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300)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79) – 고린도전서 강론(23)
고린도전서 강론(23) – 15장 20~34절
15장은 부활이 주제가 아니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주제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나서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우리들의 현실의 삶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죽은(네크로스)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든(코이노스) 자 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면서, 왜냐하면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고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담에 의해 모든 사람이 죽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되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으로 인해서 궁핍의 형벌과 사망의 형벌이 주어지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형벌을 살던 삶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삶으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약속은 이처럼 결핍과 죽음이라는 형벌의 삶을 초월해서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은사 사역에서는 죽음과 사람의 고통을 마귀 탓이라고 오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망은 하나님이 주신 형벌이다. 마귀는 추방당한 인간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첫 열매는 그리스도이고 그 다음은 그분의 재림 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며 이어서 종말인데 모든 통치권과 모든 권세와 모든 능력을 폐지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든 원수들을 그 발 아래에 두실 때까지 다스리셔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그 나라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과도기가 있게 되는데 그 과도기에 운용하던 모든 세상의 작동 시스템, 즉 모든 통치권과 권세와 능력을 다 무효화시키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멸하실 원수는 그 죽음인데, 그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 날이 오면 죽음이라는 형벌 자체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시8:6) 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래에 두어지게 하셨다고 말씀하실 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을 그의 아래에 두신 분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 전체를 관장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어지게 하시면 그 때에는 그 아들도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에 두신 분 아래에 두어지게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도 원래의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최종 모습은 모든 것(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을 타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가린 아담과 하와도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종말 이후 완성이 되면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기도하신 것도(요17:21) 하나님께서 모든 것(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함이다. 저들이 하나가 되어 우리 와도 하나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즉 하나된 우리가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창조하셨던 모습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만약 죽은 자들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하여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말씀은 대단히 난해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마치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자들은 지옥에 가는 것처럼, 죽어도 세례만 받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당시 고린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고린도에는 죽은 사람의 내세 구원을 위해 세례를 받는 이방 종교로부터 온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죽음과 내세와 관련된 두려움에서 종교가 시작되는 것인데, 당시에 그런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가 사후 세계에서 부활된다는 것을 그대들이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아니냐는 논지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만약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으려거든 그 사람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만약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삭발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면 머리를 가리라” 고 권면했던 것이 (고전11:6) 당시 고린도에서는 여자들이 밖에 나갈 때는 얼굴을 가리는 두건을 써야만 했었는데,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여사제들이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삭발을 하고 성관계를 맺는 것이 제사의 한 순서였던 당시에 그것을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일반 여자들도 머리를 자르고 남자에게 보여주는 문화가 있었고 에클레시아 안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던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했던 권면과도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날마다 위험을 무릎쓰는 것이냐고 질문하고 있다. 그것은 죽은 다음에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자랑을 걸고 하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만약 내가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싸르크스의 발동에 의해 살아남기 위해서 에베소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만일 죽은 자가 일으켜지지 않으면 “내일이면 죽을 것이므로 우리가 먹고 마시자” 라고 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죽음의 위기를 겪다가 설혹 죽더라도 그 다음 완벽한 아름다운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먹고 마시자고 할 것인데, 이것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살아가는 생명체의 존재의 이유가 다 무의미하며 이 헛된 사고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넋을 잃고 방황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악한 사귐들은 자비롭고 친절한 삶을 무너뜨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악한 사귐이란 본능에 따라 생존과 번영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정상적인 사람과 사귀면 자비롭고 친절한 삶을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이다. 선한 영향력을 주어서 그들도 자비롭고 친절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깨어나 의로운 삶을 살고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하나가 되어가는 푯대를 향한 삶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윤리 도덕적인 삶이나 예배에 충실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대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려고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그대들의 상태에서 부끄러워하라는 것이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하나 됨이 이 땅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는 것이다. 15장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주제인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연동흠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