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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기원전 232년. 기원전 32 년 ~ 668년 ) 887년간 존속
예맥의 영토는 동은 서만주로부터 바이칼 호, 이에니세이강 오바강 상 유역까지, 서는 다크라마칸 사막을 포함해서 파밀고원까지 이었고, 남(南)은 곤륜산맥으로부터 스아이댐분지를 거쳐서 전한내의 난주와 오르도스를 넘어서 만주까지 달하였습니다. 예맥은 사실상 대륙을 1,000년간 정복하고 지배하며 살았습니다.
예맥족을 대략 분리하여 보면, 예족은 부여, 옥저, 동예, 맥족은 고조선, 고구려, 백제, 한족으로 삼한, 만주, 반도남쪽 지역민을 뜻하며, 예는 해, 새, 동, 쇠, 등의 뜻이며, 맥은 지역을 말하는 성을 뜻하는데, 합쳐 동쪽 나라, 새나라, 새로운 정착사람, 새사람이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일설에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였으며, 한나라와 병립하였으나 시조로 따져보면, 조상이 같은 전욱고양씨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시원은 같다고 보는 것이며, 한나라가 202년, 조나라가 228년, 개국하는데, 고구려는 한나라 개국시 보다 3년 앞서 이미 추모가 부여 기방 패왕으로 나오므로 기존 32년 보다 앞선 209년으로 보는 설인데, 근거로는 초씨 역림과 이밀묘지명을 들고있는데, 당나라 초 위징이 편찬한 ‘이밀묘지명’에는 분명히 고구려 시조 추모가 마지막에는 한나라 황제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기록돼 있다, 라는 설입니다.
여기서 고구려 시조가 한나라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단군조에 있어온 관경제와 관련있는데, 한나라는 전한 한무제가 사이개척을 하는 무리수를 두다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자, 한사군이라는 해외에의 투자를 중재하는 배달화백을 하는 특별구역을 두고서, 북부여와 타협을 하였는데, 북부여를 승계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관경사국과의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전한은 경제적 위기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는 현명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즉 한사군은 관경사국의 소도를 통해서 중국의 황제가 제후국으로 부터 세금을 징수해서 해외에 투자하는 조공 공정을 통해서 투자를 하고, 그 반대급부로 별도의 제권체제 유지비용의 웃돈을 따로 받게 함으로써 봉건체제와 순방체제 상호간의 체제갈등을 승화시키는 장치에 불과하였던 것으로, 관경사국이 대륙에 천년 동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관경사국이 한제족국의 제권투쟁에 중립을 지키는 대신에, 해외의 관경사국에 대해서 대륙의 제권체제 유지비용을 웃돈으로써 보장하였기 때문인 것이며, 이러한 전한의 체제는 왕망이 신나라를 세움으로써 무너지게 됩니다.
일설로 관경제가 단군조선으로부터 부여를 통하여 고구려로 내려오는 사유중 하나는, 지배종족이 유출입과도 관계하는데, 고조선의 상호존중 홍익인간 사상을 스키타이족이 서방으로 전파하고, 이를 다시 그리스에서 스키타이나 제족들이 동진한 사실이 문화의 유사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가령 배달국 환웅족의 새토템과 스키타이 괴조가 있으며, 단군조선의 삼한체제나 스키타이의 삼왕체제, 반농반유목 생활, 스키타이의 새, 개구리, 쥐, 는 고구려 삼족오, 부여 금와왕의 개구리, 신라 소지왕의 까마귀, 노인, 쥐, 고구려, 부여의 일월숭배가 그리스 델로스의 해신 아폴로신(까마귀)과 쌍둥이 누이 달신 아르테미스를, 천제 제우스와 하백녀 보리테우스 강신의 딸 사이의 관계와 북부여 천제 해모수와 하백녀 사이의 관계, 등 많은 사례들이 이 동,서, 의 관계를 말하여 주고있다는 설입니다.
참고로 본래 화하족이라 불리던 한제족은 이 한나라 때부터 한족이라 불려지게 되었는데, 그 배경이 이러한 관경제에 참여하는 한나라가 본래 제족국을 부르는 말인 대한국의 관경제에 참여한다 하여, 소한국의 뜻으로 족명을 한족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는데, 이는 당시 관경제 참여국끼리 오고 간 문서 보따리 봉니가 이를 가르키고 있으며, 한나라 때 사마천의 화식열전에 관경제와 비슷한 부의 축적에 대한 기록은 이후 한제족들의 경제관념의 모태가 됩니다.
여담으로 한나라의 지도층은 제족에 가깝고 일부지도층과 백성들은 한족으로 보고있으며, 일찍이 제족 초나라의 패왕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의 쟁패를 게임으로 만든 장기는 색갈 구분에도 제족 초나라는 청색으로, 한족 한나라는 적색으로 하여, 두게 되고, 이뿐만 아니라 여타의 놀이나 동요, 가곡, 설화, 등에서도 역사적 사실이 스며 있습니다.
참고로 전욱고양씨란 정통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별칭이 제준인데, 아황, 희화, 상희라는 세 아내가 있고, 아황은 삼신국을 낳았으며, 희화는 태양의 여신으로서 열이나 되는 태양의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을 번갈아가며 천상에 오르게 하여 하계에 빛을 주었다. 하고, 상희는 달의 여신으로서 열둘이나 되는 달의 딸을 낳았는데, 이 딸들이 번갈아가며 하늘에 오르게 하여 밤을 환히 밝혔다. 하여, 열의 태양과 열둘의 달이란 십간, 십이지의 사상과도 결부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태양이라든가 달의 어버이 신으로서 제준의 존재는 주목받을 만하며, 전욱고양은 봉황을 상징며, 십간 십이지와 역서들을 만들어 서토를 개몽시키고, 이때 수레와 배등이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볼수 있습니다.
이때 한족 신화에는 예 가 10개의 태양이 뜨거워 9개를 활을쏘아 떨어뜨리고 나머지 하나만 남겨 놓았다는 것인데,
이는 제준의 10개 태양신화에 대한 9개인 제족 9족을 비유하고, 남은 하나를 한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또 전욱고양의 가문의 3개의 칼이 있고 각기 명문이 있는데, 고양 칼 명문에 조선의 조 자가, 아들 증여곤 칼 명문에 조선의 선 자가 처음 등장하여, 제족과의 관계를 확증 시킵니다.
기록을 분석하면 전욱고양은 황제의 외손으로 18세 이후 단군왕검일 가능성이 크며, 부루태자의 대화 내용이 우나라 순은 제후국으로 보이고, 수덕을 갖고 태어나고 뱀이 죽어 물고기로 태어난 어부가 죽은 전욱이라 합니다.
기록에는 관경제의 일환으로 당시 만주 흑룡강과 목단강근처에 있었던 진한육부 중에 하나인 습비부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서 한 부분을 맡는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환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로국의 벅수군과 같은 관경제와 배달화백제를 수호하는 일종의 역할로, 여러 물류의 운송이나 신시의 화폐를 책임 운송하거나 주요 인물호송 등의 역할과, 순노부 개척시는 재사나 무골, 묵거등의 현인도 참여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여러 분소의 연합이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만주일대에는 관경삼국이 일어날 시절에 전설적인 무역국이 두 개나 있었는데, 하나는 갈사국으로써 오늘날 요동반도에 자리잡으면서, 비단길 교역을 좌지우지한 나라였고, 이곳에서 거만금의 부를 축적한 분이 연타발인데, 그 따님이 소서노 어하라 이며, 그리고 또 하나는 구다국으로써 그 국명에 들어나듯이 차와 말을 국제적으로 교역하는 무역국인데, 아마도 오늘날 제제합이(치치하얼)에서 합이빈(하얼빈)에 자리잡은 듯 하는데, 이러한 무역국가를 끼고 있는 환나국은 저절로 표국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환나국은 벅수군과 마찬가지로 왕비가 그 수장을 맡았으며, 광개토대왕의 왕비 계후인데, 계후는 비가되기전 대왕을 표물로 밀착경호하던 중, 당시 소서노 황후는 당신이 직접 후가 되라고 권유하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계후는 원래 환나국이 소속되어 있던 순노부에 나라를 바치고 결혼하여 계후가 되었습니다.
기사에 기원전 추모왕 7년 계후가 32세의 나이에 행인국과 구다국의 싸움에서 전사한 내용인데, 문제는 백제의 비류선제의 선제후인 벽라후의 모국인 행인국과 구다국의 전쟁이었다는 점으로, 쟁점은 비단길의 이익을 한제족국과 나누자는 백제의 갈사국 행인국과, 비단길 이익을 제족의 관경제에만 독점해야 한다는 구다국의 충돌에서 비롯한 것으로, 만주의 두 거부국인 갈사국과 구다국의 쟁투가 추모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까지 3대에 걸쳐 이어 갔으며, 이 3대에도 환나국의 지휘권을 이어받은 계후의 아들 고루와 딸 만후는 왕실에 충성하여, 고구려가 3대에 걸쳐 빚을지게 됩니다.
