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시)
그림자를 옮기는 시간
이미화 지음|푸른사상 시선 184|128×205×8mm|136쪽|12,000원
ISBN 979-11-308-2117-7 03810 | 2023.11.30
■ 시집 소개
마음속에서 열매처럼 익어가는 시편들
이미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림자를 옮기는 시간』이 <푸른사상 시선 184>로 출간되었다. 불행과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이 시집에 펼쳐진다. 세상의 갈피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을 사랑하고 보듬는 마음이 열매처럼 익어간다.
■ 시인 소개
이미화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시집으로 『치통의 아침』이 있다. 현재 경남 진주에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 목차
제1부
옷이 울다 / 사과의 힘 / 젠가 / 망고 / 체리의 기분 / 책갈피의 기준 / 뒤꿈치에 관한 명상 / 떠들썩팔랑나비목도리 / 앵무새 지니 / 익스프레스에 관한 리뷰 / 하나미용실 출입기 / 모델하우스 / 말발굽을 보다 / 해바라기는 한번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는다 / 진주시 하대동 폴리텍대학 앞 새로 생긴 옷집에서 든 생각 / 거꾸로 매달린 것들에게선 맑은 소리가 난다
제2부
바람의 언덕 / 그녀는 리폼 나라로 간다 / 춤추는 망고 / 별을 심다 / 우리들의 노래방 / 상복 / 벚꽃 / 난로의 비밀 / 목련나무 기록장 / 집을 삶아 먹다 / 열대어 / 양은 냄비 / 까치의 주거학개론 / 푸른색과 노란색 / 우리 헤어져
제3부
해변의 포즈 / 주공아파트 위에 뜬 달 / 비 그친 오후의 마당에 우산을 펴서 말리다 / 노랑의 안쪽 / 편의점 의자 / 동백꽃 무늬 담요 / 유등 / 블러드문 / 문어꽃 / 맨드라미들의 노래 / 천일야화 / 꽃양귀비를 찍다 / 딸과 귤 / 느린 우체통 / 초전실내체육관 청소원 순금 씨
제4부
살구 한 알 / 초록색 페인트 / 산동(散瞳) / 구멍가게 / 흑백사진 / 두물머리 /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 오븐의 온도 / 어디로 배달할지 몰라 그냥 들고 있는 택배처럼 / 민어 / 문어 / 공갈 신발 / 갤러리 수업 / 소곡리 / 달리아가 있는 저녁 / 갓바위 눈꽃 / 왕자팔랑나비 / 저녁의 우물
작품 해설 : 한 채의 온기- 박동억
■ '시인의 말' 중에서
내 일은 남의 집 초인종을 눌러야만
먹고사는 일이다.
내가 누른 초인종 소리를 한데 모은다면
작은 암자 종소리만 할까?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할까?
낡은 트럭 스피커에서 울리던
과일 장수 목청과는 또 어떨까.
■ 추천의 글
이미화 시인은 이쪽 모서리에서 저쪽 모서리로 제 그림자를 옮기는 나무를 따라 걷는다. 나무의 뒤꿈치를 종교처럼 바라보면서 우물물을 마시고 미용실에 들러 푸념 가진 사람들과 북적거리고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의 신발이라고 여기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오르내리며 별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초록색을 칠한다. “가계부를 적다/한풀 더 꺾여버린 여자”(「해바라기는 한번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는다」)의 눈물을 꺼내 비 그친 오후의 마당에 펴서 말리며 거꾸로 매달린 것들을 노래한다. 하늘의 텃밭을 호미로 고르면서 어머니가 좋아하던 별을 한 소쿠리 심고, “노란 밀밭에서 푸른 힘줄을 보이며 밀을 베는 백 년 전쯤의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고 싶”(「푸른색과 노란색」)어한다. 화물차 안에 놓여 있는 목장갑과 먹다 만 찐빵, 저쪽 모서리에서 들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발견하고 유등의 불빛이 난로처럼 비추어지기를 기도한다.
