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813)
■ 3부 일통 천하 (136)
제12권 사라지는 영웅들
제 15장 두 사나이 (11)
그 무렵, 제민왕을 죽이고 거성을 차지한 요치(淖齒)는 연(燕)나라 군대가 전단(田單)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했다.
'화(禍)가 여기까지 미치지나 않을까?'
그의 이러한 두려움은 막연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단(田單)의 승리가 전해지면서 실제로 거현 일대에서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왕손가(王孫賈)였다.
그는 제민왕(齊湣王)이 요치의 손에 참살당했을 당시 재빨리 거성 밖으로 달아나 인근에 숨어살며
군사들을 모았다.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에 즉묵성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나설 때다.
왕손가(王孫賈)는 4백 용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한 후 밤의 어둠을 이용해 몰래
거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 정면으로 싸워서는 초군(楚軍)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은 요치(淖齒)가 머무는 별궁만을 집중 공략하기로 했다.
일반 백성으로 가장하여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모두가 잠든 틈을 이용해 별궁의 담장을 넘었다.
이들의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초군(楚軍) 병사들이 별궁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암흑 속에서 들려오는 난데없는 함성과 발소리,
징소리 등에 그들은 글자 그대로 혼비백산이 되었다.
제(齊)나라 대군이 쳐들어온 줄로 알았다.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왕손가(王孫賈)는 선두에 서서 외쳤다.
"요치(淖齒)만을 노려라. 달아나는 초군은 뒤쫓을 필요 없다!"
왕손가를 비롯한 4백 용사들은 궁문을 부수고 별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요치(淖齒)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역시 제(齊)나라 대군이 기습해온 것으로 알았다.
호위 무사를 불렀으나 이미 모두 달아난 뒤였다.
요치(淖齒)는 칼 한자루만을 거머쥔 채 뒷문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별궁의 구조를 잘 아는 왕손가는 진작에 그 곳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놈, 우리 왕을 죽이고 네가 무사할 줄 알았느냐!"
왕손가(王孫賈)는 천둥소리 같은 외침과 함께 칼을 내리쳤다
요치(淖齒)는 왕손가의 부릅뜬 눈에 질려버린 상태였다.
칼이 날아오는 줄 알면서도 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선 채로 고스란히 그 칼을 맞았다.
목이 떨어지고 피가 튀었다.
왕손가(王孫賈)가 그 목을 칼에 꿰어 별궁 밖으로 나갔다.
- 초군 대장 요치(淖齒)의 목이 여기 있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겠다.
뒤늦게 별궁에 난리가 난 것을 눈치챈 초(楚)나라 군사들은 대장 요치의 목을 보자 반은 달아나고 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투항했다.
즉묵의 영웅 전단(田單)이 당도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전단은 왕손가의 손을 움켜잡았다.
"고생이 많았소."
"모든 게 장군의 힘이었습니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요치(淖齒)는 도망갔거나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기쁨과 감격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세자께서는 어디 계시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민가에 나가 찾아봐야겠습니다."
두 사람이 세자 법장(法章)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심복 부하 하나가 들어와 전단에게 말했다.
"태사 교(敫)가 세자라는 분을 모셔왔다며 만나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전단(田單)과 왕손가(王孫賈)는 귀가 번쩍 트였다.
달려나가 보니 태사 교(敫)의 모습이 보였고, 그 곁에 허름한 농부 차림의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차림은 허름했으나 틀림없는 세자 법장이었다.
전단(田單)은 눈물을 글썽이며 법장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하늘의 도움을 받으사 세자께서 이렇듯 무사하시니, 아직 우리 제(齊)나라는 망하지 않으려나 봅니다."
그들은 법장(法章)을 새옷으로 갈아입히고 수레에 태워 도읍 임치성으로 향했다.
마침내 세자 법장(法章)은 임치성 왕궁에 당도했다. 그때는 모든 신하도 임치로 돌아와 있었다.