고구려의 통치구조는 단군조선이 최고통치자 천제와 아래 삼한의 지역 지도자 한, 간, 으로 두고, 그 아래 군을 두어 다스렸듯이, 이를 전승받은 부여의 체제와 유사하게 북방제족 선비, 거란, 당나라, 등과 같은 지도자 1인 지역 3인 직책 5인 가 의 홀수 체제로 편제 되어 있으며, 군체제 또한 이러한 편제로 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간 제도를 쓰는 나라들은 모두 같은 제족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가 있으며, 책력 또한 구집력이라 하여 사용했는데, 서역과 천축에서 사용하던 구집력은 단군조선의 책력입니다.
고구려는 시조 고주몽(기원전 232년. 32년~기원전 19년) 은 졸본천이 있는 홀승골성(오녀산성)이 있는 비옥하고 너르며 산세가 험한 곳인 비류수(압록강 지류 훈강) 위쪽에 도읍하는데, 이곳은 환도성이 있게 되는 환도산 아래 현토군 개마현(요령성 환인현)이며, 비류국의 송양왕이 자리한 곳에서 개국하고, 이듬해 비류국을 병합합니다.
일설에는 요사지리지에서 고려고국으로 기록된 발해 압록부 서경성 녹주, 신당서에서 신주로 기록된 것이 고국원왕이 천도하였던 황성이며, 본래 고주몽의 졸본성인데, 발해 압록부 압록강이 현재의 요하인 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환인현 오녀산성을 오늘까지 주몽왕의 졸본성으로 잘못 알아왔으며, 졸본성은 주몽왕과 신대왕, 고국천왕, 고국원왕, 고국양왕이 묻혔있고, 고국원왕 때는 황성이라고 했는데 고주몽 때에 눌현성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이는 누루 황의 우리말에서 황성과 누루성이 비롯되며, 고국원왕이 황성으로 옮긴 후에, 고구려왕은 졸본부 행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장수왕의 평양성 천도전까지 졸본부 행차 기록이 없고, 수성왕갈석비문에서는 유리왕이 비류수의 위나암에 정도하며, 고주몽의 졸본부 황성은 천부라고 불렀는데, 천부가 신주를 거쳐 천두진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국호를 구려, 구루, 로 하다가 한의 신나라 왕망시절 고구려로 기록에 나오며, 다른 기록에 한나라 무제(기원전140~135년) 때 이미 고구려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보장왕(634~668년) 27년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금구백년으로서 고씨자한유국이라고 적고 있어, 존속 9백년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출신이 기록된 사서들은 크게 두가지로 부여의 왕손설과 고리국을 이어 받은 설로 나뉩니다. 그리하여 두 기록 중 고리국설을 전체 기원 기원전 232년으로 하고, 나머지 각론은 부여설로 정리하고, 기록의 일설에는 고구려가 한나라 이전 순임금 이후에 고구려가 기원하여 존속하였다. 고 나옵니다.
1세 추모왕 주몽(기원전32년~기원전19년)은 계루부 고씨로 홀승골성에서 개국하고, 주변 소국인 비류국, 동쪽 행인국, 북옥저, 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당시 이 지역은 일부 한의 현토군 영향하에 있던 곳이라 1세기간 국가 정비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당시 고구려는 부여의 오부와 왕가와 핵심 귀족의 고추가 가 있었고, 오가는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가 있었습니다.
2세 유리명왕(기원전19~기원후18년)은 소노부 해씨로 왕권을 정비하고, 도읍을 보다 너른 길림성 집안시 국내성 으로 천도하고, 동시에 2.5km 떨어진 바위산에 위나암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환도성으로 비정되며, 서북 선비, 서쪽 양맥, 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3세 대무신왕 무휼(18~44년)은 북쪽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동쪽 개마국, 구다국, 남쪽 낙랑국, 등을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차비의 아들 호동이 낙랑국 최리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은 설화로 남아 있으며, 후한이 살수이남 진출로 인해 서토 확장세를 멈추고, 우보와 좌보를 처음으로 임명하여 통치체제를 확립합니다.
5세 모본왕(48~53년)은 소노부 해씨로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귀족과 갈등이 심화되 피살 되지만, 생전에 서쪽 상곡과 태원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6세 태조대왕(53~146년)때 유리왕으로부터 모본왕까지 소노부 해씨계보를 청산하고, 계루부 고씨로 장기 집권하여, 그간 연맹국가체제를 일원적 왕권으로 재편하며, 서북 요서10성, 남동 동옥저, 북쪽 갈사국, 주변 조나, 주나, 동쪽 책성, 요동군, 현도군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합니다.
9세 고국천왕 (179~197년) 은 왕위계승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고, 왕비족과 연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부족들의 지배에 질서를 두어 특정부족 우대를 없게하며, 184년 후한 요동태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190년 좌가려, 어비류의 난을 진압합니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여 진대법을 시행하여 궁핍한 농민 구휼하여 국가 기반을 다지는데,
을파소가 얻었다는 참전계경은 치정의 원전으로, 366사의 인간사를 주관하는 내용으로 적절하게 다루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경전으로, 성, 신, 애, 제, 화, 복, 응, 보, 등 8개의 강령을 중시하였고, 한 해 동안 임금과 백성이 함께 지켜야할 율법을 정리한 것이며, 모두가 서로 존중하며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위한 생활상의 덕목으로 짜여진 경전입니다.
10세 산상왕 동천왕(197~229년) 때 요동의 공손씨 세력과 대치하다가 236년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 시켰으나,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어 옥저방면으로 피하다가 국내성 인근성으로 임시 천도하지만, 밀우와 유유가 위나라군을 물리쳤는데, 왕이 죽자 백성들이 슬피울어 생전 왕의 애민정신이 컷을것으로 보입니다.
15세 미천왕(300~330년)은 서천왕의 손자이나 아버지의 반역혐위로 어려서 빌어먹으며 소년이 되어 소금장수를 하다가 국상 창조리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는데, 국토를 요동으로 진출하고 낙랑군을 축출하여 자주 기반을 강화하여, 한낙랑군, 대방군, 현도성, 을 정벌하며, 연의 모용선비와는 대치하는데, 이 미천왕은 을불, 을불대왕으로 트루키에 고대 비석 궐특근비에 그의 행적이 기록으로 나타납니다.
16세 고국원왕(330~371년)은 영토확장으로 요동과 부여지역에 인접한 전연과 대립하고, 369년 연나라 정벌을 위해서 양자강 지류의 한수에서 준비하고 있는데, 이 빈틈을 노려 백제가 낙랑세력과 함께 기습적으로 쳐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이곳은 한양부 삼각주에 있었던 남평양성 인근 한남산에서 흐르는 화살을 맞아 전사(371년)하자,
17세 소수림왕(371~384년)때 선왕이 전사하자 팽창정책을 내치 체제정비로 전환하여 불교와 유교를 수용하고, 국가 통치 율령을 반포하며, 중앙집권적 체제를 다집니다. 불교는 전진의 승 순도와 아도를 맞아들이고 사찰을 건립하며, 유교 교육기관 태학을 설립하는 등 내치를 다져,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특히 이두로 사서 유기를 지어 전승된 역사인식을 굳건히 합니다.
당시 불교 중관철학은 모든 존재는 독립된 자기 성질이 없다고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실체를 공이라 파악하며, 유식철학은 인간의 분별과 집착을 타파하여 나타나는 진리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여 진실한 성품으로서 진공묘유의 유를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당시 고구려 승 승랑은 중관철학의 계통인 삼론사상을 체계화하여 훗날 수나라 때, 길장에 의해 완성되는 중국삼론종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불교의 궁극적 진리인 중도를 인식하는 방법으로서 세속적인 진리인 세제와 초월적인 진리인 진제의 2제를 종합시켜 파악하였으며, 있다고 말한 ‘세제’와 이를 부정하여 없다고 말한 ‘진제’를 통합하여 또 하나의 ‘세제’로 삼고, 다시 그것을 부정하는 ‘진제’를 드러내가는 변증법적 인식방법인데, 그는 중도란 유와 무의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이 나누어지지 않는 중도가 바로 2제(세제와 진)의 본체라고 파악하였습니다.
