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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린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온누리
적확법사(的確法師) 운곡(芸谷)스님(1)
운곡(芸谷)스님은 홍천 안양사(安養寺)에 주석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정통종단이며 전통종단이고 장자종단인 태고종의 승려와 전법사(교임) 그리고 신도들의 신행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서 아직 일어나자 않은 나쁜 것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잡아주고, 이미 벌어진 나쁜 일들은 종헌 종법에 규정한 규칙에 따라 정리해 스스로도 바르지 못한 것은 바로잡고 다른 이에게 나쁜 것들이 퍼지지 않게 하는 중앙사정원(司正院)의 원장으로 계시는 종단의 큰스님이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군법사로 봉직하면서 역시 동국대학 교육대학원에서 교육철학을 전공한 학승(學僧)으로서 우리 태고종 종립대학이며 불교계 최초의 본격적인 교양대학인 동방불교대학(東邦佛敎大學)의 교수로 지금까지 수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원불교대학,원주불교대학 등 유수한 불교대학과 전국의 각 사찰 및 군법당을 가리지 않고 전법포교하면서 정확한 개념과 예증을 제시하는 법사스님으로 정평이 나있다. 총무원 교무부장과 중앙포교원장 그리고 중앙종회의장 및 고시위원장을 역임한 종단의 원로스님이다. 지난 101회 중앙종회에서 중앙종회의원들의 압도적 지지로 태고종도가 바르게(正) 가는 일(司)을 맞는 중앙사정원의 수장이 되었다.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도로 기억한다. 나는 중앙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조계종 사찰에서 학생법회, 청년법회의 회원을 거쳐 어린이법회, 학생회, 청년회의 지도법사 노릇을 하면서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대학4학년 때 낮에는 대학도서관 장서정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제일은행 반포지점 등에서 야간숙직을 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짬짬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여름불교학교를 이끌어가던 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 시험을 치러 합격했을 때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선배들인 정 상우, 김 정묵선배들이 태고종총무원 고위간부인 운산(雲山)스님을 소개했고 그 분의 눈에 들어 태고종총무원에 종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태고종 총무원에 근무한 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동방불교대학에 강의하러 온 운곡스님을 처음 만났다. 다감하게 재미있는 옛 스님이야기를 들려주고 스님들의 게송(偈頌)을 암송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었던 기억이 있다. 운곡스님은 정 상우, 김 정묵선배의 동국대학교 선배이고, 내가 은사로 모신 운산스님의 후배이다. 나이는 한 살이 많지만 대학을 늦게 들어가 후배가 되었어도 늘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군법사를 마치고 조계종에서 태고종으로 올 때도 후배인 그들의 권유와 함께 선배인 운산스님의 적지 않은 도움으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를 처음 제대로 접한 날이 성도절 (成道節) 전야여서 눈을 뜨는지 감는지도 모르고 밤새워 참선을 했던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출가해서 수행하고 포교하는 것이 꿈이었다. 입문 첫 날에 50분 참선 10분 휴식으로 강행하는 철야정진의 기억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고 그래서 나는 성도절 철야정진만큼은 참선으로만 프로그램을 정한다. 그래서 부모도 모시고 전통종단에 수행자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종단에서 시행하는 합동득도 수계산림에 참여해서 법현(法顯)이라는 이름의 계명(戒名)을 받아 나름 열심히 살고 있을 때였다. 알고 보니 스님들은 각 사찰에서 행자수업 후 은사스님을 정하고 계사스님을 정해서 개별적으로 수계의식을 간단히 하고 스님이 되는 것이 상례였으나 태고종에서 스님들의 자질을 일정하게 하고 높이기 위해서 합동으로 득도하는 제도를 도입한 지 얼마 안 되었다.