전단(田單)과 왕손가(王孫賈)의 주도하에 그들은 법장을 왕좌에 앉혔다.
그가 바로 제양왕이다.
제양왕(齊襄王)은 BC 279년에 왕위에 올랐다.
제민공이 죽은 지 4년 만이다. 그 사이 제나라에는 왕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사가(史家)들은 그 공백을 소급해 BC 282년을 제양왕 원년으로 삼고 있다.
공백 기간에 군주를 대신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제(齊)나라는 연(燕)나라 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했다.
제양왕(齊襄王)은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린 전단(田單)을 일등공신으로 삼고 그 공로를 표창했다.
- 전단 장군이 처음으로 이름을 드날린 곳이 안평 땅이니 과인은 그를 안평군(安平君)으로 봉하고,
안평 땅 1만 호를 식읍으로 내리는 바이오.
왕손가(王孫賈)의 공도 적지 않다 하여 그를 아경 벼슬에 올렸다.
제양왕(齊襄王)에게는 잊지 못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무귀 땅에서 연인으로 지냈던 태사 교(敫)의 딸이었다.
"실은............."
전단을 불러 자신의 비밀 사랑을 고백했다.
전단(田單)은 사람을 보내어 태사 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딸을 임치로 올려보내라 지시했다.
태사 교(敫)는 전단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기 딸이 세자 법장과 몸까지 섞는 관계를 맺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딸을 불러 앉혀놓고 크게 꾸짖었다.
- 너는 중매도 두지 않고 혼자 시집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 집안 법도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부터 내 딸이 아니다.
이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 대면이다.
- 너는 임치로 올라가되 결코 나를 찾지 마라. 나 또한 두 번 다시 너를 보지 않으리라!
태사 교(敫)의 딸은 하염없이 눈물을 뿌리며 무귀를 떠나 임치로 올라갔다.
제양왕(齊襄王)은 전단을 중매로 내세워 혼례식을 거행하고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
그 후 제양왕은 태사 교를 국구(國舅)로 대접하며 높은 관직을 내렸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왕후 역시 친정으로 사람을 보내어 때마다 문안 인사를 올렸으나 태사 교(敫)는 끝내 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작은 일이지만 자신의 가문의 전통을 지키려는 한 선비의 자긍심과 고고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본능인가.
옛사람은 말했다.
-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곳으로 향하는 것은 인(仁)이다.
맹상군(孟嘗君)이 그러했다.
그는 비록 위나라에 머물며 재상직에 올라 있긴 했으나 한시도 고국인 제(齊)나라를 잊은 적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제나라로 돌아갈 궁리만 했다.
그럴 때에 제민왕(齊湣王)이 죽었다.
전단(田單)이라는 사내가 출현하여 나라를 구했다고도 했다.
- 옛날 강태공 여상(呂尙)이 제나라 영구에서 살았건만 주나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을 이제야 알겠구나.
나 또한 이제는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맹상군(孟嘗君)은 사직의 뜻을 밝히고 위나라 재상직을 신릉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모든 재산을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준 후 미련없이 대량(大梁)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제나라
설(薛) 땅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 대도(大道)의 길.
모든 권력과 명예와 부에 대해서 초월했다고나 할까.
그는 설읍(薛邑)에 머물며 은거나 다름없는 생활로 들어갔다.
유일한 낙(樂)이라면 평원군, 신릉군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가는 일이었다.
제양왕(齊襄王)은 맹상군의 경륜과 덕과 인맥을 황용하기 위해 재상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나
맹상군(孟嘗君)은 정중히 사양했다.
-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타국에 나가 있던 사람이 어찌 다시 벼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이후 맹상군(孟嘗君)은 설읍과 대량을 오가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편안히 이 세상을 하직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가 생전에 보여주었던 높은 의협 정신을 두고두고 기렸다.
- 전국사군(戰國四君) 중 으뜸되는 이는 맹상군이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