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송곳/정병근
이 기억을
모두 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시간이
어찌 지금만일 수 있으리
물방울이 맺힌다
한 방향으로만 걸어온 기억이
마지막 시간을 쥐어짜고 있다
올 데까지 온 기억의 장렬한 최후
결심을 끝낸 물방울이 떨어진다
뒷물방울이 앞 물방울의 목을 친다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나는 머리통
똑, 똑…
맨몸을 던져 바위를 뚫는
저 집요한 기억의 송곳
<시 읽기> 물방울, 송곳/정병근
형체도 없는 기억이 송곳이 되어 온몸을 찔러 밥맛을 없애고 잠을 죽이고 삶의 의욕을 떨어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경험을 해본 일이 있는가? 그 기억을 견디기 위해 기억의 원인인 몸을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는가? 그 고통의 순간이 지나가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을 지나온 적이 있는가?
그 고통이 세상의 다이고 내 삶의 모든 것 같은 순간, 그 고통 때문에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순간. 나라는 인간과 삶도 그 고통 앞에서는 휴지 조각처럼 느껴지는 순간. 이런 고통이 나에게 온다면 이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삽날이 목에 찍히자/뱀은/떨어진 머리통을/금방 버린다//피가 떨어지는 호수가/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이윤학, 「이미지」 부분)
시골에서 삽을 들고 일을 하다 뱀을 만나다면 본능적으로 삽으로 공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머리통이 떨어져도 바로 죽지 않아 어딘가로 가려고 맹렬하게 꿈틀대는 상황, 그래도 “피가 떨어지는 호스” 같은 몸으로 어딘가로 가야하는 상황. 고압 호스로 물을 뿌리다가 호스를 놓치면 호스가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댄다. 물의 압력은 높은데 그 압력을 꽉 잡아줄 손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통 떨어진 뱀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 죽은 것과 다름없는데도 삶의 본능이 살았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분출하여 머리통 없이 어딘가를 가야 하는 상황,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방향도 없이 내둘러”지는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통은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는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면 더 괴롭다. 알면 고통은 한결 견디기가 쉬워진다. 머리통 떨어진 뱀은 내면의 정체불명의 고통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볼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된다. 허구이지만, 운이 나쁜 뱀은 시인 대신 그 고통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이 고통일 때 괴로운 것이지 남의 고통이 되면 불구경처럼 재미있어진다. 불편하고 끔찍한 즐거움이긴 하지만.
이 시는 자신의 고통을 곧 떨어지지 직전의 물방울에 담았다. 고통의 기억이 올데까지 와서 더는 견디기 어려운 순간, 몸을 죽여야만 그 고통이 그칠 것 같은 순간을 시인은 “한 방향으로만 걸어온 기억/마지막 시간을 쥐어짜고 있다/올 데까지 온 기억의 장렬한 최후”라고 표현하고 있다. “뒷물방울이 앞 물방울의 목을 친다/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나는 머리통”은 바로 몸을 죽여서 그 고통을 없애는 상상이다. 시인은 마음속에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 제 몸을 죽이는 상상을, 수백 번은 했을 것이다. 사람은 현실에서는 단 한 번 죽지만, 상상 속에서는 백 번도 천 번도 죽을 수 있다. 부드럽고 약한 물방울은 그 수많은 상상의 리허설을 통해서 송곳으로 단련된 것이다. 바위를 뚫는 송곳으로 변형된 것이다. 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세기에 무딘 물방울이 송곳처럼 바위를 뚫을까? 시는 물방울을 재련하여 송곳으로 만드는 상상의 연금술이다.
진정한 고통은 담배 한번 피운다고 술 한잔 먹는다고 욕 한번 한다고 주먹질 한번 한다고 없어지지는 않는다. 마음을 수백 번 찢고 마음으로 셀 수 없이 죽어봐야 심장에 죽음의 흔적을 남기며 겨우 그치는 척하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이 변형시킨 고통은 상상력이 빚은 사리라고 할 수 있겠다.
―김기택,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다산북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