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틀담의 꼽추(Notre Dame de Paris.1956)
영화 '노틀담의 꼽추'는 <레미제라블>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빅토르위고의 1831년 작 <노틀담 드 파리(Notre Dame de Paris)>가 원본이다.
요즘 소설은 시작과 끝이 모두 퍼석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문호 작품답게 도입부와 종결부가 야무지다.
노틀담 탑 어느 외진 구석 벽에 손으로 새겨진 아낭케 (Ananke) 라는 단어가 있다. 누군가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 아낭케 이름을 거기 새긴 것이다. 어떤 스토리 일까? 작품은 이렇게 시작된다.
종결부는 어떤가? 처형당한 매혹적인 집시여인 무덤에서 2년 뒤 서로 껴앉은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하나는 교수형을 당한 집시 여인이고, 하나는 그를 사랑한 꼽추 시신이다.
이것만으로 구성은 완벽하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가 있겠는가? 이런 완벽한 앞 뒤 장치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1923년부터 11편의 영화와 2편의 텔레비전 영화가 나왔다.
그 중 1956년 장 들라누아(Jean Delannoy) 감독이 종치기 역 안소니 퀸(Anthony Quinn), 에스메랄다 역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grigida)를 출연시킨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영화가 가장 유명하다.
이 영화는 남녀 배우 두 사람의 연기가 너무나 띄어나다. 그러나 안소니 퀸의 꼽추 연기도 일품이지만, 지나롤로부리지다의 치렁치렁한 머리결과 늘씬한 허리,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매가 특히 압권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진주서 이 영화를 몰래 본 후, 오래동안 가슴앓이 했다. 에스메랄드를 사랑한 꼽추의 사랑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병상린 짝사랑 동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꼽추가 위험한 종탑 난간에 핀 꽃을 따서 여인에게 바친 것처럼, 망경산의 위험한 절벽 나리꽃을 따와서는 한 사범학교 여학생 집 대문 앞에 얌전히 놓고온 적 있다.
각설하고 '노틀담의 꼽추' 줄거리는 이렇다.
1482년 1월 6일 이 날은 예수 공헌 축일과 바보제가 겹친 날이다. 이 날은 연극이 공연되고 그레브 광장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려는 참에 거지가 나타나 방해하고, 또 추기경이 와서 중단되자, 사람들이 차라리 바보 교황 뽑는 놀이 하자고 외친다.
노틀담의 종치기 콰지모도가 바보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는 꼽추에다 추악한 얼굴, 그리고 종소리 때문에 귀가 먹은 귀머거리이다. 그 장소에 집시 에스메랄다가 나타나자, 부주교 프롤로는 콰지모도에게 에스메랄다를 납치하라고 시킨다. 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공격했으나 역부족으로 근위병 페뷔스 대위에게 잡히고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구해준 페뷔스를 사랑하게 된다. 콰지모도는 형틀에 매여 채찍질을 당하는데, 그때 목 마른 콰지모도에게 아무도 물을 주지 않았지만 에스메랄다가 물을 준다.
두 달 뒤 에스메랄다는 사랑하던 근위병 페뷔스 대위와 밀회를 하는데, 질투심으로 그를 미행한 부주교가 페뷔스 대위를 단검으로 찌르고 달아나고, 에스메랄다는 순시병에게 잡힌다.
그 뒤에 에스메랄다는 근위병을 죽이려했다는 죄로 교수형 형벌을 언도 받는데, 감방에 프롤로 신부가 나타나서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며 같이 도망치자고 하지만, 그녀는 신부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한다.
그 후 콰지모도가 밧줄을 타고 내려와서 그녀를 노틀담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성역이라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어느 날 페뷔스가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에스메랄드가 그를 보고 싶어하자 콰지모도가 그를 데리러 갔으나 페뷔스는 자기는 곧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한편 프롤로 부주교는 에스메랄드와 한편인 거지와 도둑들을 이용해서 성당을 공격해서 에스메랄다를 빼돌리려하나, 콰지모도는 성당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 대들보와 돌을 던지며 저항한다.
그 사이에 부주교는 에스메랄다를 그레브 광장으로 데려와서 자신과 교수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지만 에스메랄드는 교수대를 택하겠다고 한다.
부주교는 군인들을 부르고, 탑에 돌아와 에스메랄드가 교수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웃는다.
그때 콰지모도가 프롤로 부주교를 성 밑으로 밀어 떨어뜨려 죽인다.
콰지모도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2년 뒤에 무덤에서 두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사람은 교수형을 당한 여자였고 한 사람은 꼽추였다.
앤서니 퀸 (Anthony Quinn / 1915 ~ 2001)
멕시코 북부 치와와에서 태어났다. 혁명군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혁명세력이 와해되자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소년 가장이 되어 구두닦이, 신문팔이, 공사장 심부름꾼, 내기 권투선수 등을 전전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소년기를 보냈는데, 그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서 배우학원에 잡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등록한 그는 18세에 < 깨끗한 침대 >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처음 섰다.
1936년 파라마운트픽처스의 단역배우 모집에 응모하여 영화에 데뷔하였다. 이 해에 세실 B. 데밀이 감독한 < 평원아 The Plainsman >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데밀의 양녀인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1940년 할리우드를 떠나 뉴욕의 연극무대로 향했다. 그 곳에서 엘리아 카잔의 눈에 띈 그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았던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고, 1952년 카잔이 감독한 < 혁명아 사파타 Viva Zapata! >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사파타(말론 브랜도)의 동생 역을 맡아 혁명의 조력자에서 술주정뱅이로 타락하는 연기로 1953년 아카데미상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54년 네오리얼리즘으로 세계 영화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 길 >에서 차력사 잠파노 역으로 출연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56년 < 열정의 랩소디 Lust For Life >에 고갱 역으로 8분간 출연하여 주인공 고흐 역 커크 더글러스보다 빛나는 연기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두번째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964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 희랍인 조르바 Zorba The Greek >에서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으로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농부 조르바 역을 맡아 절정의 연기를 보였다.
첫댓글 21세기의 영화도 이런내용의 있으면 좋으련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