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의 생애를 표로 만들면 이와 같다.
1720 | 1세 | 태어남 |
1721 | 2세 | 어머니 정빈이씨 사망 |
1725 | 6세 | 영조 1년 화순옹주로 봉해짐. 이 때 친오빠도 왕세자로 책봉 |
1728 | 9세 | 1살 위 오라버니 효장세자 사망 이 무렵 하혈 증세를 보였는데 2년 뒤 영조가 궁인들을 조사할 때 독을 써서 그랬을 것을 의심했음. |
1732 | 13세 | 판돈녕 김흥경의 넷째 아들 김한신과 결혼 |
1735 | 16세 | 남동생이 태어남(훗날 사도세자) 원자 책봉 |
1736 | 17세 | 남동생 왕세자 책봉 |
1749 | 30세 |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 |
1750 | 31세 | 화순옹주의 시아버지 봉조하 김흥경이 세상을 떠남 |
1752 | 33세 | 남동생의 둘째 아들(훗날 정조)가 태어남 |
1754 | 35세 |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청연군주를 낳음 |
1755 | 36세 | 1752년∼1758년 즈음 무렵 혜경궁 홍씨는 그리움과 원손남매의 안부를 전하는 한글편지를 보냄 (1755~1757 즈음일거임.) |
1756 | 37세 |
1757 | 38세 |
1758 | 39세 | 김한신 병사, 화순옹주는 따라 죽기를 원하며 식사를 중단. 영조가 직접 말렸음에도 끝내 사망 |
상세하게 타임라인대로 간다면 이와 같다.
어린 시절
조선(朝鮮) 숙종(肅宗) 46년(1720년)
연잉군의 후궁인 정빈 이씨가 창의궁에서 자식을 낳았다.
할아버지인 숙종은 서손녀의 탄생에서 몇마디 했을것 같은데 별다른 언급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친오빠의 경우는 숙빈최씨 상중이라서 기록이 없다고 해도..;;)
기억도 안날 2세 시기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커가면서 부친이 큰 아버지 밑에서 세제로 임명되고 굵직한 정치 문제에 연루되는걸 보아왔고 아버지가 왕이 되면서 화순옹주로 봉해지고 친오빠는 세자궁에 지내면서 따로 살았을 것이다.
9세 무렵 중독의 문제인지 하혈을 했고 (2년뒤에 그게 궁인의 소행으로 드러남)
심지어 친오빠는 세상을 떠난다.
“옹주가 어렸을 때 정성왕후가 보석과 노리개 등을 앞에 펼쳐놓고 놀게 했더니 일부러 졸음이 오는 듯이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해서 ‘ 이 상하구나 보통 여아와 다르도다’ 하며 찬탄했다는 것이다” 행장문 中 |
9세에 오라버니 효장세자의 상을 당하여 어른처럼 통곡하였다. 한국고간찰연구회, 추사 김정희와 주변인물의 관련 유묵, 兪拓基, 「墓表陰記」,75쪽 |
어릴 때 『소학』을 영조가 직접 가르쳤다고 하지만 유교적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친모가 없던 상황에서 친오라버지의 죽음은 통곡할만 할것이다.
혼인
13세의 나이에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혼인한다.
책 『역사, 선비의 서재에 들다』에서 어디 출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언급이 나온다.
영조의 차녀 화순옹주(1720~1758)는 월성위 김한신(1720~1758)과 결혼했다.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르고 시댁 사당에 예를 올리는데 시녀가 옆에서 부축하자 시아버지 김흥경(1677∼1750)이 예에 맞지 않는다며 이를 금지시켰다. 시녀가 "나이가 어리고 귀하신 몸이라 혼자 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옹주는 혼자 힘으로 절을 해야 했다. |
실제로 왕의 딸이 부마와 혼인을 한 이상은 일개 사대부의 아내일 뿐이며 그 가문의 며느리일 뿐이기에 어린나이였지만 그 가문의 여러 일을 따랐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남편 김한신의 경우 검소하고 타인의 평판에 신경을 쓰는 인물로 보이는데 이는 가문의 행장 뿐만 아니라 실록에도 나와있는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영조실록 65권, 영조 23년 7월 14일 임인 4번째기사 1747년 청 건륭(乾隆) 12년
기사에서 김재로(金在魯)가 김한신이 지은 집터를 보고 ‘어느 지사(地師)가 그대가 집을 지은 곳은 바로 국릉(國陵)으로 봉표(封標)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라며 허물것을 권유하자
김한신이 허문 뒤에 죄를 청한 내용이 있다.