19세 광개토대왕(391~412년) 때는 영토를 최대로 키웠으며, 다축전선을 운영하여 백제 왜 연합군을 격파하고, 남방을정벌하고, 동북 동부여 64개 성을 정벌하고, 서북 거란 비려, 서요하 염수 확장, 서쪽 모용선비 후연 정벌하여 요동성 일대를 장악하고, 백제 58개 성을 접수하며, 신라 수도에 주둔군 배치하는 등 영토와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내치에도 공을들이며, 평양에 사찰 9곳을 마련합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는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비석으로, 고구려 국가사관으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사로 볼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의 민족 강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데, 정주, 덕안, 항성, 서화, 동명, 석문, 태원, 은산 동쪽에서 경주까지 하나의 민족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업적들은 광개토대왕은 단군조선조에서 무너진 소도 화백제를 부흥하려는 일련의 실현 과정이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백제가 주도하여 대륙에 제족국을 위하여 대운하를 놓아서, 도자기 등의 물자를 운송하는 길과 기존의 비단길을 회통시키는 공사를 시작하고져 했는데,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품은 국제세력이 등장하여, 이미 있었던 관방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이며, 대운하 지지세력과 관방로지지세력으로 양분 되서 격렬한 마찰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대 해양세력을 구축했던 가야 수로왕의 세력이 양분화되고, 이 과정에서 광개토태왕이 관방로 지지세력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거시적인 두개의 축을 이해하고 나면, 왜 겁이 많은 백제의 17세 진사왕이 이런 대규모 관방로 재건공사를 일으켰는가 라는 점이 쉽게 이해가 되며, 이런 진사왕의 관방로 재건에 대해서 고구려는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따라서 백제와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기록이 등장하고, 백제 역시 관경삼국이 공유하는 관방로 주변에 점차 백제의 성곽을 넓혀나가서 독점하려는 군사활동이 늘어나는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데, 결국 392년 10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에 항복하며, 그해 11월 기각숙리 등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우게 됩니다.
20세 장수왕(412~491년) 은 472년 화북성 봉황성이 있는 안국시에 평양성을 천도하고, 475년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하고, 사로신라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맷자 사로신라 실직주성을 빼았으며, 유연과 우의를 다지는 등 주변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외교를 다각화하며, 사토를 안정시켜 고구려 최대영토를 확보하게 되며, 왕호만큼 98세에 서거합니다.
21세 문자명왕(491~519년) 은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고, 대륙 남북조 분열을 이용하여, 등거리 외교로 국제관계를 안정시키고, 전성기를 유지하였으며, 494년 부여가 자진 투항해 오고, 부여 북쪽 실위에 철을 공급하고, 22세 안장왕(519~531년) 은 문자명왕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여 남진정책을 추진하며, 대능하 조양을 공격하였으나, 내부적인 지배체제의 균열로 살해 당하게 되는데, 한족 미녀와의 관계도 기록에 비치며, 자세한 기록이 미흡하여 그시종을 알지 못합니다.
24세 양원왕(545~559년)은 23세 안원왕의 태자였으나 당시 두 왕비와 후원 귀족세력간의 충돌속에 즉위하여, 계속한 분쟁속에 왕권이 추락하며, 550년 유연을 멸망시킨 돌궐이 서북(몽골 동부)으로 침략하고, 신라 백제연합군이 침입하는 등 위기를 맞이하지만, 귀족간 분쟁을 종식하고 귀족연립정권을 형성해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26세 영양왕(590~618년) 때 수나라의 4차례 공격을 받았으며, 2차 130만 대군을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승리하였으며, 역사서 신집 5권을 편찬하고, 승 혜자와 담징이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 문물을 전파합니다.
27세 영류왕(618~642년)은 재위초 수나라와 전쟁상흔을 복구하며, 수나라가 망한 다음 당나라와는 평화롭게 지내며, 당에서 도교를 수용하고, 당이 동돌궐을 격파하는 등 긴장정세가 지속되자, 국경에 천리장성을 축성하여 방비하였으나, 대당 강경론자인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 역공을 당해 연개소문의 정변(642)으로 피살됩니다.
28세 보장왕(642~668년) 때 도교 진흥책을 주장한 연개소문의 집권으로 왕권 없이 지내다가,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자식들간 내분이 일어나던 중 나당 연합국의 침공으로 668년에 패망하며, 패망후 당으로 잡혀 갔으나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돌아와 고구려 부흥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682년경에 사망합니다.
이러한 왕가 계통은 부여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천제 시조 해모수. 1세 모수리. 2세 고해사. 3세 고우루,고두막. 4세고무서. 성제 5세 고추모(주몽,수부 졸본). 명제 6세 유리왕(국내성). 7세 대무신왕, 민중왕. 대왕 8세 모본왕. 천왕 9세 고국천왕(환도성). 10세 동천왕(평양성). 11세 중천왕. 12세 서천왕. 13세 봉상왕(사출국). 14세 대왕 미천왕. 열제 15세 고국원왕(환도성, 평양 동황성). 16세 소수림왕, 고국양왕. 태왕 17세 광개토대왕. 호태왕 18세 장수왕(평양성). 19세. 20세 문자왕. 21세 안장왕, 안원왕. 22세 양원왕. 23세 평원왕(장안성). 24세 양왕,영유왕. 25세 보장왕.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가들의 시초에 대하여는 이설로, 사서에 나오지 않는 시조 주몽에 대해, 기원전 1세기경 신나라 왕망과 얽힌 고구려후 '추' 의 뜻인 말먹이꾼 이란 걸로, 주몽과 말과 발음이 비슷하고, 시기나 한나라와의 관계 정황과 같아 설화가 아니라 사서 기록적으로는 주몽일 가능성을 열어두며, 32년 대무신왕때 처음 왕의 호칭이 나옵니다.
4세기말 소수림왕(371~384) 때 연나라와 남부여(백제)의 침입으로 나타난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부여계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구려 초기 왕계도 함께 정립하었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소수림왕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과 귀족들을 결속시켜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시조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강행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선비족은 2세기경 단석괴에 의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가 단부, 우문부, 모용부, 탁발부, 등의 4개 부족으로 재편되었는데 그 중 모용부와 우문부가 주도권 쟁탈전에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이 후에 거란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란은 이 선비족 가운데 우문부의 후예들인데, 이후 시라무렌 이남과 조양 이북의 사이로 현재의 내몽골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록에 나옵니다.
3세기 중반(245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모용부가 동원되어 고구려와 일전을 하게 되었고, 후반(293년경)에는 모용부가 독자적으로 군대를 몰아 고구려를 침입하자, 고구려 동천왕(227~248년)은 우문부와 단부 등 나머지 선비족들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견제하며, 4세기 초 서진 말기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되어 만주 지역의 제족들이 대거 남하함으로써 고구려는 이를 이용하여 요동 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였습니다.
기록에는 북위를 건국한 선비부족은 고구려 간의 통치를 받다가 독립하여 위, 북위(384년 건국)라 불러, 한의 정사 중 유일하게 고구리왕을 열제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부여, 선비족, 거란족, 말갈, 여진, 읍루(아이누), 등을 포함한 연방국이라 보이며, 모두 간이란 부족장 명칭을 쓰지만, 호태왕 비문에는 백제, 신라는 옛부터 속민이었다. 하여 신라와 백제가 대륙남방동부에 있었지만, 고구려 관활내에서 왕칭호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연방에 말갈은 주요 구성원이며, 고구려와 말갈은 한가족이나 다름없이 말갈은 고구려 군대에 속하여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존재였는데, 598년 영양왕은 말갈군 1만을 이끌고 영주를 공격했으며, 661년에는 말갈장군 생해는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뇌음신 장군과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또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당나라 주력부대와 맞서 싸우는 등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말갈은 고구려와 분리시켜 볼 수가 없습니다.
수서 기록에 말갈 7부 가운데 백산부, 안거골부, 호실부, 속말부, 백돌부는 고구려에 속한 부족들임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데, 다만 불열부는 아예 기록조차 없고, 흑수부는 유독 다른 계통을 지닌 읍루-물길과 연결되는 종족으로 여겨지는데, 흑수부는 고,당 전쟁 때에는 고구려를 도와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만약 고구려와 말갈이 전혀 별개의 세력이라면 어떻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하나의 국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겠습니까.
