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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인도를 하고 말씀 전하는 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동안 성호 형제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을 하고 조금 반성하면서 정상인 될 때까지 제가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양해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난주 은퇴 목사님과 제가 좀 통화를 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안부를 이렇게 나누고 대화 중에 목사님이 저에게 남 목사 하나님께 잘 보여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한 목사 하나님께 잘 보여 저는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정말 제 마음에 이렇게 새겨졌어요. 그리고 제 눈이 한참 동안 이렇게 촉촉해져 있었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런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어요. 만약에 제가 다른 분에게 들었으면 좀 기분이 나빴을 텐데 어쨌든 은퇴하신 목사님이고 목회 선배이시고 또 연세도 많은 목사님이 이제 따지면 그분에 비하면 아주 어린 후배인 거죠. 후배에게 목사 하나님께 잘 보여 이렇게 하는 말이 정말 가슴 깊게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참 은혜가 많았던 주간입니다.
이제 옆 사람과 우리 인사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겠습니다. 시작
의지가 안 보여서 다시 하겠습니다. 잘 보이겠다는 의지가 안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인사할 텐데 앞에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시고 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하나님께 잘 보이겠습니다. 시작
네 감사합니다. 그럼 하나님께 잘 보이는 것이 도대체 어떤 걸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잘 보일 수 있을까요? 여러분과 제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보고 흐뭇해 하시면서 이렇게 기뻐하실까요?
오늘 말씀은 지금까지 저의 삶과 그리고 경험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한 세 가지 정도로 나누고 함께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범죄하지 않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를 아주 싫어하시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 보통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니까 그 말씀이 벗어나니까 죄라고 하는 거겠죠.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짖지는 않아야 하나님께 잘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의 삶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셔요. 그 말씀대로 노력하는 영혼을 아주 기뻐하십니다. 출애굽기 32장 33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책 생명책이겠죠. 우리의 우리 영혼이 구원받았느냐 구원받지 않았느냐를 기록해 놓은 두루마리 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지워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범죄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허락할 마음이 전혀 없으신 분이에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하는 교회와 영혼에게 사람에게 그런 생명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내어주실 생각이 없으시기 때문에 범죄하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버린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도 미워하시고요. 죄를 짓는 사람도 미워해요.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도 멸망시켰고요. 소돔과 고모라 안에 있는 사람들도 멸하셨어요. 범죄한 인류를 인류도 홍수로 멸하시고, 그리고 지구도 하나님께서 다 쓸어버리셨던 거예요. 하나님은 죄도 싫어하시고 죄를 짓는 사람들도 싫어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13장 13절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시작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그 소돔과 고모라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지었어요. 그러니까 그 안에는 아주 많은 죄가 있었고 아주 큰 죄가 있었다는 의미예요. 큰 죄라는 것은 아마 여러분과 제가 상상하지 못하는 큰 죄가 있었고, 재의 종류도 너무 다양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도시도 불태우고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도 불태우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6장 5절 말씀도 함께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킨 것은 인류 가운데 죄가 가득했기 때문인 거예요. 심지어 생각하는 것도 죄가 가득했고요. 그리고 계획도 전적으로 죄로 오염됐다는 거죠. 오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희망 없음을 세상에서 보셨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죄도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던 모든 것들도 다 물로 덮기로 작정하시고 홍수를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혼은 죄와 싸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영혼이에요. 교회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좋은 거죠.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진짜 싸워야 될 것은 죄와 싸우는 거죠. 그러니까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광야 40년이 연단의 시간이었죠. 연단의 시간에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저질렀어요.
여러분 사람이 연단 받을 때 한눈 팔기가 쉽지 않아요. 내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 중에 다른 곳에 눈을 팔기가 쉽지가 않아요.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악했냐 하면 연단 중에도 한 눈을 팔았어요. 하나님이 아닌 우상 숭배를 섬길 계획을 세우고 작정을 하고 실험을 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질병으로 고통스러우면 하나님 외에는 생각나지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요?
내가 징계 중이라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이 내 눈에 들어오지 말아야 정상이죠.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징계의 시간이잖아요. 20살 이상이 다 죽을 때까지 그냥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거예요. 그들이 다 죽었을 때 드디어 하나님이 가나안의 문을 여시고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여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단의 시간에도 범죄할 만큼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라는 범죄와 싸우지 않았고요. 결과적으로는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3천 명이 죽게 됩니다. 아론을 통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아니 금송아지 섬긴 것도 악한데 그 금송아지를 하나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지목하고 금소마지를 섬겼던 거예요.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보물이나 이런 것들을 다 가져 나오게 했어요. 원래 이 보물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과 금과 패물들은 성막을 짓는 데 사용하게 하시려고 가져나오게 하신 거예요.