정작 영조는 조사한 결과가 도형을 보니 지사(地師)가 말한
혈(穴) 주변에 집을 지었다는 설은 뚜렷하게 확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결국 부마도위 김한신은 도성을 떠나고
왕은 영의정 김재로에게
"한 나라의 수상(首相)이 도위(都尉)와 서로 겨루니, 장차 어떻게 그 자리에 나가겠는가?"
라며 갈구기까지 한다.
어찌보면 그만큼 딸을 아끼니 사위를 좋게 보는 것일테고 김한신 또한 남들 시선을 살필 수 밖에 없는 위치이므로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처신했으리라 싶다.
사도세자 부부와 교류
실록에 나오지 않았지만 배다른 동생인 이휘(사도세자) 부부와 잘 지낸것 같다.
혜경궁 홍씨가 보낸 편지에서
가을날씨 고르지 못한데 그후 평안하신지 문안 아뢰고자 바라오며 오랫동안 편지 올리지도 못했고 궁에 들어오셨다 나가신지도 한달 남짓 지났으니 마음 속으로 그리워 했습니다 편지를 적어보내시니 받들어 보고 실제로 뵙는듯 못내 반갑게 여기며 원손 남매도 잘 있습니다 빈궁(세자빈) |
이라고 보낸걸 보면 편지 하나에서 가족간에 친밀함이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9일 한글날] 혜경궁홍씨 친필, 한글편지 발견 - 조선일보 (chosun.com)
이 기사에서는 추사 김정희 증조부 김한신의 부인으로 이 서한은 추사 집안에 전
해오는 문서 속에서 발견되었다며 1752년∼1758년에 씌여졌다고 보는데
원손남매라는 언급을 생각하면 세손과 군주가 있을 1755년 이후여야 하지 않나 싶다.
남아있는 편지가 저것 뿐이라서 추측 뿐일것이지만
궁궐 밖에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풍문이나 궁궐 안 밖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세자의 상태와 국왕과의 불화 내용을 전달듣기 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죽음과 자살
「영조의 딸 열녀 화순옹주의 삶과 죽음」이라는 논문에서
김한신의 죽음에 대해 쓴 내용을 보면
김한신은 일찍이 담비증(痰痞症)이 있어 약을 먹으며 치료 중이었다. 1757년(영조 33) 겨울에 사직제(社稷祭)의 헌관으로 임명되었다. 매우 추울 때에 목욕을 해서 매우 심한 손상을 입었는데 수 십일이 지나도 낫지 아니하였다. 12월 20일 후에 다시 기침이 심해져서 증세가 매우 위독하였다. 영조는 궁궐의 의원을 파견하여 약을 보내고 김한신의 집에 머 물면서 보살피도록 하였다. 1758년(영조 34) 정월 3일 밤에 병세가 위급 해졌다. 마침 맏형 김한정은 증조부(金斗星)의 제사 때문에 집에 있었다. ....김한신은 또 맏형 한정의 셋째 아들인 이주(頤柱)를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집안을 이을 사람은 이주로 정했는데 형이 허락해 주겠는가? 허락한다면 나는 유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부고가 알려지자 영조는 놀라고 애석하여 정무를 멈추고 궁중의 관리를 보내어 초상을 주관하도록하였다. |
라고 나와있다.
즉
○김한신은 원래 담비증이 있어서 치료중이었음
○사직제 헌관으로 일하면서 추울 때 목욕을 해서 손상을 입음
기침이 심해서 위독해짐
○맏형 김한정에게 유언으로 맏형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줄 것을 요청함
이라는 건데 그래서
김이주-김노경(金魯敬)-김정희(金正喜)로 이어져서 그의 가문 이야기가 후세에 남을 수 있었다는 것...
화순옹주 역시도 남편 이후 스스로 굶었는데 영조가 직접 찾아와서 식사를 청했지만 그래도 소용없었음.
예조판서 이익정(李益炡)은 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으나
영조는 정절은 있으며 효는 부족함이 있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아비가 직접 찾아가고 또한 편지로 만류했는데 끝내 목숨을 끉었으니
이게 효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생애 자체를 생각해보면 참 불행한 인물이다.
친어머니를 잃고, 친오빠를 잃었으며, 시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었다.
첫댓글 아들은 굶겨 죽이고 딸은 굶어 죽은......
화순옹주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17일이 걸렸다고 하는 걸로 보아 억지로 먹였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애초 사위 잃고 딸까지 자진한 사람에게(더군다나 그 딸의 생모도 효장세자도 다…) 잘 죽었다고 표창하라니 영조가 그 자리에서 점마 목을 치지 않은 걸로 많이 참았죠………… (결국 열녀 정려는 조카인 정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