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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장군의 묘에서 역사와 현실을 본다.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45 번지 천태산 남쪽 자락.
김종서(金宗瑞1390~1453) 장군의 묘를 찾았다.
1975년에 대전에 있을 때 답사를 할 것이라고 벼르든 것이 차일피일 37년이 지난 지금에야 간 것이다.
묘소를 들어가는 입구에 김종서 장군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해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최근에 세워져 있고 바로 우측 앞에 홍살문이 있으며 왼쪽에 ㄱ 자형의 농가(農家)같은 집이 관리 사무소라 한다.
비스듬한 산길에 박석(薄石)으로 길을 덮었고 입구에서 길 양편으로 복숭아 밤나무 감나무가 열매를 맺어 가을 기다리고 있다.
약 30m 좌측에 김종서의 명정(銘旌) 현판(懸板), 가로 219㎝, 세로 36㎝이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증시충익공 김종서지문(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贈諡忠翼公 金宗瑞之門)이라고 길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 아들 김승규의
“효자통정대부병조참의김승규지문(孝子通政大夫兵曹參議金承珪之門)”이라 쓴 작은 정려각(旌閭閣)이 7월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숲풀속에 조용히 파 묻혀 있다.
정려각(旌閭閣)은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等)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는 것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희생된 김종서(金宗瑞)의 충절과 그의 아들 김승규(金承珪)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747년(영조 23) 김승규의 명정과, 1804년(순조 4) 김종서의 명정이 내려진 뒤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다.
지금의 정려(旌閭)는 공주시에서 시행한 김종서 묘역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후손인 김기원이 서산에 보관하고 있던 현판을 옮겨와 1981년에 건립한 것이라 한다.
다시 약 3,40m를 올라가면 사진과 같이
“조선좌의정절제김선생종서지묘(朝鮮左議政節齊金先生宗瑞之墓)”라는
작고 오래된 묘비와 함께 김종서 장군의 묘가 있다.
문화재관리청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안내판에는
김종서 장군은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국대학교 역사학자인 남도영(南都泳)교수는 김종서 장군이 1390年에 전남 순천(順天)의 도총제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김종서(金宗瑞) 장군의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때에 6진(鎭) 개척의 위업과, 정인지(鄭麟趾)등과 같이 고려시대의 역사책인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편찬한 업적은 중고등학교 역사책에 나온다.
또한 김종서는, 이직(李稷)과 함께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요즘 같으면 천재 급에 속하는 문신이었다. 정인지(鄭麟趾)가 19세에, 이덕형(李德馨)이 20세에 급제한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빠른 시기였다.
좌의정으로 있을 때 문종(文宗)으로부터 고명(顧命) 대신으로 12세 단종(端宗)을 보호하다가 세조에게 아들 둘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당시에 수양대군 쪽에서 보면 김종서는 역적으로서 시신(屍身)을 온전하게 전부 거둘 수가 없어 한쪽 다리만 이 곳 묘소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종서가 철퇴를 맞고 죽자 그의 아들 김승벽이 아버지의 시신 일부를 말에 싣고 도주하여 공주 대교리에 허겁지겁 장사지낸 후 다시 도주함으로써 이곳이 필재선생의 묘역이 되었던 것이다.
묘소 앞 우측 작은 묘갈(墓碣)은 94cm로 영조 24년(1736)에 세운 것으로 전면에
“조선좌의정절제김선생종서지묘(朝鮮左議政節齋金先生宗瑞之墓)”라 쓰여 있다.
옆에 있는 큰 새 묘비는 1963년 새로 건립한 높이 3m, 너비 50cm이다.
뒷면에는 이곳에 공(公)의 묘소가 있게 된 것은 이곳이 장군의 세장지지(世葬之地) 이고 당시 주민들에 의해 공의 묘소라는 사실이 전해 내려온데 근거하였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마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산 기슭에 있는 고려 충신 최영장군 묘와 비슷한 사연이다.
세장지지(世葬之地)란 조상 대대로 묘를 쓰고 있는 문중의 땅을 말한다.
가운데 묘비는 1963년에 세워진 것으로 이 유적과 김종서의 행적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김종서는 강직하고 엄정하였으며, 옛 제도인 고제(古制)와 의례(儀禮)에 밝았고,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그 위세가 대단하여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한다.