근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가지고 우상을 만들었던 거예요. 당연히 하나님이 좋게 보실 리가 없죠. 아니 심판의 시간에도 우상숭배를 할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성막을 짓기 위해서 가져오게 한 물건으로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좋게 보실 리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정말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요. 죄와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 갈 것이 결국 세상으로 가더라도 우리가 왜 죄와 싸워야 되냐 하면 내가 범죄와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잘못된 행위와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야 될 영광이 세상으로 가고, 하나님께 가야 될 물질이 곧 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야 될 영광과 예배가 결국 사람에게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와 싸우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아는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방치하는 교회와 성도를 기뻐하지 않아요.
자기 가정에 죄가 있는 걸 방치하는 것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있는 죄가 안 보이나요?
보이죠 우리 교회 중에 성도들 중에 자기 가정에 있는 죄가 안 보일 정도로 정말 신앙생활이 엉망인 사람은 저는 개인적으로 한 명도 없다고 봐요. 제가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죄와 싸우지 않는다는 건 우리 가정에 머물고 있는 그 죄를 방치한다는 의미.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있는 그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신다는 거예요.
이런 거죠. 결국 죄를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삶이 되는 거예요. 죄를 버려두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의미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방치하지 말아야 됩니다.
가장 좋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성도의 삶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온전하게 예배해야 됩니다. 시편 29편 2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여호와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
하나님의 행하심에 합당한 예배, 하나님의 존재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는 거예요. 중요한 건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고 우리에게 예배를 명령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말 진심으로 예배하는 성도와 교회를 기뻐하는 거예요.
우리 식당에 가면 밥의 진심이라는 교회라는 이렇게 표가 이렇게 붙어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 와서 밥이 맛없다 이렇게 하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 권사님들이 정말 이렇게 잘 만들기 위해서 심지어 식당에서 막 싸우기도 하시더라고요.
어떻든 엄청 감사해요. 이거 농담인데 안 웃어주면 사람들이 진짜 웃는 걸로 착각하잖아요. 어떻든 간장을 더 넣어라 소금을 빼라 어떻든 뭐 이렇게 하셔요. 그래서 매주 보면 음식이 정말 맛있어요. 우리가 바에도 진심이어야 되지만 목장 교회는 정말 예의 예배의 진심인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수준에 맞는 예배를 드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준에 맞는 예배를 드리라는 거죠. 예배의 준비, 예배의 형식, 예배의 자세, 예배의 태도, 예배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수준에 합당한 것으로 준비하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또 우리가 질문이 되잖아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올린 찬양이 하나님께 합당한 건지 오늘 우리가 드린 예배가 하나님께 합당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니 이걸 알아야 우리가 내 예배를 고치거나 수정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인데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하나님이 공동체와 그 영혼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임재가 예배 가운데 정말 다양하게 나타나요. 어떨 때는 말씀으로 역사하시기도 하고 어떨 때는 형언할 수 없는 정말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주시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들에게 그동안 눈물로 기도했던 기도 제목들을 응답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이 예배를 기뻐 받으셨다. 우리 예배를 기뻐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 가운데 보여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최소한 교회를 오잖아요. 예배를 드리잖아요. 만약에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이 작정만 굳이 교회를 더 잘 섬기겠다 이런 마음도 조금 내려놓으시고 내가 정말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올 한 해 동안 드려보자.
여러분 이 다짐만 가지고 오늘 한 해를 살아보십시오. 여러분 섬기지 말라고 해도 섬길 거고요. 봉사하지 말라고도 봉사할 거예요. 아니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이 헌신을 결단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들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또 다른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이런 거죠. 평소에 나의 예배와 다른 뭔가가 나에 있었는가 이것만 좀 체크해 봐도 돼요. 하나님이 기적으로 또 말씀으로 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어떻든 평소에 예배하는 것과 다른 어떤 감동이나 은혜가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셨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어요.
여러분 귀신을 본 적이 있나요? 저는 본 적이 왜 있어요?