흑룡강가에 위치한 러시아의 국경도시 하바로브스크시 인근의 코르사코브스키 고분군112호 고분에서 고구려의 금동불상과, 같은 고분군에서 고구려식 화살촉이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면, 이곳은 흑수말갈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삼강평원의 북쪽으로, 금동불상과 화살촉 유물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사는 흑수말갈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참고로 이때 나온 불상은 372년 소수림왕 때 전도승 순도와 4년후 아도가 전해준 불상과 불경으로 5년후 성문사와 이불란사란 사찰을 세우는 등 불교를 공인하므로서 고구려가 불상을 흑수말갈 지역까지 전해진 곳으로 보이며, 또한 당시 17세 소수림왕 2년(372)에 이미 태학을 설치하여 귀족자제들에게 유교 경전과 문학·무예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그릴 때에는 말갈의 거주지로 알려진 동북 지역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시 영토 개념에도 더 가까울 것으로, 기록에 동서 6천리, 남북2천리, 로 기록에 나오고, 기록에 진나라 때 구려는 이미 요동을 취하였고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군을 차지하였으니 지금의 조양시 유성과 지금의 북경인 북평 사이로 나옵니다.
이 기록이 보증하는 것은 이밀의 묘지명에서 동부여는 한나라의 상국이며, 예, 맥, 의 고구려와 연나라가 한나라 고조 유방의 건국을 돕는다. 라는 것과, 유방의 어머니가 당시 삼한에 속한 학(맥)의 일족으로 지금의 동북지방 산서성, 하북성지역이며, 당시 이름에 유주, 한중 지방에서만 쓰던 할미오자가 언급되므로, 고구려와 관련성을 알 수 있으며, 생각보다 한나라 영역이 서편 다음으로 고구려가 대륙 서편북방에서 자라잡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다음 당나라 연산도 총관이며 우령군 대장군인 이근행이 고구려 내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구려 부흥군 반군들을 호로하 서쪽에서 대파하고, 당서 유인쾌전에 따르면, 이 호로하는 고려 남쪽의 경계에 있으며, 신라 칠중성 북쪽이다. 하였고, 고구려 반군 수천인을 사로잡아 획득했으나, 나머지 반군들은 신라로 달아났다고 했다. 하여, 고구려군 반군은 말갈을 끌어들여 성을 공격하다가 퇴각했다. 라 하였으며,
결국 당시의 고구려 왕조는 무너졌을지라도 왕자들이 돌궐로 도주하여 고구려의 명을 이었으며, 나라 안에서는 왕조를 부흥시키기 위해 당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말갈인데, 왕조가 무너지고 난 후에도 말갈은 고구려 부흥군의 일원으로 고구려 병사들과 함께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여왕의 존재와 왕가 권력구조가 창세 부도 마고의 유습을 따랐다면, 고구려는 왕가와 귀족의 묘제에서 환국으로부터의 우주 9층과 지하신, 수신 하백의 범신세계관의 유습을 전승하여 벽화로 남겼으며, 특히 태양상징이나 여래가피 연꽃과 왕을 상징하는 왕자문, 등은 집안지역을 중심으로 벽화의 소재로 썼으며, 장군총나 반도 중부의 고분들은 석관으로 외형이 윗단과 아랫단 비율이나 고분간 거리 황금비로 되여 있어, 조성 할 당시의 수학적 조형물 조성의 수준을 가늠케 합니다.
무용총(길림성 집안 고분군 5세기 초)에는 무용수들, 가수들, 악사, 묘주 추정 기마인물, 접객도, 9단 천정화의 신조, 천마, 비천상, 삼족오, 두꺼비, 연꽃, 등의 벽화가 있으며, 각저총(길림성 집안 5세기)에는 배달국의 웅상이나 신수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다른 종족간 스모나 씨름도. 등은 당시 선인들 경기인 수박·격검·사예·기마·덕견이·씰흠(씨름)등 각종 기예가 이미 삼한시대부터 제례행사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군총(길림성 집안)은 왕묘로 추정되며, 고구려가 세상 중심이고 천손을 나타내는 벽화들. 등 일대 우산하고분군들이 우산묘구 457호, 무용총 458호,로 지정될 정도이며, 압록강 주변에는 1만2천여개의 고분들이 있습니다.
참고로 집안의 고분군 군집은 고구려의 극동대혈능으로 밝혀지는데, 고국원왕의 제의 명호가 성종 소열제라 불러, 혈자를 붙여, 왕능의 명호를 넣어 대규모 왕능이라 불린 말이며, 무슨 지하에 있는 거대 동굴이 아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발굴의 성과로 고구려 왕능 28기 모두 압록강 이북지방에 있다고 하여, 평양설 등은 설득력이 없어졌습니다.
진파리 1호분(평양,6세기)의 소나무, 금박 안료사용 사신도와 온달, 평강공주 추정 귀족 생활상, 신선·구름무늬·연꽃무늬, 천장에는 별·덩굴무늬·연꽃무늬·병풍무늬·물레무늬·연못·인물풍속, 등의 벽화가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408년) 에는 수문장·문화와 생활풍속상, 선후 케페우스와 선왕 카시오페아 추정 별자리 60여개 해와 , 사람머리 짐승, 묘주인·부인 행렬도 주름치마·연못·칠보공행 행사도·마차·묘주 정좌도·마구간·외양간·누각·고상창고 ·천정의 비천상 ·비마·짐승·인면조·수렵도·소끄는 견우도·직녀도, 등. 묵서(5세기), 묵서명은 고구려가 자사, 태수와 현령까지 갖춘 구체적인 지배체제를 가동하여 북경 인근의 구체적인 영토를 지배했다는 단서가 되며, 특히 안악3호분(황해도)은 묘주가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라는 중국인 무장이며, 주변에 90여기의 고분군이있습니다.
안악 1,2,3,고분(황해도 4세기)에 생활풍속 행렬, 전각, 사냥, 인물, 천정의 신조, 신수, 날개 있는 물고기, 말, 기린, 봉황, 사람머리 새, 별자리, 선인, 옥녀, 직녀, 사람머리 짐승, 성성의 상이란 글 등의 벽화를 발견 할 수 있었으며, 강서대묘는 중묘 세 무덤(평남 강서, 남포, 590년) 사신도, 산악도, 서조탄 신선, 선인비천상, 상서동물, 3엽연꽃, 봉황, 기린, 영지, 천정 신선세계, 연속 인동당초무늬, 황용, 이 벽화로 보이며, 평원왕이나 양원왕으로 추정합니다.
이러한 고분속 벽화는 크게 두 가지로 주로 초기에 그려진 춤무덤, 씨름무덤, 세칸무덤과 같이 벽에 회를 발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경우와, 다섯무덤(오회분) 사신무덤과 같이 잘 다듬은 돌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들은 모두 후기 벽화에 속하여, 기록에 고구려인들은 결혼하면 곧 수의를 만들고 금은 재물을 장례에 쓴다' 고 하여, 죽움 후 영생을 신앙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이러한 고분과 벽화가 신강성 우루무치 아사타나에서 발견되었는데, 벽화에 신단수, 해, 달, 새, 북두칠성, 하녀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장면, 말과 시종, 묘주와 부인의 복식, 등이 모두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같아, 러시아 조상이 슬라브인 훈족의 후예로 단군을 시조로 모시는 종족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들이 움직임이 고구려와 함께한 사실 등이 있음으로 해서, 소련에서는 한때 조선부활정책을 검토한 바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벽화는 일종의 회화미술로의 신령스럽고 율동적이며, 격조로운 조형 전통성과 기법상 젖은 상태의 회벽에다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과 부분적으로 다 마른 상태에서 아교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두가지 방법이 병행된 것으로 보인 보존의 비밀도 담겨있는 것을 확인하는 귀중한 자산입니다. 또한 수렵도에 명적의 모습과 무용수의 옷감 무늬로 보아 방염직물인 인도(기원전 2,000년) 사라사 염직천으로 보여 당시 생활상에도 국제간 무역이 성행하였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사신도의 사신이란 하늘의 별자리 신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인데, 동쪽 적도 하늘에 뜨는 별자리가 동방창룡칠수, 서쪽 적도 하늘에 뜨는 별자리가 서방백호칠수, 남쪽 적도 하늘에 뜨는 별자리가 남방주작칠수, 북방 적도 하늘에 뜨는 별자리가 북방현무칠수, 이고 이들 별자리의 주인을 제라 하는데, 제는 하늘의 일정한 구역을 다스리는 천신이라는 뜻으로 청제·백제·적제·흑제라 하였으며, 은나라때 배달국 환웅천왕이 이 제 로 불리웠습니다.
또 천문에서는 宿자를 숙으로 발음하지 않고 수로 발음하는데, 수 발음은 숙 발음보다 먼저 생겨난 발음으로, 수는
동이의 발음이고 숙宿은 수에서 파생한 발음으로 한족의 발음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황제의 별자리가 없어, 황제가 사신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하였으나 천상열차분야지도 개편 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고 봅니다.
