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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제가 20일부터 24일까지 여행을 갑니다. 그래서 23일까지 묵상을 미리 올려드립니다.
묵상하시는데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2024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교회의 양극화 현상
사람들에게는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생각하건데 사실 사람들에게 무슨 수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학교에서 시험을 보거나 리포트를 받아보면 알고 있는 것도 엄청난 수준차가 있습니다.
같은 시험문제를 가지고 각자가 논술하는 것을 보면 정말 많은 차이를 나기도 하는데 어떤 학생은 아주 정성을 들여서 답안을 작성하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정말 성의 없이 답안을 작성하고,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외워서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강의를 해도 어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면학풍토나 학습태도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환경과 여러 가지 여건에 따라서 처음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점점 그 격차가 커져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양극화 현상까지 몰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양극화란 서로 다른 집단이나 계층의 형편이 갈수록 벌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경제 양극화 현상은 구조조정의 진행과 개방의 확대가 진전되면서 경쟁력의 우열에 따라 기업 간 및 산업 간 경영성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소득의 불균형이 심화됨으로써 발생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무역(Free trade)에 의하여 더욱 간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개최되는 피정이나 각종 프로그램은 많이 받는 사람은 점점 유식해지고, 똑똑해져서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자들과 양극화 현상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표현이지만 이제 도시의 신자들과 농촌의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전혀 다른 이방인들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수준이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고 인터넷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정보화매체를 이용하는 수준에 따라서 이런 현상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성서연구모임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합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농사일에 바쁘고 하루 종일 많은 일을 하고 저녁에 성서공부를 한다고 하여도 할 힘이 남아있지 않고, 또 공부하려고 해도 너무 모르는 것이 많다고 지레 겁을 먹기 때문에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한서에 운니지차(雲泥之差)’란 말이 나옵니다. 이는 <구름과 진흙처럼 차이가 크다.>라는 말입니다. 신자들 스스로 구름과 진흙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점점 돈을 더 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학식과 교양의 수준도 매일 다르게 느껴집니다. 경제적 사정으로 마음이 빼앗긴 사람들은 먹고 살 일이 막막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성서공부도 하지 않는다고 닦달을 해 봤자 결국은 아무 승산이 없이 울리는 괭가리와 같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지례 겁을 먹고 미리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적당히 포기하고 사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주일미사 참석율이 30%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세태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단순한 과정의 양극화를 넘어 신앙의 신 빈곤층을 양산 하는 등 구조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 운동이 열화와 같이 확산되면서 또 다른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소공동체의 궁극적인 문제는 모든 신자들이 빠짐없이 하느님 품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한 형제․자매로 살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의 교회와, 같은 본당 내에서도 구역 반에 따라 지식과 의식의 수준에서 다른 양극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양극화의 확산 속도도 우려할 수준이라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식으로 착각하고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교회 위화감 조성이 양극화의 한 단면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양극화를 계속 방치했다가는 교회 공동체와 사회갈등의 심화로 이어지면서 하느님 나라의 기반을 엉뚱한 곳에서 흔들어 댈 수 있다는 우려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과 수준 높은 차원의 설전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무식한 사람들과 설전을 벌이신다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참고 일일이 이해를 시키시려고 참으로 고생하십니다.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은 완전히 막무가내의 치한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수준차이입니다. 운니지차의 관계보다 더 극심한 차이가 있지만 주님은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지경까지 인내하십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차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아주 극미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차이가 아주 심각한 증세로 나타나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같이 많이 안다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신앙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을 품어 안을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양극화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 상식이나 전례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이 지금은 더 겸손해지고, 더 열심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오늘 주님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 무식한(無識漢)들 속에서 핏대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이 머물게 됩니다.
주님! 오늘 날은 거센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어둑한 날입니다.
하루 종일 우리의 삶도 화창한 햇살이 지속될 수 없는 나약한 저희들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합니다.