그런데 이게 멀리서 봐도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제가 그 실체가 진짜 귀신인지 알기 위해서 그 마을에 찾아가서 그 동네에서 다 물었어요. 정말 이런 사람이 있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없다고 했고 그 동네 위치상 그렇게 젊은 사람이 거기 밤에 있을 리가 없었어요.
저도 한번 귀신을 경험한 적이 있어요. 근데 여러분 귀신이 옆에 있어도요. 느낌이 달라요.
근데 하나님이 임재하셨는데 평상시와 똑같은 느낌일까요?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이 예배 중에 말씀으로 어떤 능력을 우리 가운데 인지하셨어요?
나와 함께 이 자리에 계셔요. 그것을 못 느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이 이것이 우리가 드린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수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그런 하나님의 임재를 잘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다는 거죠. 하나님의 수준에 맞지 않거나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거나 온전하지 않은 예배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자리에 예배를 드렸지만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 거죠. 예배 전체의 개념보다는 누구누구의 예배를 안 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에요. 그런데 내가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 해당되는 몇몇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인재를 나타내지 않으셨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지하셨느냐 인지하지 않으셨냐를 어느 정도 충분히 때로는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가 3장 44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주께서 구름으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것을 그것이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그게 예레미아 에가의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합당하지 않는 기도가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을 막으시는 분이시고, 합당하지 않는 예배와 찬양이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을 막으시는 분이에요.
엄청 두렵고 무섭죠. 그죠?
하나님이 친히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예배자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신다는 겁니다. 에스겔 8장 18절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지금 에스겔은 바벨론에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엘에게 조국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어요. 그러니까 에스겔 8장 18절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열정이 하나님께 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라는 다 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을 포로로 잡혀가고 폐가 된 성전에서 그 예루살렘에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정이 예배가 하나님께 향해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막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부르짐을 듣지 않았다고 내가 안 들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배가 막힌 이유예요.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도 막으시고 우리의 기도도 듣지 않으시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자로 부르셨고 예배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최고로 해야 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게 우리의 업무 일이잖아요. 이걸 막으신다는 거죠. 합당하지 않으면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가 어떤 성도냐 하나님에게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날마다 싸우고 애쓰고 노력하는 성도인 거예요.
여러분 만약에 올 한 해 동안 여러분이 저와 함께 올 해가 나는 예배자가 우리 교회의 주제잖아 표잖아 올 한 해는 표요잖아요. 정말 예배를 잘 드리는 일에 한번 집중해 보십시오.
여러분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하나님이 연납한 예배와 하나님 열납한 찬송과 하나님 열납한 기도는 완전히 달라요. 그것을 우리가 경험해야 그다음부터는 그 수준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정말 애쓰고 수고하고 우리가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나이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 소유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어요.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에 여인의 뜰이라는 곳이 있고요. 그 여인의 뜰에는 트럼펫 나팔 모양을 한 헌금 박스가 13개 정도 이렇게 나란히 놓여져 있어요. 헌금 박스의 목적은 다 달랐어요. 어떤 건 성전 세 이렇게 해서 성전 수리하는 데 쓰이는 이렇게 새 해서 들어갈 때마다 거기에 헌금을 하고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어요. 이 렙도는 그 당시에 가장 최소의 화폐 단위예요. 그러니까 하루 품사 하루 품삭의 128분의 1입니다. 계산을 하면 하루 품사이 15만이라고 하면 한 렙도는 1170원이고요. 두 랩돈은 23 40원이에요. 그러니까 정말 작은 금액을 이 여인이 넣었는데 하나님이 이 여인의 헌금을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그런지 이것도 좀 살펴봐야 돼요. 이 당시에 자료를 보면 유대인들은 어떤 생각이 있었냐면 자신의 경제 규모에 맞게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그게 성도의 명예다. 그러니까 내 수준에 맞게 하나님께 헌금을 하자.
여러분 생각해 보면 되게 맞는 말 같죠. 내 소유에 맞게 헌금을 하자. 내 수준에 맞게 헌금을 하자. 내 형편에 맞게 헌금을 하자. 어떻게 보면 엄청나게 맞는 말처럼 보여요. 근데 문제는 거기에 있었던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전은 다 무너져 가고 있었는데 성전이 파괴된 곳이 많았는데 더해서 수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자기 규모에 맞는 헌금을 하는 데만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예수님이 이걸 미워하고 싫어했던 거죠. 그러니까 내 수준에 맞게 했던 것을 기쁘게 여기고 그게 전부라고 여기며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회적인 통념과 종교적인 통념을 깨기 위해서 이 한 여인의 삶을 부각시킨 거예요.
