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롬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롬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롬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의 전가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