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나는 한 때 내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떤 흠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해와 포용으로 감쌀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일부러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을거라고, 혹은 그렇게 나쁜 마음을 품은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온갖 타협과 상상을 끌어모아 앞에 있는 사람을 미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가장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저는 단지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는 저의 생각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곤 제가 만든 이상적인 인간틀에 모든 이를 어떻게든 끼우려고 애썼을 뿐이었죠. 또 모순적이게도 저는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영웅심리에 취한 위선자였던 것이죠.
“정말로 흑인 애인이란다. 난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래서 때로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지……”
책의 주인공 딸에게 흑인의 변호를 맡은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책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남부로, 흑인에 대한 차별이 난무하던 때였습니다. 흑인을 변호하는 아버지는 그 지역 모든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비난을 받았지만 흑인 변호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 대목을 보고 콧방귀를 꼈습니다. ’어디 그게 가능하기나 할 것 같아? 너도 나같이 위선자가 되어있을 거야!‘
하지만 책을 읽을 수록 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변호사 아버지는 저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도 사랑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난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어.
아빠, 아빠가 잘못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음,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옳고 아빠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그들에겐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 줘야 해.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그는 흑인을 싫어하는 사람을 욕하지 않았고 그들의 권리를 존중했습니다. 또한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고 주먹을 내려놓았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하나님과 양심을 선택했고 굳건히 그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는 그저 행동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자극했습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물론 변호하던 흑인은 유죄를 받았고 도망치려다 사살을 당했습니다. 드라마틱한 결과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미미하지만 큰 효과를 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흑인의 입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흑인은 싫어하지만 변호사를 돕는 사람도 나타났고 평소라면 몇분안에 내려질 선고가 몇시간에 걸쳐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뎌졌던 사람들의 양심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어떻게 의견이 대립하는 사람의 생각을 존중할 수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변호사 아버지는 옳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배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고 행동하는 방법을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고 정말로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양심이 곧 진리라는 것에 확신했기에 조급해 하지도, 주먹을 들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이 변호사의 방법을 보고 제일 먼저 기독교인의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한 기독교인으로서, 한 종교인으로서 살아갈 때 세상에 것과 엄청난 부딪힘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성을 내고 주먹을 드는 일은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강요와 압박으로 거부감을 일으킬 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모두가 옳은 시대에서 과연 절대 진리를 가진 우리가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