이 여인은 두렵돈 비록 작은 돈이지만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가부가 전부를 넣었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또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강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헌금의 습관과는 완전히 다른 거죠.
유대인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헌금을 하는 걸 되게 명예롭게 여겼어요. 그러니까 천만 원의 부자가 만 원 헌금하는 걸 되게 명예롭게 여겼어요. 그래서 어떤 소유가 있고 어떤 하나님의 부름이 있어도 그 이상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예요.
이런 거죠. 성전을 여전히 수리할 공간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은 넘쳐나는데 더 이상 뭔가를 해서 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서 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꼬집고 있는 거예요. 봐라. 이 여인은 정부를 넣었다. 두 렵돈인데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너희도 이 여인의 자세를 취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보다 헌금을 더 많이 하라 이런 개념이 아닌 거예요. 이 여인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니까 스스로 헌금을 제한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필요에 맞게 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피로에 맞게 헌신하라 이런 의미인 거죠. 하나님 피로 아무 상관없이 내 뜻과 내 주관대로 세상을 살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면 주관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주관을 자기 신앙으로 여겨요.
목사님 저는 주관이지 과연 그게 신앙일까요?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30년 동안 여러분 그게 과연 신앙일까요?
대부분은 주관인 거죠. 그런 모습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을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신앙이 아니라고 여겼던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이 여인의 삶을 부각시켜서 종교인들과 부자들을 이렇게 꼬집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왜 가난한 가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을까?
이거 바보 아닐까요? 왜 전부를 넣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는 있죠. 너무 작으니까 전부를 넣든 적게를 넣든 큰 이유가 없을 수 있잖아요.
근데 그 당시의 관례로 보면 자기 생활의 수준에 맞게 넣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 거니까 이 여인의 현금은 어쩌면 훨씬 더 줄어들었겠죠. 우리 말로 따지면 1원 2원 10원 정도일 수도 있어요.
근데 왜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자기 두 랩돈을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냐는 거죠.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 때문인 거죠.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키지 않아야 돼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나 하나님을 섬길 때 자꾸 자기의 상황을 대입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상황을 대입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 너무 어려운데 난 지금 힘든데 이렇게 대입해버리니까 순종할 일이 없어지는 거예요.
교회 안에 교회가 순종할 일이 자꾸 생겨나요. 하나님의 교회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하실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리 하고 싶어 하실 거겠죠. 근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내 상황을 자꾸 대입시켜요. 그러니까 결정을 할 수 없는 거 지금보다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이게 평생 인생의 문제가 있잖아요.
여러분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문제가 없는 삶이 어느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 모든 상황에 다 문제를 대입시키면 헌신할 수 없는 거죠. 기쁘게 하나님께 기도의 자리에 나올 수 없고,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없고, 예물을 드릴 수 없고 교회를 봉사할 수 없는 거예요. 상황을 대입시키면 올리기 힘드니까 교사 올리기 힘드니까 이건 좀 내려놓고 올리는 어려우니까 이거 저 저거 이렇게 적용하다 보면 평생 동안 우리는 핑계만 댈 뿐이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좋게 보시는 그런 결단과 헌신은 우리가 못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이 얼마 남으셨어요?
여러분 한 번쯤은 하나님이 좋게 여기신 일을 하셔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 여러분을 보시고 조만간 하나님 만날 텐데 하나님이 좋게 여기는 모습을 한번 우리가 보이고 이 땅의 삶을 하직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근데 우리는 평생 상황만 대입한 거죠. 헌신할 시간에 또 올해 내 경제 상황을 대입하고 올해 가정의 어려움을 대입하고 자녀의 문제를 대입했더니 매년 매년 핑곗거리가 생기고 핑곗거리는 평생 있는 거잖아요.
여러분 인생의 핑계는 평생 따라다녀요. 한 번도 핑계 없을 수가 없어 그게 인생의 문제인 거죠. 죄 지은 인류의 결과인 거예요. 한 번도 핑계 대지 못하는 상황이 없을 정도로 다 문제가 있는 게 인생이에요. 결국 헌신의 상황을 대비시키니까 헌신을 못하는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돼요.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고 부자는 부자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 잘 보였다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신앙생활을 스스로 평가해요. 나 잘했다. 나 이 정도면 목사로서 잘 살았다. 여러분 스스로 평가하는 사람이 과연 객관성이 있을까요?
