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擇里志)》는 조선 영조때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지은 우리나라 지리서(地理書)이다. 사민총론(四民總論),팔도총론(八道總論),복거총론(卜居總論),총론(總論)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각 지방의 풍속, 인물, 지리 등을 논하였다. 이익의 서문(序文)과 정약용의 발문(跋文)은 다음과 같다.
택리지 서문 [擇里誌序] - 이익/성호전집49권
사는 동네를 가린다는 말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로부터 나왔다. 사는 동네를 가리지 않으면 크게는 교화(敎化)가 행해질 수 없고 작게는 자기 자신도 편치 못하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반드시 사는 마을을 가리는 것이다.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하였는데,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바다로 나간다는 것이니, 어찌 가리키는 곳이 없이 한 말이겠는가. 이른바 구이(九夷.동방)에서 살려한다고 말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본래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어찌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탄식을 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이아(爾雅)》를 살펴보니, 구이(九夷)ㆍ팔적(八狄)ㆍ칠융(七戎)ㆍ육만(六蠻)이라는 것이 있다. 설명하는 자가 이름을 나열하며 실증하였으나 틀렸다. 백이(白夷), 황이(黃夷), 왜노(倭奴)를 성인이 어찌 좋아했겠는가. 직방씨조(職方氏條)와 〈명당위(明堂位)〉는 모두 이(夷)를 첫머리로 삼았고, 구(九)ㆍ팔(八)과 같은 수는 지금의 관질(官秩)의 등급에 있는 것과 같은 것에 불과하니, 마땅히 동방(東方)의 태평한 지역보다 나은 곳은 없었으리라.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지고는 여덟 조목의 가르침[八條]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오륜(五倫) 이외에 전해진 삼장(三章)은 한 고조(漢高祖)가 얻어 법으로 요약하여 천하를 안정시켰다. 성인이 뜻은 있었으나 실행하지 않아 우리들로 하여금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교화를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질박함을 숭상하던 남겨진 교화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니, 정전(井田)을 구획(區劃)한 것과 흰옷을 입는 것 등을 통해 여러 가지로 징험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남자가 큰 관(冠)을 쓰고 여자가 머리카락을 땋아 쪽을 찌는 것은 유래한 바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관(衣冠)의 옛 풍속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법이다. 고려 때에 충렬왕(忠烈王)이 첫 번째로 변혁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신우(辛禑) 때에 두 번째로 변혁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비록 몽고(蒙古)의 위압(威壓)으로 변혁하기는 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옛 풍속을 따랐다. 온 천하가 선왕(先王)의 의관을 폐기하였으나 홀로 이곳 조그마한 땅에서 아직도 선왕의 제도를 지키고 있으니, 아,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필시 뗏목을 타겠다는 탄식만 하고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 강토의 내부를 가지고 보면, 땅에는 험한 땅과 평탄한 땅이 있고, 풍속에는 아름다운 풍속과 나쁜 풍속이 있다. 단군(檀君)과 기자의 시대에는 서쪽에 도성(都城)을 정하여 동남쪽이 변방이었는데, 호강왕(虎康王)이 바다로 들어오자 정통(正統)이 남쪽에 있게 되었다. 여러 세대 동안 단절되었다가 신라(新羅)로 통일되니, 그 풍속이 질서정연하게 예절을 지켜 재덕(才德)이 있는 인물이 대대로 나왔으며, 명예와 예법을 귀중하게 여기고 명성과 이익은 천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경전(經典)을 공부하며 초야(草野)에 묻혀 자중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향리(鄕里)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존경하여 벌열(閥閱)과 똑같이 여기니, 나라 안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이 되어 선비 가운데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을 귀의처로 여겼다. 관서(關西)는 백성들이 처음으로 개화(開化)된 지방이지만, 성조(聖朝.조선을 말함)에서 은완(殷頑.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도 주나라에 복종하지 않은 은나라의 유민들)에 비견하여 배척하니, 인재가 재능을 펴지 못하였다. 동쪽의 산골짜기(강원)와 북쪽의 변방(함경)은 문풍(文風)이 진작되지 않았으며, 양남(兩南.지금의 경남과 전남)도 황폐하여 기술(技術)은 뛰어나도 유교(儒敎)의 교화는 찾아볼 수 없다. 경기(京畿)로 말하자면, 일종의 사환(仕宦)하는 가문만이 세상의 흠모를 받으며 그 사이에 끼어 살면서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의식(衣食)이 부족한 곳이면 살아서는 안 되고, 사기(士氣)가 사라진 곳이면 살아서는 안 되고, 무력(武力)이 횡행하는 곳이면 살아서는 안 되고, 사치의 풍조가 성한 곳이면 살아서는 안 되고, 시기가 많은 곳이면 살아서는 안 된다. 이 몇 가지를 가리면 취사(取捨)해야 할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집안(택리지 저자인 이중환은 이익의 삼종손임)의 휘조(輝祖.이중환의 字)가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장황한 수천 마디의 말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산맥(山脈), 수세(水勢), 풍토(風土), 민속(民俗), 재화(財貨)의 생산,수륙(水陸)의 운송을 조리 있게 구분하여 기록하였으니, 이런 책은 본 적이 없다. 나는 늙어 조만간 죽게 될 나이인지라 오소리가 언덕에 사는 것처럼, 쥐가 구멍에 사는 것처럼 포구(浦口)의 습한 땅을 벗어나지 못하니,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돌아보며 탄식만 더할 뿐이다. 이러한 뜻을 책의 첫머리에 기록하여 어린 손자가 보도록 남긴다.