한편 제족의 칠성 천문도와 한제족의 북극오성 천문도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하늘을 보는 역법의 다름으로 인하여 발생하며, 포항 신흥리 바위그림에는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포항 칠포리 고인돌에서는 북두칠성과 북극삼성 별자
리가 발견되었는데, 이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는 중국 천문도에는 없고, 고구려 덕흥리 고분과 고려의 석관천문도에서 발견되어 제족의 전형적인 별자리 체계로 간주되는것이, 고구려 벽화와 고려 별자리의 대부분에서 이 북두칠성과 북극3성의 별자리 체계가 기본 양식으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북극삼성의 별자리는 가장 이른 것이 5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국내성 씨름무덤에서 확인되며, 세별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운데 별이 북극성으로, 당송의 것과 다른 북극성 별자리를 성립시킨 것이며, 이 씨름무덤의 북극3성은 고대 동아시아 유물자료 중에서 맨 처음 그려진 북극성 별자리로 추산되고 있는데, 둔황 성도보다 3백년가량 앞선 자료이며, 위진남북조시대의 천문 관련 유물 중에서도 북극성 그림을 남긴 것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500년대 전반으로 편년되는 고구려 진파리 4호분의 천장에는 전천 별자리를 돌판 한 장에 담은 전천 천문도가 자리잡고, 천장 중심부에는 천문의 회전축인 북극성좌와 북두칠성을 그렸고 그 둘레에 28수 별자리를 그렸는데, 고구려보다 훨씬 뒤인 당송 연간에 유행하던, 이른바 개천식 28수 천문도의 선구적 형태를 이 진파리 4호분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며, 북두칠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4번째 별의 크기가 7개 중에 가장 작게 그려져 있는데 실제 이 별은 겉보기 등급이 3.31등급으로 다른 것에 비해 가장 어두운 관측 사실과 부합하며,
또 꼬리 부분에는 8번째 별인 보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아랍권에서 알코르라고 불리는 별이고, 고구려인들이 우수한 관측기법을 갖고 있어, 이 사실에 바탕해 무덤 벽화를 그렸음을 의미하며, 진파리 4호 고분에는 28수 별자리를 완전하게 그린 금박천문도가 있어 동아시아 유물 천문도 중 단연 돋보이고, 이집트 등 서구문명에서는 별자리를 그린 그림이 거의 없으므로, 고구려 벽화천문도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며, 남포시에 있는 약수리 고분에는 청룡이 심방육성과 함께, 백호가 삼벌육성과 함께 그려져 동서로 대칭되는 개념을 보여주어, 북두가 인간의 사후세계를 수호하는 별자리이며, 남두는 인간의 무병장수와 수명연장을 주관하여, 생사의 두 세계가 영원으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고구려인의 우주관이 반영된 것입니다.
고려에 가서는 이 북두칠성과 북극3성 이 우주의 중심축에 자리잡은 천문도가 출현하며, 20세 신종(1,144-1,204년)의 양릉 천문도에서는 천문도 중심부에 북두칠성과 북극삼성을 그려 두었는데, 이것은 안동 서삼동 고려 벽화묘와 파주 서곡리 고려 벽화묘의 천장부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별자리 구조이고, 고구려 역시 평양시 진파리 4호분의 전천 천문도에서 보이듯이 천문도 중심에 북두칠성과 북극삼성을 그려, 말하자면 고구려의 천문 전통이 고려의 벽화묘로 그대로 전승되었던 것인데, 그 천문 형식은 북극3성과 북두7성의 두 별자리를 천문도 중궁의 핵심 별자리로 안치한 것입니다.
이 점은 중국의 당송대 고천문도가 북극삼성이 아니라 북극오성을, 북두칠성 대신에 사보4성을 천문 중궁의 핵심 별자리로 삼는 것과 대조되는 측면으로, 이는 각기 다른 전통이며 대립되는 것이라 보며, 고대 한중 간에 달리 나타난 별자리의 문화성과 역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천체관측의 중심축 구실을 하는 북극성 별자리를 꼽을 수 있는데, 우선 북극성은 모든 천체가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할 때 그 중심이 되는 추축 역할을 하는 별자리여서, 예로부터 천문의 주인이자 하늘의 주재자인 천제의 별자리로 인식되어 왔는데, 북극성은 하나지만 천문도상에서 하나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천체학적 관점에서 북극성은 지구의 북극축이 천구로 한없이 연장하여 간 곳에 자리잡은 별을 뜻하지만 이는 엄밀한 정의가 못 되며, 지축이 가리키는 천구상의 가상 지점을 북극점이라 하는데 공교롭게 여기에 별이 있을 확률은 매우 낮아, 천구 북극점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밝은 별을 북극성으로 부르며 관측 중심축으로 삼게 되는 것인데, 북극성을 달랑 하나 설정하게 되면 이를 알아보기 쉽지않아 문제가 생기므로, 이에 북극성을 포함하여 주변의 밝은 별 몇 개를 서로 연결 지은 일련의 북극성좌를 창출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문헌 기록으로 처음 기재된 한대의 천극성은 북극성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주변의 세 별을 합친 천극4성이라는 뜻을 지니기도 하며, 당나라 무렵이 되자 새로이 천구의 북극점에 다가선 별 하나를 새 북극성으로 삼고 하늘의 추축이라는 의미에서 천추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와 더불어 북극성 별자리는 주변의 4개 별까지 합친 북극5성좌로 엮여서, 이를 그린 최초의 자료는 중당 무렵으로 추정되는 둔황 성도 갑본(8세기)이며, 주극성 범주의 별자리를 뜻하는 자미원의 중심에 북극5성좌와 이를 보좌하는 사보4성을 뚜렷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중국 천문도에는 북극오성좌가 반드시 그려져 현재에까지 이르며,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의 깃발로 쓰이는 오성홍기에는 붉은 바탕에 큰 별 하나를 포함해 다섯 별을 그렸으며, 이것은 자신들의 북극오성좌 전통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제족과 한제족의 천문도 차이의 핵심은 그 중심부에 있는데, 제족의 전통 천문도는 그 중심세계가 북극3성 북두칠성이고 한제족 전통의 천문도는 그 중심세계가 북극5성 사보4성 이 되어, 말하자면 고대 제족들은 우주의 중심세계를 북극 3성과 북두칠성 으로 보는 것이고, 고대 한족인들은 그 중심세계를 북극5성과 사보4성 으로 보고 있고, 제족인들이 우주의 중심세계를 삼칠로 파악한 것으로, 이는 삼신은 낳고 칠성은 기른다고 하여, 고대로부터 장독대 위에 정안수 모셔놓고 칠성님께 빌어왔습니다.
이 칠성신앙의 흔적이었던 칠성당 은 20세기 중엽까지 동리마다 산재해 있었고, 절집에도 칠성각 이란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데, 칠성신앙은 하느님 상제 신앙으로, 고대로부터 제족은 하느님께서 칠성을 포함한 자미원에 임어해 계신 것으로 믿고 빌고 축수해 왔으며, 칠성신앙은 3과 7의 숫자와 관련돼 있고, 상수는 이법의 표현으로, 북극3성과 북두칠성 천문도에서 3수와 7수가 결합히면 10수가 되고, 10은 완전수이며, 하느님의 수인데, 이 10수가 완전수라는 근거는 하도에 따른 것이며, 고구려의 별자리가 삼칠 천문도, 즉 10수 천문도라는 사실은 제족이 바라본 우주의 중심세계는 주재자 하느님과 관련돼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삼칠 천문도에서 3수와 7수가 각각 의미하는 것도 하느님과 관련이 있으며, 3수는 곧 삼신을 의미하고, 삼신은 천지만물을 낳는 신이며, 7수는 칠성을 의미하고 복록과 수명을 관장하며 만유의 생명을 기르는 신인데, 신의 기능은 이렇듯 3수로도 작용하고 7수로도 작용하여, 고대 제족은 신의 기능을 이렇게 양자로 나눠 생각하며, 고구려 밤하늘의 별자리가 이렇듯 삼칠 천문도인 것은 삼신과 칠성신앙이라는 한민족의 고대 신앙을 유감없이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사신도는 과거 수많은 풍수지리서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이 풍수지리는 제족들의 오랜 지혜가 담겨있으며, 인류사에 귀중한 자산으로서 동아시아에서 주로 발전하는데, 순수 자연 친화의 산물의 징표이며, 현대에 오면서도 난개발 방지나 토지 균형사용, 등 사회 국가적 정책에서나 개인의 안락한 삶에 이르기 까지 그 활용가치가 충분하고, 이론으로는 동기감응론, 소주길흉론, 형국론, 간룡법, 장풍법, 설심부, 득수법, 정혈법, 좌향론, 등이 있습니다.
