省)정부는 개혁성향 주간지 남방주말(南方周末)의 신년사설 “중국몽: 헌정의 꿈”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첨삭해 버렸다. 헌정이란 단어 열여덟 개를 삭제하고 허위사실을 덧붙여 편집자에 보이지도 않고 출판해 버렸다. 이에 반발한 남방주간의 편집진은 수일간 항의시위를 벌였고, 중국전역에선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항의가 수개월 간 이어졌다. 결국 편집진은 갈렸고, 전국의 기자들과 편집자들은 마르크스 언론관에 관한 사상교육의 의무가 부과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그러나 2013년 “헌정”논쟁을 촉발하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
2013년 5월 나는 중국 절강성 항주사범대학에 방문학자로 체류 중이었다. 사천출신 중문학자 마(馬)박사와 함께 캠퍼스 앞길을 지나는데 벽에 푸른 색 큰 글씨의 “창정(創政)”글귀가 눈에 늘어왔다. “창정이란 새로운 정치제도의 창건을 의미하냐?”고 묻자 마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동자를 반짝이며“아마도 최근 일어나는 헌정논의를 의미하는 듯하다”고 대답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헌정”논쟁이 뜨거웠다. “공식망(共識网),” “애사랑(愛思想)”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 영미권의 입헌주의를 중국의 새로운 대안으로 검토하는 일군의 자유주의 입헌주의자들이 지식계에 꽤나 큰 파장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이에 대항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중국 현실에 맞는 새로운 헌정의 원리를 찾아내려 노력하는 전통주의 유가 헌정론자들도 맹활약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기본이념을 되살리려는 신좌파 학자들도 역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습근평(시진핑) 정권 출범 1년 후인 당시 상황에선, 자유주의 입헌주의자들의 담론이 가장 큰 충격파를 던진 듯했다.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중국에서 권력분립, 인권신장, 권리 확대, 법치질서의 확립, 언론 및 표현의 자유 보장, 다당제의 도입 등 이른바 “보편 가치”를 골자로 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대안을 논하는 것 자체가 가히“혁명적”발상이었다.
현실적 위협을 인지한 중국공산당의 기관지들은 그해 여름“헌정”을 주장하는 바로 그 지식분자들에 대해 이념의 포문을 열고 십자포화를 가하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 공산당 기관지들은 서구식 입헌주의가 자산가 계급의 이데올로기라 비판했다. 1940년대 모택동은 여러 계급의 연대에 의한 인민민주독재를 “신민주주의 헌정”이라 정의(定義)한 바 있다. 이 정의에 입각해서 중국 공산당은 서구식 “헌정”을 부르짖는 것 자체가 사회주의 노선을 저버리는 “반혁명”의 일탈이라 비판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민족주의”의 시각에서 “헌정”을 외치는 지식분자들을 또 서구추종자들이라 공격했다. 역사, 전통, 문화의 상이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서양의 가치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5.4운동의 거장 노신(魯迅, 루쉰, 1881-1936) 의 용어를 차용해“가져와 주의(拿來主義)”라 비판했다. 그런 시각에서 자유, 인권, 법치, 권력분립 등의 가치는 중국을 파괴하는 서구적 음모로 인식되었다. 중국의 특수성이 보편가치에 우선한다는 자문화 중심주의이다. 중국공산당이 늘 부르짖는 중국식 민족주의의 발현이었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입헌주의 지식인들을 “자유주의자”들이라 비판했다. 중국 공산당 정권 아래서 자유주의란 사리사욕에 매몰되어 공리를 해치는 음험한 이기주의로 인식된다. 사회주의 헌법에 따르면 국가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최선책을 찾아 집행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집행부이다.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사회주의 헌법 아래서 자유와 인권은 사회주의적 공공선보다 하위의 가치일 뿐이다.
중국 인터넷에 “헌정” 담론이 뜨겁게 달아오를 때 중국공산당은 사상통제의 고삐를 조이고 있었다. 2013년 4월 22일 중공의 중앙판공청(辦公廳)은 비공개 내부문건 “현재 이데올로기 영역 상황에 관한 통보”(이른바 “9호 문건”)를 공산당 산하 기관에 일제히 발송했다. 이 문건에는 이른바“칠불강(七不講)”이라는 논의 자체가 금지된 일곱 가지가 열거되어 있다.