택리지 발문 [擇里志跋] - 정약용/다산시문집14권
《택리지》는 정자(正字)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것으로, 국내(國內) 사대부(士大夫)들의 별장이나 농장에 대한 좋고 나쁜 점을 논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논한다.
생활하는 방도는 마땅히 먼저 물길과 땔나뭇길을 살펴보고, 다음은 오곡(五穀), 다음은 풍속(風俗), 다음은 산천(山川)의 경치 등을 살펴야 한다. 물길과 땔나뭇길이 멀면 인력(人力)이 지치게 되고, 오곡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흉년이 잦게 되고, 풍속이 문(文)을 숭상하면 말이 많고, 무(武)를 숭상하면 싸움이 많고, 이익을 숭상하면 백성이 간사스럽고 각박해지며, 힘만을 숭상하면 고루해서 난폭해지고, 산천이 흐릿하고 험악하면 빼어난 인물이 적고 마음이 맑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그 대체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별장이나 농장이 아름답기로는 오직 영남(嶺南)이 최고이다. 그러므로 사대부(士大夫)가 당시에 화액을 당한 지가 수백 년이 되었으나, 그 존귀하고 부유함은 쇠하지 않았다. 그들의 풍속은 가문(家門)마다 각각 한 조상을 추대하여 한 터전을 점유하고서 일가들이 모여 살아 흩어지지 않는데, 이로서 조상의 업적을 공고하게 유지하여 기반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가령 진성이씨(眞城李氏)는 퇴계(退溪.이황)를 추대하여 도산(陶山)을 점유(占有)하였고, 풍산유씨(豐山柳氏)는 서애(西厓.류성룡)를 추대하여 하회(河回)를 점유하였고, 의성김씨(義城金氏)는 학봉(鶴峯.김성일)을 추대하여 내앞[川前]을 점유하였고,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충재(沖齋.권벌)를 추대하여 닭실[鷄谷]을 점유하였고,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개암(開嵒.김우굉)을 추대하여 범들[虎坪]을 점유하였고, 풍산김씨(豐山金氏)는 학사(鶴沙.김응조)를 추대하여 오미(五嵋)를 점유하였고, 예안김씨(禮安金氏)는 백암(柏巖.김륵)을 추대하여 학정(鶴亭)을 점유하였고,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존재(存齋.이휘일)를 추대하여 갈산(葛山)을 점유하였고, 한산이씨(韓山李氏)는 대산(大山.이상정)을 추대하여 소호(蘇湖)를 점유하였고,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석전(石田)을 추대하여 석전(石田)을 점유하였고, 여주이씨(驪州李氏)는 회재(晦齋.이언적)를 추대하여 옥산(玉山)을 점유(嫡派는 楊子谷을 점유)하였고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여헌(旅軒.장현광)을 추대하여 옥산(玉山)을 점유하였고, 진양정씨(晉陽鄭氏)는 우복(愚伏.정경세)을 추대하여 우산(愚山)을 점유하였고,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인재(認齋.최현)를 추대하여 해평(海平)을 점유한 것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 다음은 호서(湖西)가 뛰어났다. 그래서 회천송씨(懷川宋氏)ㆍ이잠윤씨(尼岑尹氏)ㆍ연산김씨(連山金氏)ㆍ서산김씨(瑞山金氏)ㆍ탄방권씨(炭坊權氏)ㆍ부여정씨(扶餘鄭氏)ㆍ면천이씨(沔川李氏)ㆍ온양이씨(溫陽李氏) 등이 모두 기반을 굳히고서 대대로 현달하였다.그리고 호남(湖南)의 풍속은 호협한 기개만 있고 순박함이 적으므로, 오직 고씨(高氏.霽峯의 후손)ㆍ기씨(奇氏.高峯의 후손)ㆍ윤씨(尹氏.孤山의 후손) 등 몇 집 외에는 현달한 집안이 대체로 적다. 열수(洌水.한강) 위쪽으로는 오직 여주(驪州)의 백애(白厓), 충주(忠州)의 목계(木溪)가 좋은 곳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북강(北江) 연변에 있는 춘천(春川)의 천포(泉浦), 양근(楊根)의 미원(迷源)도 뛰어난 곳이다.
나의 집은 초천(苕川)의 시골인데, 물은 몇 걸음만 가면 길어올 수 있으나, 땔감은 10리(里) 밖에서 해오며, 오곡(五穀)은 심는 것이 없고, 풍속은 이익만을 숭상하고 있으니, 낙원(樂園)이라고는 할 수가 없고, 취할 점은 오직 강산(江山)의 뛰어난 경치뿐이다. 그러나 사대부(士大夫)가 땅을 점유하여 대대로 전하는 것은 마치 상고(上古) 시대 제후(諸侯)가 그 나라를 소유함과 같은 것이니, 만일 옮겨 다니며 남에게 붙여 살아서 크게 떨치지 못하면 이는 나라를 잃은 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초천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