우리 태고종 스님들은 대개 염불정진과 영산재에 쓰이는 바라춤, 나비춤으로 알려져 있는 작법(作法)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다. 어산 (魚山) 종장(宗匠)으로 일가를 이룬 송암(松巖)스님, 벽응(碧應)스님, 지광(智光)스님, 일응(一應)스님 등과 그분들의 문하생들이 많은 우리 태고종이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태고종 총무원장도 봉원사에 주석하고 있는 인공(印空)스님이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지만 특히 범패와 영산재를 이야기할 때는 눈에 힘이 들어가고 원고 없이도 역사와 내용을 재미있게 설하는 것을 보면 역시 봉원사 스님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고려 말 태고보우(太古普愚)선사께서 주석하시면서 산 이름을 금화산(金華山)이라 한 봉원사(奉元寺)에 현대불교의 어우러질 수 없는 두 특징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봉원사는 본디 반야사(般若寺)였고,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인 김 옥균,박 영효,서 광범 등 조선(朝鮮)의 개화를 꿈꾼 개화파들의 스승인 이 동인스님이 5년간 주석한 사찰이다. 그런데 그들과 맥이 닿아 있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불교에 행한 정책을 살피면 범패(梵唄)를 금지한 대목이 있다. 그런데도 같은 봉원사에 주석하시는 스님들에 의해서 일제가 금지한 범패가 지속되고 오늘날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가 되어 한국불교와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종합수행예술(綜合修行藝術)의 대표가 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면서도 중요한 민족혼이 살아있는 것이다. 또, 기독교의 바이블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바빌로니아사람들의 말(言語)을 흩어 버려 하늘에 닿는 성 쌓기를 방해한 것처럼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같은 말이나 노래 의식(儀式)을 함께하는 것은 사회통합의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일제가 한국사찰에서의 한국범패를 금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봉원사에서는 벽해(碧海)스님, 송암스님 등이 범패를 상행(常行)했고 오늘날에도 구해스님,일운스님,기봉스님,법현스님 등 그의 문하생들이 영산재보존회를 이끌고 있으며 옥천범음대학과 동방불교대학에서 범패를 가르치고 전국 사찰에서 시행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2009년도에는 아랍에미레이트공화국 아부다비에서 국제연합(UN)산하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지정하였다.
나는 대학 불교학생회와 사찰 청년회 그리고 동국대를 중심으로 한 각종 세미나 등에 참석하면서 참선수행과 교학연찬으로 법(法)에 관한 공부와 전법포교에 특히 관심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연구하여 연기설의 입장에서 본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을 연구비교하여 논문을 썼다. 교수들도 논문평가를 꺼려하였으나 통과된 뒤 석사논문으로서는 드물게 불교계 전 언론에 요약문이 실리는 아낌을 받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외톨이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런 나의 외로움을 달래 주신 선배 스님들이 여러 분 계셨는데 종정을 역임하신 덕암(德菴)스님, 연수원장을 역임하신 동호(東湖)스님, 총무원장을 역임하신 운제(雲梯)스님, 태고총림 선암사 선원장을 역임하신 지허(指墟)스님, 종승위원장을 역임하신 운경(雲耕)스님과 함께 운곡스님이 그런 분이었다. 특히 봉원사 법사로 계셨고 나의 직속상관으로서 총무원 교무부장을 역임하신 운곡스님께서 많은 지도와 도움을 주었다.
적확법사(的確法師) 운곡(芸谷)스님(2)
운곡스님은 무엇이든지 개념(槪念)을 먼저 파악하고 기본을 바로 한 뒤에 그것을 응용하든지, 방편을 써서 활용하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를 제대로 알려면 불교학개론서를 읽어야 하는데 본인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종단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반드시 김 동화박사와 황 성기박사가 저술한 <불교학 개론>을 권하고 지금도 그 책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불교학 개론>은 김 동화박사의 <불교 범론>을 보완한 것이다. 5~60년대 불교법란을 겪을 시절에 종단의 입장을 올곧게 정리하고 많은 이들이 법복을 바꿔 속복을 입을 때 당당하게 불교조계종 즉 태고종을 주장하고 선(禪)과 교(敎) 그리고 정토(淨土)에 모두 정확한 해행(解行)을 했던 황 성기박사 즉 고봉스님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운곡스님이 강의를 하고 있거나 했던 곳에서 작성한 일지나 인터넷 게시판을 살펴보면 스님의 언행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다. 강의를 시작하면 반드시 개념을 정립하고 과목을 분단한 뒤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는 정통 강의법을 구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의나 설법 뿐 아니라 염불을 하거나 종단의 행정을 하거나 불사를 하거나 중앙종회의 회의를 하더라도 정확성이 지나칠 정도여서 적확법사(的確法師)라고 불리는 것이다.
스님이 태고종 총무원의 교무부장을 하실 때 밑에서 모시고 살았다. 그 때 스님은 봉원사의
법사(法師)소임도 맡고 있을 때여서 백중(百衆)법회를 대신 보라고 해서 스님의 사찰인 홍천 안양사(安養寺)로 갔다. 안양사는 홍천읍 결운리 군부대 뒷산에 있는 사찰인데 높은 곳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다.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법당에 오르니 법당의 이름이 좀 달랐다.