참고로 벽화에 등장하는 태양 속 삼족오는 비둘기와 거북이나 자라발 3개와 제기의 밑면이나 낙타나 말의 굽모양으로 된 발을 통합한 3발 달린 제기 토기의 변형이며, 원시농경시절 비둘기가 구구하고 우는 소리가 비를 부른다는 토템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 제기들은 비와 관련한 3발 위주가 되며, 달 속에는 두꺼비가 있어, 이 또한 비와 관련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풍속에 관한 기록에는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종류라 하고, 동이와 언어와 법이 규칙 등 많은 것이 같으며, 한쪽 다리를 꿇고 앉아 절하며 걸음걸이는 모두 달리는 것과 같다. 하였고, 무릇 다섯 종족이 있는데, 서부 우부 소노부, 북부 후부 절노부, 동부 좌부 순노부, 남부 전부 관노부, 황부 계루부, 로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후에는 계루부에서 대를 이었다. 하였고, 그 관을 설치하고 세워, 상가, 대노, 패자, 손님 접대 고추대가, 주부, 우태, 사자, 조의선인, 백의선인, 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속은 욕심이 많고,음란하며, 모두 청결한 것을 스스로 좋아하고, 한밤중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가무를 즐긴다. 하고, 귀신, 사직, 영성에 제사 지내는 것을 좋아하여 10월에 제천대회를 여는데, 이름이 동맹이다. 하고, 그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어 이를 수신이라 불렀는데, 또 10월에 이를 영접하고 제사지낸다. 하였으며, 공적인 모임에서는 의복으로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장식한다. 대가, 주부는 모두 머리에 책을 쓰는데 관책처럼 뒷부분이 없으며,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형태는 고깔과 같다. 하고,
감옥은 없고 죄인이 있으면 여러 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 의논한 후 죽이고, 그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하고, 작은 밭이라서 온 힘을 기울여도 족하지 않으니 스스로 알아서 한다. 그러므로 그 풍습이 절약하여 밥을 먹고, 궁실을 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습니다. 또 혼인을 하면 모두 처가에서 살다가 아들을 낳아 장성한 뒤에 이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장례에 쓸 물건을 조금씩 준비하는데, 금은과 재물 예물을 다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는다. 하였고,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여 급하고 기력이 있어, 싸우는 것을 익혀,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것을 좋아하여, 옥저, 동예 모두를 복속시켰다. 하고, 구려는 일명 맥이다. 별도의 종류가 있는데, 작은 물에 의지하여 사는 자를 이로 인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오는데, 이를 소위 맥궁이라 한다. 라 나옵니다.
고구려 미술은 고분벽화에서도 보이지만, 고구려 출신 승려 화가 담징(579∼631년)이 일본의 법륭사 벽에 그렸다고 하는데, 금당 벽에는 석가정토·아미타정토·약사정토·미륵정토와 여러 보살도 등이 그려져 있으며, 이들 벽화는 각기 다른 작가들이 나누어서 그렸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중앙아시아적인 채색법이나 철선묘를 위주로 한 묘법과 제족국에서 유행한 사방불사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호류사 금당벽화에 제족계 화사씨족의 참여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일본의 반구고사편람에서 백제계 지리불자필이라고 기록된 사실이나 고구려 담징 작이라고 구전되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여 주는 한 예라 하겠습니다.
고구려 음악에 대한 기록에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고, 황색의 큰 소매옷에 자색비단 띠를 띠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 물을 들인 끈으로 장식하였다. 하고, 춤추는 자는 네 명인데, 복상투를 뒤에 늘이고, 붉은 수건을 이마에 매고, 금고리로 장식하며, 두 명은 황색 치마 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고, 두 명은 적황색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신을 신고, 두 명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춘다. 하였으며,
악기로는 탄쟁 하나, 국쟁 하나, 와공후 하나, 수공후 하나, 비파 하나, 오현금 하나, 의취저 하나, 생하나, 횡저 하나, 퉁소 하나, 소필률 하나, 대필률 하나, 도피필률 하나, 요고 하나, 재고 하나, 첨고 하나, 패 하나를 사용하였는데, 수서 음악지에는 고구려의 가곡에는 지서가 있고, 무곡에는 가지서가 있다. 는 내용이 보여, 서역의 안국악에 가지서와 무지서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지서와 가지서도 서역 계통의 가무로 추정됩니다.
한편 구당서 양재사전에 의하면, 당나라 때 한족인들 사이에 고구려의 연희가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양재사는 어사대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사례시에서 주연이 절정에 올랐을 때 사례소경인 동휴가 그의 얼굴이 고구려 사람을 닮았다고 희롱했다. 그러자 양재사는 흔쾌히 일어나 전지를 달라 하여 건에 달고 자주빛 도포를 뒤집어입은 다음 고구려춤을 한바탕 추었는데, 머리에 띠를 묶고 두 손을 펼치는 동작이 음악과 잘 어울려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당시 어사대부가 고구려춤을 흉내내서 출 수 있을 정도였다면, 고구려 연희가 꽤 관심을 끌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고구려에서는 산악·백희의 한 종목인 인형극도 매우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기록에는 고구려의 인형극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 고구려의 인형극에 관한 내용이 발견되는데, 당나라의 두우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 송나라의 진양이 12세기 초에 편찬한 악서, 송의 마단임이 13세기 후반에 편찬한 문헌통고에 고구려의 인형극에 대한 있는 기사가 나와, 이를 통해 고구려의 인형극이 한제족의 것과 다르고, 그 수준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 무태후 때도 25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곡만을 익힐 수 있고, 의상마저 점점 낡고 없어져서 그 원래 풍습을 상실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악기에 오현금·쟁·피리·횡저·퉁소·북 등이 있고 갈대를 불어서 곡조를 조화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치에 대한 기록에 옛말은 ‘디히' 와 ‘지' 인데, 상고시대에는 김치를‘저(菹)'라는 한자어로 표기하고, 침채에서 비롯되어 한제족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제족에서 만든 글자로, 저해·지·염지·지염·침저·침지·엄채·함채, 등이 김치무리로 표기되었으며,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 고구려인은 술빚기, 장 담기, 젓갈 등의 발효 음식을 매우 잘한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이미 저장 발효식품이 생활화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며, 소금에만 절인것이 주된 김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경은 당나라 사람 육우가 쓴 저술로, 경전으로 불리고, 그 상권에 차의 상등품은 상당에서 생산되고, 중등픔은 백제와 신라의 왕가에서 전매품으로 생산되고, 하등품은 고구리 왕가에서 전매품으로 에서 생산된다. 고 나와 고구려 또한 서편 발해만 연안지역에서는 차를 생산하였으며, 나라안 차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반도에서는 대량 차생산이 불가한 토질인데, 비해 대륙의 내륙에서는 상당차와 같은 최상품의 차를 생산했으며, 백제나 신라는 해안쪽의 나라여서 중등품의 차를 생산했으며, 해안이 적은 고구려는 하등급 차가 생산된 것으로 보여 나름 차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옥의 난방은 온돌로 하였음이 고분벽화에서도 보이지만 고구려나 발해 궁실터에서도 나타나는데, 제족은 불의 사용과 함께 온돌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 때에는 취사와 난방으로 나뉘고, 꿀뚝이 보여지며, 철기시대 대에 기역자 형태가 되다가 통구들이 되며, 동북쪽 한족까지도 쪽구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록에 큰 창고는 없지만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이를 부경이라 부른다. 하여 부경은 옥수수를 추수하여 갈무리하는 옥미창으로, 이는 비교적 굵은 나무를 짤라 만든 기둥과 도리, 보 등으로 결구한 구조체를 바탕으로, 지면에서 상당히 높은 곳에 판자를 깐 바닥과 판자로 마감한 벽체로 이루어진 고상구조의 창고 이며, 이러한 창고 그림은 벽화무덤인 마선구무덤에 그려져 있으며, 고구려는 반드시 산곡을 따라 집을 지었는데, 일반 백성들의 집은 초가였고, 절과 신당, 왕궁, 관아들은 기와지붕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겨울에는 장갱을 놓아 그 아래 불을 때서 덥게 지냈다. 하며,
안악제3호분의 벽화에서는 부엌, 고깃간, 수렛간, 외양간, 마굿간 등이 한채 한채 따로 있는 것으로 보아, 기능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졌고, 또 여러채의 집채들이 모여 하나의 저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이는 바로 조선시대의 주택에까지 계승되고 있는 한국주택건축의 특징이 바로 고구려주택에 그 원류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토기는 출토된 예가 매우 드물어 생산과 수요가 많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번조기술 또한 발달하지 못하였고, 낙랑과도 유사하게 도자기보다는 상류사회에서는 목칠기류가 많이 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만달산록의 한 파괴고분에서 발견된 일군의 토기류를 보면, 고구려 토기는 대체로 저화도로 구워낸 연질의 회흑색 토기들이며, 회갈색계의 토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산과 골짜기가 많고 평야가 적은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구려 국민들은 어느 주변국가보다 강인하고 근검했으며, 그 결과로 기원전 1세기부터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흡수하여, 5세기에는 최대의 영토를 갖게 되었는데,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산지를 이용해 철제 농기구를 일찍부터 만들어 농경지 개간에 힘써, 농업과 목축을 발달시켰고, 비옥한 농토와 울창한 산림, 수많은 강과 하천, 풍부한 지하자원 덕에 일찍부터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 반도 동북쪽인 함경도와 황해도 북쪽 요동반도 연안 등의 긴 해안선과 함께 내륙에 큰 강, 하천, 호수들이 많아 수산업도 발달했는데, 기록에 동옥저 전에는 이 같이 긴 해안선을 낀 바다에서 나는 소금과 물고기를 천리길이나 되는 수도 국내성 압록강 상류까지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요동지방과 백두산·두만강 일대에 있는 철광산지에서 철·금·은·동을 생산했기 때문에 철제 수공업이 어느 나라보다 일찍 발달해, 기원전 3세기부터 질 좋은 강철을 제조하는 기술이 발전해 망치, 도끼, 톱, 자귀, 끌, 등의 공구와 가래·괭이·호미·보습·삽·낫·쇠스랑, 등의 철제농기구를 일찍부터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켰습니다.