형제자매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수없이 쥐어다 내려놓는 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지키며 그 안에 살 수 있는 은총 주시고 머리나 지식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보다 가슴으로 받아들이어 날마다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날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축일3월 21일 성녀 베네데타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 (Benedetta Cambiagio Frasinello)
신분 : 설립자, 수녀
활동 연도 : 1791–1858년
같은 이름 : 베네데따, 캄비아조
성녀 베네데타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는 1791년 10월 2일 이탈리아 제노바(Genova)의 란가스코(Langasco)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부모로부터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고 이는 그녀의 믿음에 깊숙이 뿌리를 박았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파비아(Pavia)에 정착했다. 성녀 베네데타는 20세 되던 해에 신비한 체험을 겪고 기도와 속죄의 삶을 살며 하느님을 위한 축성된 삶을 갈망하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녀는 1816년 조반니 프라시넬로(Giovanni Frassinello)와 결혼하고 2년 동안 함께 지냈다. 1818년 남편 조반니는 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각자 '형제와 자매로서' 순결하게 지낼 것을 약속하고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 성녀 베네데타의 여동생 마리아를 간호해 주기로 하였다.
1825년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후 조반니는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2월 8일)가 설립한 '소마스카(Somascha)의 성직 수도회'에 입회했고, 성녀 베네데타는 카프리올로(Capriolo)의 우르술라회에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였다. 그녀는 일 년 후 건강상의 문제로 파비아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에 의해 기적적으로 완전한 치유를 받았다.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주교의 허락하에 어린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성녀 베네데타는 도움이 필요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파비아의 토시(Tosi) 주교는 조반니에게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를 나와 성녀 베네데타를 도와주도록 권고하였다. 둘은 서로에게 온전한 순결을 맹세하고 도시의 가난하고 소외된 소녀들의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생활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교육적인 활약은 파비아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성녀 베네데타는 여성 최초로 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기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녀를 '공교육의 장본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녀는 젊은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생활 규칙을 만들어 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성녀 베네데타는 일반 교육과 더불어 교리교육을 실시하였고 요리와 바느질 같은 유용한 기술을 가르쳐서 학생들을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고 또 가족의 형성을 돕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녀 베네데타의 업적은 당시에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유력한 인사들로부터 반대를 받았고 몇몇 성직자들의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1838년에 자신이 만든 조직을 파비아의 주교에게 넘기고 조반니를 포함한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제노바 지방의 론코 스크리비아(Ronco Scrivia)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비아에서 했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여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녀 베네데타는 베네딕토 섭리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그녀는 소녀들에게 학업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곤 했고, 가난과 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수녀회는 그 규모를 점차 확대시켰고 성녀 베네데타는 죽을 때까지 수녀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1858년 3월 21일 론코 스크리비아에서 생을 마감한 성녀 베네데타는 초자연적인 모성애의 모범이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용기와 충성심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였다.
오늘날 베네딕토 섭리 수녀회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부룬디(Burundi),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 페루, 브라질에 퍼져 있다. 그들은 어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나약한 이들을 돌보고 있다. 설립자인 성녀 베네데타는 보게라(Voghera)에도 수녀원을 세웠는데, 그녀가 생을 마감하고 40년이 흐른 후 그곳의 주교는 그 수녀원을 나머지 수녀회와 분리하여 설립자를 공경하는 의미에서 하느님 섭리의 베네딕토 수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녀는 참된 아내이자 설립자였다. 성령께서 그녀를 이끌어 결혼 생활에서부터 교육과 종교적 정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남편의 관대한 도움으로 그녀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학교와 종교 단체를 세울 수 있었다. 성녀 베네데타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가정을 만든다는 것과 여성들이 완전한 교육을 제공받아야 할 의무를 활성화시키고 젊은 여성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개척자로 여겨진다. 그녀는 1987년 5월 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네데타 캄비아지오 프라시넬로 (Benedetta Cambiagio Frasinello)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