없죠. 그래서 시험은 스스로 평가하지 않는 거예요. 시험 먹이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예요. 스스로 평가하는 시험은 아무 공정성이 없는 시험인 거죠.
근데 성도들이 스스로 시험을 자꾸 평가를 해요. 점수를 매겨요. 자기 신앙과 자기 인생에 자기 예배에 스스로 점수를 먹여요. 아니죠. 말씀을 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지금 요한복음 임하고 있는지를 보라는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들 중에 그분들이 자존심이 낮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나쁜 점수를 주는 분이 좀 좋아요. 우리 권사님들 중에도 보면 매일 지나칠 정도로 목사님 저는 죄인이에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물론 너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 좋은 점수를 줘서 스스로 좋게 평가하고 그런 분들보다는 몇 배 몇십 배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좋은 평가를 줄 수 없어요.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신 분이라 내 노력에 좋은 평가를 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자꾸 평가를 됐다 좋다 잘했다. 여기까지만 하면 된다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 거죠. 나를 안 봐주시면 어떡하지 하나님이 나에게 실망하면 어떡하지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떡하지 저는 목회할 때마다 그런 마음이에요.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나 어떡해요 하나님이 목회자 목회자가 완벽할 수 없잖아요. 노력해도 힘들어요. 제가 200~300명 되는 성도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 맞추고 목회를 할 수 있으면 못해요. 함께 몇십 년 살아온 아내의 마음도 다 몰라서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목사가 어떻게 성도 수백 명을 다 알고 그 마음을 다 맞춰서 제가 목회할 수 있어요.
불가능한 일인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정말 스스로 저를 돌아봐 하나님이 나를 나를 향했던 궁율의 손을 걷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래도 내 인생에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고 여기까지 함께해 오셨는데 이 은혜의 손길을 하나님이 걷어버리면 어떡하지 이 마음이 저에게 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여러분 요즘 가장 큰 화두가 두 개가 있어요. 하나가 AI예요. AI 논문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AI가 엄청 도와주기 때문에 논문도 쓰는 게 어려운 일이 최근에 어떤 논문 AI가 하나 만들어졌는데 어쨌든 잘 설정해 놓으면 한 80페이지까지는 기본적으로 논문을 AI가 다 만들어서 이런 거죠. 뭐 이렇게 몇 페이지까지 각 줄은 몇 개 또 자료는 어떤 어떤 자료 이렇게 다 이렇게 해서 명령을 내리면 80페이지 정도의 논문은 만들어요. 그냥 그래서 그냥 우리가 우리도 그냥 한 두 번 정도 명령을 하면 웬만한 수준의 논문은 우리가 쓰는 것보다 더 낮게 만들어져요. 하나가 이제 AI예요.
두 번째가 주식이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지금 코스피가 6천이 넘었나요? 엄청나게 많이 넘었잖아요. 어떤 목사님이 자기 글에 그러더라고요. AI와 주식의 시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뭘까? 저는 이분의 이제 지적에 정말 감동 감격을 했어요. 교만이라는 거예요. AI의 핵심이 교만이고 주식의 핵심이 교만이라는 거예요. 성도가 교만한 새야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거예요. 언제 이 말씀에 대해서 제가 잠깐 전할 날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분의 그 평가를 정말 마음으로 잘 받아들였어요.
이런 거죠. AI와 주식이 하나님께 잘 보이려는 성도의 마음을 다 빼앗아 갔고 에와와 주식이 성도들을 교만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결정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거죠. 우리 교회 주식이 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주식이 많이 올랐죠.
여러분 그 옳은 주식으로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결정을 내려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래서 교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래서 너무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됐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 자신에게 나쁜 점수를 주는 사람이 전부를 요구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여러분 전부를 요구한다니까 막 겁나시죠 그래서 막 아멘 안 하고 이런 건 아니시죠?
여러분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에게 나쁜 점수를 주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어요. 여러분 오늘은 조금 나쁜 점수 줘보세요. 그리고 그 붙잡고 찬양 위에 한번 기도해 보세요.
마무리합니다. 일부는 일부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고요. 전부는 전부의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다른 거죠. 일부로 헌신하는 사람은 일부의 은혜를 누리는 거고요. 전부로 헌신하는 사람은 전부의 헌신을 은혜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저는 바라꿈대 우리 성도들이 전부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