철제 공구로 수레와 배를 많이 만들어 사용해 경제가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었는데, 반도 북부지역인 황해도, 압록강 이남지역에 산재한 고구려무덤에서 수레용 철제 부품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철제공구의 발달로 수레 제작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레의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굴대통 등 철제 수레 부품들이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 95기 중에서 18기의 무덤 속 벽화에서 40대의 수레와 4개의 수레바퀴, 그리고 수레관련 그림 등이 발견되어 수레를 이용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과 수레의 종류, 특징, 신분별 구분 등을 추정해볼 수 있으며, 이런 수레의 그림들은 357년에서 6세기말까지의 고분벽화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기록에 고구려에서 수레를 사용한 것은 669년 5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이긴 당나라군대가 고구려인 2만8천200명을 데려갈 때 수레 1천80대, 소 3천300두, 말 2천900필을 함께 가져갔다고 적혀 있어, 고구려 후기에도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고구려에서 수레는 대개 귀족들이 이용하고 신분별로 수레의 모양이 구분되었는데, 이에 따른 수레의 치장도 차별화 되어, 남성용, 여성용, 화물운반용의 3가지로 나뉘며, 남성용수레는 주로 왕과 귀족이, 가마방인 지붕 달린 차체가 없는 개방형으로 햇빛과 비, 눈을 막는 큰 차양이 달렸는데, 신분에 따라 수레의 크기, 치장, 의자모양, 색깔이 달랐으며, 신분이 높을수록 크고 화려하고, 여성용 수레는 왕과 귀족들의 처나 첩이 타는 수레로서 대개 가마방이 설치되어 있고, 남성용보다 크기가 작았으며, 여성용 수레도 남편의 신분에 따라 차양의 유무와 수레의 크기가 달랐고, 이 외에도 여성용으로 가마방이 없는 아치형 개방수레가 있는데 사람이 끄는 형태였습니다.
짐수레는 소·중·대형 3가지 크기로 제작되었고 가마방이 설치된 대형수레는 주로 장거리 화물 운반이나 상업, 외국과의 교역에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외에 고려 때부터 널리 사용한 가마도 고구려에서는 수레와 함께 사용했는데, 벽화에 그려진 가마는 귀족의 도성 내 외출용으로 네 사람이 허리높이로 들고 가는 형태입니다.
이 같은 용도 외에 수레를 이용하여 무기를 만들어 전투 때 사용했던 것도 기록에 있는데, 바로 쇠 화살 수레인 차노, 큰 쇠뭉치를 수레에 달아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 적의 성벽을 넘기 위해 접이식 긴 사다리와 높은 곽을 설치한 운제, 돌 투석기를 설치한 포차들이 그것인데, 이러한 수레무기는 원래 수나라와 전투 때 수나라 군대가 쓴 것이었는데, 그 중 고구려에서 포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레기술이 발달한 수레무기 중 포차가 기마병보다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는 소와 말을 많이 키웠는데, 건국 이전부터 농업과 목축업에 힘을 쏟아 소와 말 등 가축을 많이 사육하였으며, 특히 고구려 북쪽지역인 옛날 부여국은 명마산지로 유명해 한제족국도 탐내던 말을 많이 키웠고, 정복한 국가로부터 소, 말, 양, 등 가축을 많이 탈취했는게, 광개토대왕이 395년 유목민인 비려국을 정복하고 수많은 소와 말을 빼앗아 왔고, 479년에는 우량마의 산지로 유명한 부여 지두우를 정복하고 말을 공급하도록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439년에는 800필의 말을 송나라로 수출까지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기록에 645년 안시성 전투 때 15만 명의 고구려군이 사용한 말과 소는 각각 5만 마리라 했고, 667년 설하수(청천강)전투 때도 고구려군 5만 명이 전장에서 말과 소를 각 3만 마리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수레를 끄는 말과 소가 고구려에 많았던 것은 일찍부터 농업과 더불어 목축을 장려한 이유도 있지만, 5세기 들어 아세아 최강국이 되어 더 이상 말이나 소를 조공물로 바칠 강대국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과 소의 많은 수는 자연히 수레사용이 증가하는데, 수레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퀴 만드는 기술로, 귀족들이 타는 수레여서 바퀴제조 기술자는 국가적으로 보호를 받았으며, 고구려에서 목재, 철제품 등 수공업이 발달했던 것은 이 같은 기술자 우대정책에도 힘입었습니다.
바퀴 제조기술은 초기에는 나무바퀴를 쓰다가 5세기에 들어와 철제품 수공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쇠태를 입힌 바퀴로 발전했습니다. 오희 분묘 벽화에 그려진 제륜신이 그 증거인데, 대장간에서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제륜신 옆에 바퀴가 놓여 있어, 고구려 중기부터 튼튼한 쇠태 바퀴를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수레바퀴 제조법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수레와 바퀴의 발달은 고구려의 왕성했던 국내외 상업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쳐, 요동과 백두산·두만강 유역 또는 옛 부여쪽 영토에 풍부한 철광산지를 가진 고구려는 일찍부터 대륙 멀리까지 철, 농산물, 직물 등을 수출했으며, 특히 무거운 철은 사람이나 소·말이 대량으로 빠르게 장거리 운반을 하기가 불가능해, 장거리 수송에 가장 적합한 운반도구가 짐수레여서, 쌀 13가마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컸고, 험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머나먼 거리를 오가자면 수레가 튼튼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러한 장거리용 수레에 안성맞춤이 바로 쇠태 바퀴입니다.
초기 벽화를 보면 짐수레 바퀴가 나무로 만들어져 바퀴의 두께가 두껍고 크며 바퀴살도 굵고 튼튼해, 노면의 충격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바퀴가 크면 클수록 무겁고 험한 길을 다니며 잘 부서져 수명이 짧아, 고구려는 철기문화시대를 맞았던 중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나무바퀴를 쇠바퀴로 바꾸었으며, 고분벽화 속에 나오는 수레바퀴의 대나 살이 모두 가늘고 크게 바뀌는 것은 철제를 이용한 바퀴로 바뀐 증거입다.
고구려는 3세기 초부터 주변소국들을 흡수 확장하면서 국토를 주·군·현 등 지방행정단위로 구분하고 이들 지방행정 중심지와 정부가 있는 국내성을 연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방행정구역을 국내성에서 빠르게 통치하는 정책적 수단과 군대의 이동, 조공물자의 수송뿐만 아니라 국내외 교역을 위한 상품의 신속한 운송을 위해서도 시급했을 것입니다.
