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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질문환영) 스크랩 화계사 가는길 (2)
홍순재 추천 0 조회 33 08.02.04 17:0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화계사 가는길 (2)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관음전,삼성각,천불오백성전,법종각,보화루,학서루 등이 있다. 이 밖에 경내에는 1978년 8월에 세운 고봉(古蜂)스님의 추모탑이있으며, 절 옆으로 오탁천(烏啄泉)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오탁천은 까마귀가 주둥이로 바위를 쪼아 약수가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속병과 피부병에 특효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 대원군도 이 약수로 피부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칸의 팔작지붕 다포걔 건물로 1866년(고종 3)에 용선(龍善)스님과 초암(草庵)스님이 화주가 되어 중건한 것이다. 1870년 지리산인 환공야조(幻空冶兆)가 지은 화계사『 대웅보전중건기문』에 의하면 석수 30명, 목공 100명이 달려들어 불과 수개 월안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본존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는데, 이 대웅전의 삼존불상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석가모니불의 후불탱화는 1875년(고종 12)에 화산(華山)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주불은 중품인을 하고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이시고 관음대세지, 지국, 증장, 지록, 지장, 문수 보현, 가섭, 아난 등 십대제자, 다문 광목천왕을 좌우보처로 하고 있다.
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근세의 명필인 몽인(夢人)정학교(丁鶴喬)의 필체이고, 주련의 글씨는 신관호(申觀浩)가 쓴 것이다. 1986년 서울시의 지방 유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아래 공자형(工字形)의 큰방이 있는데 이것이 현재 요사와 종무소로 쓰이고 있는 보화루(寶華樓)이다.
이 큰방 뒤의 마루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배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은 것이 서울 주변 왕실 원찰의 공통된 조영방식이다.
보화루의 현판글씨는 추사의 수제자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 ~1898)가 쓴 것이다.



명부전은 죽은 뒤 명부세계의 주인공인 지장보살과 좌우보처인 도명존자, 무독괴왕, 그리고 염라계의 십대왕과 사자들이 모셔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맞은 배지붕의 익공계 건물로 1878년(고종 15)에 초암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도움으로 중건하였다.

이 명부전은 원래 황해도 백천군 강서사(江西寺)에 있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1877년에 옮겨와 봉안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당시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던 화계사에 왕명으로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서사에 있던 이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선정되어 절에 봉안되게 되었다.

지장보살 후불탱화는 1815년에 그려졌고 시왕각부탱화는 1878년에 조성되었다.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옮겨 봉안한 후에 새로 그려 모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명부전의 현판과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전한다. 과연 추사의 제자답게 추사체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어 무궁한 변화와 회화적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자학(字學)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문자향(文字香)이 나타나 있다.

2001년 윤사월에 주지 성광스님이 명부전 내부 보수불사와 기와불사를 하였으며 지장보살 개금불사와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십대왕상을 비롯 판관 수문장상 등을 보수불사하였다.



지장보살과 시왕상


명부전의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고려 말 나옹화상이 손수 조각한 것이라고 전하여 왔으나 몇 해 전에 복장에서 발원문이 발견되어 1649년(인조 27)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지장보살상은 전체적으로 강건한 기상에 만월면(滿月面)의 미소년상이지만 눈매가 길고 콧마루가 우뚝하며 입은 굳게 다문 듯 작아서 매우 용맹스런 인상이다.

목은 짧고 굵으며 어깨는 두텁고 가슴은 넓으며 팔다리의 비례는 상체의 튼튼한 몸매가 잘 어울려 어느 곳 하나 허한 구석이 없는 미장부상(美丈夫像)이다.

설법인을 짓고 있는 손매도 탐스럽고 탄력이 있어 젊음이 넘쳐나는 고귀한 표현이며 어깨선도 부드러우면서 풍부하여 귀족적인 기풍이다. 무릎도 전후좌우의 길이와 폭이 알맞은 비례를 갖추면서 넉넉한 두께를 유지하여 안정감을 드러내니 당당한 위풍이 전신에서 구석구석 드러난다. 불의의 표현도 그 당당함에 걸맞도록 상당한 두께를 주었는데 의습선의 흐름이 매우 사실적이다.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 도명 존자상과 무독괴왕상도 지장보살상과 같은 조각솜씨이고 십대왕상을 비롯해서 판관, 동자, 사자, 수문장상도 모두 같은 양식 기법이다.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미술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복장 유물까지 온전하게 출현되어 가치를 더해준다.

지장보살 복장 발원문에 의하면 이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1649년(인조 27) 황해도 견불산 강서사(개명된廣濟寺)에서 조성되어 광조사(廣照寺)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발원문 말미에 화부질(畵負秩)이 나오는데 영철(靈哲),인명(印明),상원(尙元),운혜(云惠) 등 여러 사람의 이름이 보이고, 지전(持展) 성현(性賢)이다.
발원문과 함께 여러 책과 불사리가 출현였다.




고종 22년 서기 1885년에 금산(錦山)스님이 산신각을 고쳐지었다. 건물이 쇄락하여 이를 헐고 주지 진암(眞菴)스님이 1975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건물에 동기와를 올린 것이 현존한다.

안에는 197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독성탱화, 그리고 산신탱화를 모셨다.



1991년에 주지 정수스님에 의하여 조성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포 4층 건물이다.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 3층은 대적광전 법당, 4층은 국제선원 선방으로 사용한다. 법당안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노사나, 삼존불을 본존으로 하고 관음, 대세지, 보현, 문수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삼존불의 뒷면에는 각각의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그 위로는 닫집을 마련하였다. 그 외에 지장 보살상과 지장탱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원래 대적광전의 부처님들은 대웅전 부처님과 등을 대고 있었다. 1998년 상단에서 일어난 부분적인 화재로 현재의 위치로 얾겨 상단을 모셨다. 부처님들과 협시보살님은 1991년에 모신 부처님과 협시 보살님이 탱화와 닫집은 1998년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범종각에는 1898년 경상북도 풍기 희방사에서 옮겨온 대종과 목어, 북이 있다.
목어는 원래 고려때 창건된 보턱암에 있던 것이라고 전하는데 만지기만 하여도 나무 부스러기사 떨어질 듯 심하게 풍화되어 범종각 2층에 지붕천장에 매달려 있다. 대종은 명문에 의하여 주조연대가 1683년임을 알 수 있으며 무게는 300근이라고 하나, 현존하는 대종은 주지 진암(眞菴)스님이 무오(戊午 1978년)에 조성한 것이고 범종각은 1972년에 건립된 2층 육각의 건물이다





숭산 행원 큰스님께서 조석으로 거처하는 곳이다.





고봉 대선사는 1890년 9월 29일 경북 대구에서 태어 나셨다.
정혜사, 백운사, 건봉암 조실로 전법을 지도 하던 중 숭산행원선사를 법제자로 삼으셨다.
6.25 동란시 공주 마곡사 은적암에서 선회를 열어 선자를 거양하시고 이어 아산 봉곡사, 대전 복전암, 서울 미타사 조실로 계셨다.
1961년 8월 19일 세수 72세 법랍 51세에 삼각산 화계사에서 입적하셨다.





부처님의 세계와 사바세계의 경계되는 입구로서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만 있다하여 일주문이라 한다. 일주문을 통과할 때에는 세속적인 욕망이나 번뇌를 모두 놓아버리고 오직 부처님 세계에 들어오는 마음가짐, 즉 가볍고 맑고 청정한 마음을 가질것을 다짐하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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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2.05 11:40

    첫댓글 고요한 절의 풍경소리가 들리는 듯하네요...즐감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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