첫째,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서구식 헌정민주의 선양(宣揚)
둘째, 공산당의 동요를 기도하는 보편가치의 선양,
셋째, 공산당 집정의 사회기초를 와해시키는 공민(시민)사회의 선양,
넷째, 중국의 기본 경제제도를 변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선양,
다섯째, 공산당 언론출판 관리제도에 도전하는 서방식 언론관의 선양,
여섯째, 중국공산당의 역사 및 신중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역사허무주의의 선양,
일곱째, 중국특색 사회주의 및 개혁개방에 관한 의문제기
본래 비밀에 부쳐졌던“칠불강”의 내용은 2013년 8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를 통해 외부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이후 사상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20년에 걸친 강택민(江澤民, 장쯔어민, 1926-, 임기 1989-2002)과 호금도(胡錦濤, 후진타오, 1942- 임기, 2002-2012) 집권기에 비하면 현재의 중국은 사상적으로 더욱 위축되고 표현의 자유가 막힌 사회로 변하고 있다. 실제로 보편가치, 헌정주의, 시민사회 등의 “민감한” 단어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널리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엔 이런 단어들 대신“모택동사상”이란 단어가 다시 살아난 실정이다.
습근평은 노골적으로 언론인들에게 정부 비판을 멈추라 요구한다. 2013년 8월 19일 그는 “신문은 정치인이 만든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전통적 매체 뿐 아니라 인터넷과 SNS의 파괴력을 잘 아는 중국정부는 중국의 온라인 세계를 거의 완벽하게 감시하고 있다. 200만 이상의 인터넷 부대를 고용해서 온라인 콘텐츠를 감시하고, 친정부 내러티브를 강화한다. 인터넷 감시와 검열뿐만 아니라 댓글부대를 고용해서 친정부 댓글을 달고 있다. 이 댓글부대는 댓글 하나 당 다섯 전을 받는다고 해서 오모당(五毛黨)라고 불린다. 이밖에도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빈발하고 있다. 대체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4. “나는 황제로소이다”
1935년 1월 준의(遵義)회의에서 모택동은 당권을 거머쥔 후 전군(全軍)을 장악해 명실 공히 중공의 영도자 지위에 오른다. 대장정을 거쳐 섬서성 연안에 도착한 이듬 해, 1936년 2월 해발 1천 미터의 고원에 오른 모택동은 눈 덮인 지형을 살피다가 “북국의 풍광”으로 시작하는 시를 한 수 짓게 된다. 이후 “심원춘·설(沁園春·雪)”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시에는 중국사의 걸출한 황제들을 논하는 대목이 펼쳐지는데······. 오늘날 중국인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이 시를 배우고 읊조린다.
안타깝도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문재(文才)가 부족했고,
당태종고 송태조는 풍류가 모자랐네
일대의 영웅 징기스칸은
그저 활 시위를 당겨 독수리를 쏠 줄만 알았네.
모두가 그저 지난 세월일지니
풍류를 아는 인물을 꼽으려면 오늘날을 돌아봐야 하리.
惜秦皇漢武,略輸文采;
唐宗宋祖,稍逊風騷
一代天驕骄, 成吉思汗,
只識彎弓射大雕。
俱往矣,數風流人物,還看今朝。
이십오사(二十五史)를 즐겨 읽었다는 모택동은 이미 1930년대부터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 징기스칸을 넘어서는 웅대한 "황제몽"을 꾸고 있었던 듯하다. 1954년 제정된 중국식 스탈린 헌법은 모택동으로 하여금 "황제몽"을 실현하는 영구집권을 허락했다.
2018년 5년 중임제를 폐기하여 영구집권의 길을 연 습근평은 아마도 전 세계를 향해 부르짖는 듯하다. “나는 황제로소이다!” 2018년 1월 다시 구속되어 복역 중인 2014년 우산혁명의 주동자 황지봉(黃之鋒, Joshua Wong, 1996- )은 며칠 전 “습황제(Emperor Xi)”란 의미심장한 트윗을 날렸다. 진정 그의 "중국몽"은 "황제몽"이었던가?
과연 오늘날 14억 인구의 중국은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습근평은 집권 초기부터 1981년 당론을 거부하고 문혁시기의 역사를 재평가하려 했다. 건설적인 중국문명 비판을 위해 앞으로 차근차근 문혁의 실상을 더 깊이 돌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