길림성 유하현에 있는 나통산성에는 성벽 안팎에서 송화강 유역의 소천안과 연결하는 큰 수레 길의 자취가, 소천안산성에서 송화강 북쪽의 농경지인 큰 평야를 연결하는 수레길이, 요령성 철령시에 있는 최진보산성 성벽 안에서는 4∼8m 폭의 도로가 발견되었으며, 무순의 고이산성 성벽 안팎에도 폭 3m의 수레길이 있고, 이런 성벽 중심의 수레 길은 한반도의 대관성, 평리고성 등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고구려 말기의 수도였던 장안성(평양성)은 고구려 최대의 왕도로서 내성·중성·외성·북성 4개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 외성은 4곳의 거주구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구역 사이에 소로와 대로가 있었으며, 소로(3묘로)의 도로 너비는 3.4m이고, 대로(9묘로)는 너비가 14m나 되는 수레길이고, 또 도로 양쪽 갓길에는 너비 60cm 정도의 하수도까지 만들어져 있었으며, 고구려 초기에는 압록강 상류 서쪽 지역에 위치했던 수도인 국내성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큰 도로를 만들었는데, 북쪽도로는 평탄하고 천산 산맥을 끼고 있는 남쪽도로는 험하다고 나오는데,
고구려의 도로 포장술은 비교적 발달해 대도시 안 거주지역 도로는 잔 자갈이나 깬 돌, 벽돌로 포장되어 있어, 안학궁(평양성) 안 도로, 고이산성 안 도로, 대성산성 앞 도로가 그렇고, 남평양성, 요양(중국)에서는 너비 7m 정도의 포장도로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413년에는 평양성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기 위해 안학궁성 남쪽 대동강에 평양 주대교를 놓았습니다.
평양의 청호동과 휴암동 사이 대동강을 가로질러 놓은 이 다리는 길이 375m에 너비가 9m인 나무판과 돌로 만든 다리로,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 이음법으로 연결한 다리인데 깔판에 난관까지 갖춘 것으로 1,981년에 발견되었으며, 이외에 기록에 668년 당나라의 침입으로 평양성 전투 때 대동강에 사천교와 남교 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고, 평양성 대동강에 통한교와 연우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런 광범위한 도로망을 만들었던 고구려는 초기부터 그 관리에 힘썼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는데, 특히 64개의 성과 1천400촌락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광개토대왕 때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각 성과 촌락들을 통치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대의 도로망을 구축하면서 이들 도로와 수레, 사람들의 통행을 관리하고 먼 거리는 쉬어 갈 수 있도록 역참제도까지 아울러 만들어 시행했을 것으로 봅니다.
또 역참이나 우역제도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같은 시대의 신라가 이미 소지왕 9년(487년)에 우역제도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에 비춰 볼 때, 산라보다 경제나 도로, 수레교통이 더 발달했던 고구려가 일찍 이런 제도를 만들어 활용했을 것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해상교통은 370년 이후 크게 발달하는데, 국토확장으로 바다와 접하게 되면서 해로를 통해 중국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하거나 사신이 오가며, 백제, 가야, 신라를 점령하는데도 해로를 이용했지만, 3세기 초까지 국토가 만주내륙의 일부였기 때문에 바다와 인접해 있지 않은데다 강과 하천만 분포되어 있어 배가 발달할 만한 환경이 못되는 해상교통의 불모지였으나, 국토가 급속히 확장되던 3세기 중엽 황해와 동해북부가 국토와 연결되면서부터 해상교통이 개척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상활동에 대한 첫 기록은 기록은 233년 3월 양자강 하류의 오 나라가 요서와 요동에 있던 공손씨 세력과 동맹을 맺기 위해 서해를 통해 사신을 보냈으나 공손씨 정권의 배반으로 오 나라 사신일부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들어와 목숨을 건진 후 고구려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서해로 귀국했다는 기록입니다.
해상교통은 370년 이후 급속히 발달해, 과거에는 대륙을 통해 한제족국과 교역을 했지만 국토확장으로 바다와 접하게 되면서 해로를 이용해 대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하거나 사신이 오갔고, 해상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물자의 대량수송도 가능해, 전성기인 5세기초에는 요동반도 해역인 발해만과 한반도 서해를 거처 제주도에 이르는 해역을 장악하고, 일본까지 왕래할 수 있었습니다.
해상교통개척은 수군의 활동도 크게 도왔는데, 396년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인솔해 압록강어구에서 출발, 서해로 남하해 한강으로 들어가 백제를 공격했으며, 404년에는 고구려 수군이 역시 압록강 어구에서 해로를 통해 산동반도로 들어가 전연국 지역을 공격했고, 5세기 초에는 함경도 연안에서 동남해로 진출해 왜군을 격퇴했으며, 607년에는 서해로 후백제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수군 활동과 대외 교역, 인접국 사절 파견 등으로 고구려의 항해술과 조선기술은 계속 발달하는데, 특히 대규모의 수군이 이동하려면 군용선과 무역을 위한 해양선이 절대 필요했으며, 최대의 국토를 가졌던 5∼7세기의 고구려는 발해만·동해·서해의 큰 바다를 접한 것은 물론 내륙의 유통을 위해 흑룡강·송화강·압록강·두만강·대동강 등 수많은 큰 강들과 호수 등을 이용해 내륙수상교통도 함께 발달하였으며,
내륙의 수많은 강에서는 뗏목 배와 작은 목제 구조선이 이용되었는데,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성의 대동강을 타고 다니던 배는 갈대로 엮은 지붕을 씌운 작은 누선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배는 평저선에 돛이 없고 노를 저어 가는 노선일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해운선은 많은 짐과 사람을 운반하는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큰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사람이 수십 개의 노를 저어야 하여, 노를 젓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잡혀 온 노예나 하층 계급인들이었습니다.
조선술은 고조선시대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동과 산동반도를 해로로 왕래했던 경험과 내륙 수로를 이용했던 경험, 그리고 대륙 한제족과 해상교역을 하면서 선박 제조기술과 항해술 등이 발달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이와 관련해 235년에는 2년 전 공손씨 세력에 죽을 뻔했던 오 나라 사신을 구해준 대가로, 당대 오 나라가 보물을 배로 싣고 와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바치자, 그 답례로 동천왕이 수백 필의 말을 주었지만 오 나라의 배가 작아 80필밖에 못실자 고구려의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338년에는 대륙의 후조국이 고구려와 합동으로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전연국을 치기 위해 300척의 배에 300만 두의 곡식을 싣고 와 고구려를 도왔다는 기록도 있어, 고구려가 한제족들의 배의 제조술을 접하고 서로 배울 기회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439년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지나 해역과 접해있던 송나라로 한꺼번에 800필의 말을 해상 운반했다는 기록을 보아도 큰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기술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2세 유리왕 때 왕도를 첫 도읍지인 만주 내륙 졸본에서 압록강에 인접한 국내성으로 옮긴 이유중의 하나는 압록강의 수로를 이용해 바다로 진출하고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조공물 등 각종물자를 수로를 이용해 대량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으며, 백제와 가야, 왜군을 치기 위해 고구려 수군이 거의 압록강 어구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을 보아도 고구려의 조선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으며,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국내성과 인접한 압록강변이나 압록강어구 또는 요동반도 끝의 비사성 근방, 후기 도읍지인 평양성의 대동강 어구 등에 조선장이 많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띄우려면 나루터나 항구 등의 정박시설이 필요한데, 강변에 배를 세우는 곳을 나루, 해변에 큰배를 정박시키는 곳을 항구라 하며, 강 너비가 300보(약 540m)인 압록강과 요하, 대동강, 송화강 등의 강변에는 나루와 나룻배가 많았고, 바닷가에는 큰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여러 곳 있었다고 기록에 나오고, 실제로 국내성 터 남쪽강변에 배를 매어두는 돌이 발견되었고, 압록강 입구 안동시 북쪽 강기슭에서도 부두를 만들었던 석축시설이 발견되어 고구려에 항구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 후기 평양성에 대동강을 연결하는 운하까지 만들어졌음을 유적으로 알 수 있는데, 20세 장수왕 때 472년 요양에서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 대동강의 수상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평양 근처에 운하와 갑문까지 만들었는데, 조선 유적유물도감에 보면 평양 청암리성 동문 근처에는 배가 성안으로 드나들도록 작은 운하를 만들었고, 평양외성에서 중심까지 3km의 운하를 팠다는 기록이 있어,
대동강의 조수가 늘면 물이 이 운하로 들어와 갈대 지붕을 씌운 나룻배인 노선들이 물자를 싣고 중성까지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운하는 조공물이나 왕궁에서 필요한 물자를 신속하게 왕궁내 창고까지 운반하기 위한 것이며, 평양 외성 밖 평천구역에는 보조 운하까지 만들어졌는데, 너비 10m의 축석 운하로, 큰 운하에 배들이 찼을 때 사용하기 위한 비상용이었던 것이고, 평양 외성 운하입구인 다경문에는 큰 판석으로 축조한 갑문시설도 있어, 조수의 간만에 관계없이 운하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해 항상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