안양사라면 중심법당이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전각이고 그 법당의 이름은 대개 미타전(彌陀殿)이라 하거나 부석사처럼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안양사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미타는 인도말을 중국글자로 바꾼 것이고 아((阿)는 영어의 a처럼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이므로 아((阿)를 빼면 문법적으로 반대의 듯을 가지게 된다.
즉 미타는 수명(壽命) 또는 광명(光明)을 뜻하므로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또는 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미타불은 ‘수명이 무한한 부처님’ 또는 ‘광명이 무한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국어로 뜻 번역한 무량수전 또는 무량광전이라고 하지 않으려면 인도말 소리 번역인 아미타전이라고 해야지 그냥 미타전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법회를 본 뒤에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뭐 그렇게 꼭 남들과 달리 아미타전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랬더니 특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무신 소리여어! 말이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고 생각과 말따라 행동이 정해져서 부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인데 정 반대의 것을 머리 떼고 말하면 어떡하라고? 꼭 붙여야 한다고 불교학 개론시간에 안 가르치던가, 교수들이?”
하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그냥 한 번 을러 본다는 것이 교수들까지 욕 먹일 뻔 했다. 그렇게 정확하신 분이다. 뒤에 보니 도원스님이 주지로 있는 김제에 있는 청운사의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도 무량광전(無量光殿)이라고 편액을 달았고, 선진규법사가 대표로 있는 봉화의 정토마을도 수광전(壽光殿)이라고 이름했다.
운곡스님은 법주사에서 월산(月山)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법주사의 암자인 탈골암 위의 복천암(福泉庵)에서 치문(緇門)과 사집(四集)을 배우고 사교(四敎)와 대교(大敎)과정은 금강산 건봉사의 서울 포교당인 충신동 감로암(甘露庵)에서 수학하였다. 스님을 지도한 강사는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학승이자 태고종 종정을 역임하신 보성(寶城) 정 두석(鄭 斗石)스님의 사형인 세봉스님이었다. 치문의 모든 이력(履歷)을 마친 종장(宗匠)으로서 더욱 공부에 매진해 돈암동 신흥사에 계신 인간문화재 48호 단청장인 원 덕문스님에게 불화단청을 배워 이수자가 되었으며,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포교에 대한 원력은 그야말로 부루나존자의 그것과 닮았다. 다른 사람은 한 번도 가기 싫어 몸무게도 늘렸다 뺐다 하고 없는 병도 만들어 수술을 하기도 하고, 돈이나 힘을 써서 안 가는 군대에 두 번이나 갔다 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군인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군법사(軍法師)제도가 잘못 진행되어 조계종의 한 종파의 소속으로만 가게 되어 있어 현재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젊은이들이 불법에 귀의하게 하는 좋은 장치인 것도 틀림없다. 스님은 군대를 제대하고 군포교의 원을 세워
다른 사람들은 대위로 임관하는데 대한민국 최초로 소령(少領)으로 임관하여 군법사를 간 인물이다. 아니 최초가 아니라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이다. 곳곳의 군법당에서 불자를 늘리고 법회를 하기 위해 스님이 들인 노력은 군법사들 사이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우리 태고종에 각종 신행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결성을 도와주거나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총무원 교무국장을 맡던 내가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수행도량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선암사를 총림도량으로 선포하는 ‘태고총림 선암사 설치에 관한 기획안’을 마련한 것은 87년의 일이었고, 연화회라는 친목단체를 전국비구니회라는 전국규모의 공식단체로 지정하고 강원교육을 실시하도록 지원한 것은 90년 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태고종만이 가지고 있는 교임(敎任)제도를 활성화 하기 위해 전국교임협의회를 결성하고 교육지도를 하였고, 결혼한 스님들이 수행과 교화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승려부인회를 결성하여 연수교육도 하고 행사도 하는 등 매우 바쁜 일정을 진행할 때가 스님과 인연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들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선뜻 나서지도 않았고 특히나 보살님들을 내보내는 데는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그 때 스님은 보살님과 두 자제분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그 취지를 당당하게 밝히고 활성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딸 설리는 법학대학원과정을 독일에서 밟고 있는 재원으로 자라났고 아들 호준군도 튼튼한 장부로 자라나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은 군법사로 군대에서 포교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호준군이 텔레비전에 나가 자랑스럽게 한 말이 생각난다.
“스님의 아들로서 친구들과 지내기가 어떤가요? 부끄럽지는 않은가요?”
“부끄럽기는? 자랑스럽지요.”
“왜요?”
“사장님도, 교수님도 우리 아버지한테 돈 갖고 와서 절하고 가니까요.”
스님을 비롯한 방송에 동참한 모든 이들도 방송을 지켜본 이들도 활짝 웃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