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내 이름을 거룩할 성(聖)과 노예 종(奴), 즉 ‘주님의 거룩한 종’이라는 뜻으로 지어주셨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성종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왕의 이름에서 한자를 빌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부모님은 왕과 정반대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종(奴)이라는 한자를 사용하셨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이나 부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데 있다. 주민등록 등본에는 어떤 공무원이 한자를 잘못 쓰셔서 술병 종(鍾)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늘 고민하던 질문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로마서 1장 1절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종은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에 따르는 삶,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펼쳐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우선순위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학창시절에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와 관련해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가장 먼저 목회자의 길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버지가 개척 교회 목회하면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고려대상에서 제외했다. 중학생 때는 선교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을 비롯해서 여러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들의 삶이 너무 귀하게 느껴졌기에 나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 공부부터 열심히 하라는 부모님의 조언을 수용하여 언젠가 해외 선교를 경험해보겠다는 결심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고등학생 때는 사회복지사를 직업으로 가지면 고민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베트남어 동아리를 하면서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다문화 복지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직업을 통해 보람도 느끼고 이웃사랑도 실천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 정도의 결론이었다. 당시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명확한 해답을 발견해냈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지만, 생각보다 하나님의 계획은 당장 내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학부 생활은 모호함과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전공이 흥미와 적성에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 머릿속에 단순히 선한 일을 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 더해 나보다 지적 역량이 우수하고 열정과 적극성까지 겸비한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열등감과 자기 혐오에 시달렸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나라는 고사하고 사회에 내가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인지조차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창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기에, 불행 중 다행으로 인류학을 복수전공하고 있었다. 사회대 규정대로 졸업하기 위해서는 ‘복∙부전’ 혹은 ‘심화전공’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했는데, 기왕이면 수업을 재밌게 들을 수 있는 분야를 복수전공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류학을 선택했다. 그밖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인류학 수업을 듣다 보니, 수업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편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인류학은 타문화를 해당 사회의 행위자의 시각에서 바라봄으로써 다양한 문화의 존재 가치를 긍정하고, 자신이 속한 문화적 가치들을 절대적 진리로 여기지 않는 문화상대주의적 태도에 기반하여 연구를 수행한다. 인류학의 다원주의적 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연상케 하는데, 이는 교회에서 반기독교적인 세상 문화의 대표주자로 여기던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인류학이 기독교에 적대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인류학 연구들이 반드시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지하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을뿐더러,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주류 문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오히려 성경적이기도 하다.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중에 기독교 인류학 연구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관련 논문들을 읽으면서 인류학 자체는 기독교 복음에 적대적이거나 친화적이지도 않지만, 연구자가 어떤 가치관에 기초해 있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즉,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세상 가치관을 토대로 해석할 수도 있고, 성경적 가치관에 기초해서 하나님 나라 방식에 합당한 연구를 수행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인생 고민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가진다는 차원을 넘어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성경적 가치관, 복음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소화해내는 삶의 방식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과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특히, 학문을 하게 되는 입장에서는 그런 지혜를 더욱 구하게 된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내딛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