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넘게 지속된 제국이 멸망에 이른 의외의 이유 / 6/27(화) / 현대 비즈니스
제국은 종교를 이용했고 종교도 제국을 이용했다――.
로마제국이나 오스만제국, 중화제국, 몽골제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는 제국 흥망의 궤적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은 동서 종교가 걸어온 여정과도 겹친다.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는 신자 획득을 위해 제국을 이용해 왔다.
본 기사에서는 비잔틴 제국과 정교회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 본 기사는 시마다 히로시 『제국과 종교』에서 발췌·편집한 것입니다.
◎ 천 년 이상 지속된 동로마 제국
고대 로마 제국은 판도를 넓히고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제국이 너무 넓어지면 전체를 한 명의 황제에 의해 지배하기 어려워집니다. 로마제국에서는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동쪽 영토를, 둘째 아들 호놀리우스가 서쪽 영토를 지배하게 되면서 한 황제가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후 서로마 제국이 곧 멸망한 반면 동로마 제국은 존속합니다. 최종적으로 멸망한 것은 1453년의 일이기 때문에 1000년 이상 계속된 것입니다.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립니다. 비잔틴은 콘스탄티노플의 오래된 이름으로 현재는 이스탄불이라고 불립니다. 이 거리는 에게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중요합니다. 게다가 양안에 콘스탄티노플 거리가 펼쳐진 보스포러스 해협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동로마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지명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고 제1 니케아 공회의를 주최한 콘스탄티누스 1세에서 유래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쪽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건설했고, 이윽고 로마제국의 중심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갑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큰 특징으로는 성벽의 존재를 들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이스탄불에도 세 개의 성벽이 남아있습니다. 기원전부터 성벽은 있었던 것 같지만 대규모 성벽을 건설한 것이 콘스탄티누스 1세였습니다. 그 공사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에게 이어지는데 성벽이 완공된 후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는 성벽을 넘어 서쪽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년)는 콘스탄티누스제 성벽 밖에 또 다른 성벽을 세웠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12m였고 두께도 4.5m에서 6m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벽은 이중 구조로 전투를 위한 장치도 갖춰졌습니다. 바다에도 성벽이 만들어지고 육지벽의 증축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성벽도시가 된 것입니다.
외적을 막기 위해 벽을 쌓는 것은 중국의 만리장성에서도 볼 수 있었고 냉전시대 베를린과 현재 팔레스타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외적은 위협이라는 뜻이겠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됩니다.
다만 성벽이 뚫린 것은 아닙니다. 성문 중 하나가 잠겨 있지 않고 그곳에서 오스만 군이 침입했고, 그로 인해 비잔틴 제국군이 혼란스러워지면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벽은 끝까지 깨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벽은 비잔틴 제국에 생명선이었습니다. 그것마저 깨지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고,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한때 서로마 제국의 영토로 판도를 넓혀갔지만 점차 규모는 축소되어 결국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있는 몇 개의 땅만 남게 되는 형국이었습니다. 도저히 제국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로마 제국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벽이 무사한 한 비잔틴 제국은 존속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1000년에 걸친 제국 존속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다른 길을 간다
비잔틴 제국에서 발전한 정교회는 서쪽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원래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하나였어요. 가톨릭교회는 '공회의'라는 교리를 정해 정통과 이단을 구별할 기회가 있는데, 7회까지는 정교회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교회에서는 공회의라고 하지 않고 전지공회의라고 부릅니다. 제7회 전지공회의는 제2 니케아 공회의로 787년에 열리고 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성상 파괴 운동을 추진했던 인간이 배척되었습니다.
다음 공회의는 869년부터 70년에 걸쳐 열렸습니다. 이 공회의에서 문제가 된 것은 누가 주교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교회에서 주교는 세속의 신자들에 의해 선출되게 되어 있고, 세속의 장인 황제가 주교의 장인 총주교를 지명해 왔습니다. 또한 세속 사람들이 주교로 선출되는 일도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에서 주교가 반드시 성직자 중에서 선택되는 것과 다릅니다.
이는 황제와 정교회의 정치적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게다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신을 빗대 지상 세계의 지배자로 삼는 신학까지 생겨났습니다. 황제는 신에 의해 선출된 자로 제국행정의 전권한, 전군의 지휘권, 최고재판권과 입법권을 장악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교회와 그 정통신앙의 수호자로서 맡겼다'(히로오카 마사히사 『기독교역사3동방정교회 동방제교회』(야마카와출판사))라고 합니다.
또한 황제는 성당의 전용 입구로 들어가 그곳에서 행해지는 봉신례(가톨릭 전례)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고 성당 내부에서 성직자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서 주교와 함께 성체를 배령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흔히 말하는 황제교황주의가 아닙니다. 교회와 관련된 최종 의결은 교회회의에서 이루어졌고 황제에게는 신앙의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 이외에 총주교좌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가 '어머니 교회'로서 기독교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지지되었습니다. 반면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좌가 여러 개 있고, 그 대표들이 모여 열리는 공회에서 모든 의제가 결정되는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황과 같은 권위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고 가톨릭교회와는 다른 조직형태가 탄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