― 맹문재(시인·안양대 교수)
■ 작품 세계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미학 이론』에서 칸트의 ‘무목적적 합목적성’이라는 관념을 곱씹으며 말한다. “예술 작품은 칸트의 훌륭한 역설적 공식에 따라 ‘무목적적’이다. 즉 자체의 보존이나 생활에 유익한 의도를 추구하지 않고 경험적인 현실과 분리된다.” 이때 ‘경험적인 현실’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생활세계라면, ‘경험적인 현실과 분리된’ 예술은 공상적인 영역이다. 공상은 현실로부터 우리를 달아나게 한다. 그것은 타인과 합의해야 하는 세계로부터 나 홀로 입법하는 세계로 달아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필연적인 예술의 ‘주관화’가 예술의 한계가 아닌 예술의 탁월함이라고 강조한다. 진리는 총체적 인식이 아니라 주관의 변증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 쉽게 말해서 진리는 한 사람의 깨달은 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소란스러운 방백에서 솟아오른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관점을 벗어나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옮아간다면, 우리는 미적 거리라는 관념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행하는 역학에 관해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겠다. 시인의 미적 표상은 그의 가슴속에서 무엇을 승화하고 무엇을 억압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비추어 이미화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면 어떨까. 일단 이 시집에서 반복하는 주요한 비유가 있다. 마음은 열매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열매라는 심상이 이 시집의 미적인 역설을 만들어낸다고 전제해보자. 다시 말해 그것은 마음을 반쯤 드러내는 동시에 반쯤 감춘다. (중략)
무엇보다 이미화 시인이 그리는 아름다움의 표상들은 사람의 체취를 간직하고 있다. 아니, 뒤집어서 말하는 편이 이 시집에 대한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애초에 사람 자체가 시인이 좇는 아름다움이다. “앞사람 뒤꿈치는/종교다”(「뒤꿈치에 관한 명상」)라는 문장처럼 사람이 삶이라는 길을 전진하게 만드는 동력은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원천이 사람일 수 있음에도, 시인은 “누가 꺼내주지 않으면/생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해바라기는 한번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는다」)라고 쓴다. 한 여자가 그가 놓인 가정과 그를 둘러싼 가족 때문에 절망에 빠졌다고 말하는 대신 그 여자에게 손 내밀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이미화 시인의 문법이다.
― 박동억(시인) 해설 중에서
■ 시집 속으로
젠가
우리는 나무 평상에 앉아서
방금 옆자리에서 백숙을 먹다 화투패를 돌리는 사람들처럼
닭들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그래 내기니까
집중해야 한다니까
닭보다 내기에 더 마음이 쏠렸다
주인은 털이 잘 뽑힌 닭은 두 시간째 찜솥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두 시간은
나무가
평상 이쪽 모서리에서 저쪽 모서리로 그림자를 옮기는 시간
패를 잘못 빼거나 실없이 옮기면
둥근 손 안에 쥔 젤리처럼 쫄깃한 맛들이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빼고 쌓고 무너지고 다시 쌓고 빼고
압력솥이 신나게 추를 흔들며 김을 뿜는다
뒤꿈치에 관한 명상
올림픽 장거리 선수들이 달린다
하나같이
앞사람 뒤꿈치를 보며 달린다
다리뿐인 홍학 같다
앞사람이 왼발 거둬 가면
뒷사람은
재빨리 그 자리에 왼발 던져놓는다
매스게임처럼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저 홍학들
아슬아슬한데,
달리다 홍학이 홍학을 밟아 넘어뜨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앞사람 뒤꿈치는
종교다
경전은
오래 달릴수록 아래를 보고 앞사람 뒤꿈치를 보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다리만 내뻗는 선수들
네 왼쪽 뒤꿈치가 있던 자리에
내 왼발이 착지한다
맨드라미들의 노래
시각장애인들에게 내 친구는
노래를 가르친다
햇살의 혀에 달린 노래로
담장 아래 핀 맨드라미들
열정적이다
눈먼 사랑을 선곡해온 선생님 민망할까 봐
여기는 다 눈먼 사람뿐이라며
교실 안 화르르 꽃 피우는 사람들
더워서 옷 벗는 것도 이곳에선 개그가 된다
옷 좀 벗겠다는 선생님 말에
아무도 못 본다는 화답
누가 알아요 벗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일지
햇살의 혀끝에서 개그가 만개한다
눈먼 학생들과 척척 죽이 맞는
내 친구가 가르치는 교실엔
노래와 개그가 있다
붉은 맨드라미 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