김종서는 학문(學文)과 지략(智略)에 무인(武人)적 기상을 갖추어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도 한다.
오늘 필자가 약 550년전의 역사속의 인물인 김종서 장군의 묘소를 찾으면서 일말의 감회를 느낀다.
300년 만의 복권 !
참으로 긴 세월을 방황한 외로운 원혼(冤魂)이 아니었던가.
영조 22년 12월 27일은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한 김종서와 황보인을 영조대왕이 복권 시킨 날로서 그 후손들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왜 김종서는 죽은 지 300년의 긴 세월이 흘러도 복권이 되지 않았을까?
조선조는 세조에 의해 반정이 성공하자 그 반대편에 섰던 김종서는 세조의 후손들이 왕조를 이어 왔기 때문에 만일에 김종서를 복권시키면 세조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연좌제에 걸려 있던 단종과 사육신의 후손들은 우여곡절 끝에 숙종 때에 신원이 회복되어 관직이 등용된 적은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김종서 황보인등은 영조 때에 와서야 복권이 된 것이다.
영조도 세조의 후손이었기에 김종서를 복권 시키는 데는 명분이 필요했다.
영조는 정치 감각이 뛰어난 왕이라 세조가 그의 아들 예종에게 한 말중에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유훈(遺訓)이 있음을 찾아내게 되어 이 말을 근거로 김종서의 복권을 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종서가 철퇴에 맞아 쓰러진지 무려 293년 후의 일이었다.
역사는 해석에 의하여 좌우된다.
단종이 영월의 청냉포, 그 외진 곳에서 갇혀있다 끝내는 17살의 어린 나이로 죽임을 당한 것은 권력의 반대파를 제거해야 한다는 권력의 냉혹함을 알려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
이것은 묘하게도 500년 전 비슷한 시기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정적은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그대로 실천 한 것이다.
지금까지 배우기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김종서와 세조에 항거했던 많은 단종의 사육신 생육신 들을 진정한 승자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속의 정의는 현실과 많은 괴리(乖離)가 있다.
그렇다면 이 역사적 사실 위에 김종서를 충절의 표상(表象)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한편에서는 조선왕조를 강국으로 만들려는 세조의 현실정치가 있었다.
조선왕조의 현실은 권력에 승리한 세조에 의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조선 왕조의 역사는 경영되어 갔다.
그리고 세조는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문물의 개선으로 조선을 이끌었다.
현실이 그랬다.
그 기간 동안 김종서의 후손들에게 자유로운 삶은 없었다.
오직 충절과 명예 양심으로 그 기간을 버틴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충절과 명예 개인의 양심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오늘 김종서 장군의 묘를 답사하면서
한국의 현대사 5.16을 다시 기억해 보았다.
5.16 군사 혁명은 분명히 민주공화국 헌법에 기초한 권력유지에 역행한 해위였다.
그러나 이 정통성을 훼손한 “새 권력”이 서양에서 300년 동안 걸리는 경제 부흥을 50년 만에 이룩하였다.
역사 속에서 나약한 단종의 조정을 찬탈하여 새로운 조선을 재건한 세조를 비난만 할 것인가
무능한 장면(張勉)의 내각정부를 찬탈(簒奪)하여 헌법을 역행하면서 국민을 배고픔에서 구한 5.16을 계속 유신독재로만 볼 것인가--
역사가 배를 부르게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역사가 주는 교훈을 외면 할 수도 없다.
세조의 왕위 찬탈이든 5.16 혁명이든 진정 백성을 주인으로 모시는 일이면 그것이 정도인 것이다.
이유는 국민이 가장 높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孟子曰(맹자왈)-맹자가 말하기를
民爲貴(민위귀)-지배받는 백성이야 말로 가장 존귀(尊貴)한 자리요
社稷次之(사직차지)-국가의 정승이나 관리들은 그 다음의 자리이며
君爲輕(군위경)-군주(왕)는 가장 가볍고 낮은 자리이다.
是故(시고)-그러므로
得乎丘民而爲天子(득호구민이위천자)-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자라야 천자(왕)가 될 수 있다.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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