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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우울증이 차지철 세력 키웠다" | |||||||||
최진 교수 '박정희 리더십과 국정운영스타일' 분석 4탄 | |||||||||
리더십이 국정운영스타일에 미치는 심리학적 영향 1 - 참모유형 : 플러스형 박 대통령은 호탕하고 화끈한 모습을 좀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항상 엄격하고 절도있는 자세를 보여준 마이너스형 통치자였다. 타고난 내향적 성격과 오랜 군대생활을 통해 체득한 경직된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자연히 자신의 성격적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외향적인 플러스형 참모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박 대통령은 전형적인 마이너스형이었으므로 참모는 전형적인 플러스형을 중용하게 되었다. 전형적인 플러스형의 특징은 지극히 감정적이고 과격하며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그 대표적인 참모가 다혈질로 유명한 차지철 경호실장이다. 공수부대 출신인 차지철은 대통령의 위세를 업고 국회와 정당, 행자부를 주물렀다. 그는 국회의장(백두진)을 밀어 당선시키는 하면, 장관들이 대통령을 면담할 때 사전·사후에 보고토록 했다. 청와대 집무실에 도착하기 직전, 부하들은 근처에 얼씬거리는 직원들을 서둘러 보내고 출입구 허공에 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국기 하강식에 장관급 고위 인사들을 도열시켰던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0·26 당일 밤, 박 대통령 앞에서 나그네 설움 도라지를 불러 제끼고,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까불면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다고 큰소리쳤다. 차 실장은 보스인 박 대통령을 대신하여 돌격대 역을 자청했고 박 대통령은 그런 차 실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거칠고 공격적인 플러스스타일의 차 실장은 육영수 여사를 잃고 우울증(depression)에 빠져있던 박 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령 박 대통령의 내향적인 성격으로 볼 때 참모들에게 궁정동 안가에 연예인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을 가능성이 적다고 보면, 눈치 빠른 차지철 실장이 박 대통령의 심리상태를 간파하고 자주 주연을 베풀었을 개연성이 높다.
맹목적 충성파인 차 실장이 모든 일을 척척 알아서 처리하고 밀어붙이니 박 대통령으로서는 내심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임기 말 정신적 아노미(anomy) 상태에 빠지면서 마이너스형의 단점이 과다하게 표출되기 시작한다. 박 대통령은 용인술의 귀재(鬼才)여서 2인자들의 경쟁관계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측근들을 통제하고 관리했다. 3공화국 초기에 그러한 조정역할을 담당한 플러스형 참모는 이후락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한 이 실장을 박 대통령은 원격 조종하여 김종필과 이른바 4인방으로 불리는 실력자들을 적절히 조정하여 힘의 쏠림현상을 막고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국정 통제기능과 분산된 권력을 청와대 비서실로 집중시켰고, 비서실장에게 막강한 권한을 맡겼다. 덕분에 이 실장은 정치와 국방, 대북관계 등 국정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때 후계구도까지 넘볼 정도였다. 1970년대 초반 이상하게도 김종필씨를 후계자로 생각하는 박 대통령의 측근들은 별로 없었다. 대신 유신의 주역으로 등장한 이후락씨를 제2인자로 여기는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강경파로 치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서슬 퍼런 정보기관의 책임자로서 박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인사들을 잡아들여 치도곤을 안기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정보부장을 지낸 6년8개월 동안 600여명의 대학생들이 구속·수감되고, 60여명의 언론인이 체포·구속되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진압, 경향신문 강제 공매, 야당의원 탄압은 김형욱의 전매특허였다. 주먹세계 출신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의사당에 똥물을 뿌렸다가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폐인(廢人)이 되어버린 사건은 유명하다. 그런 김 부장이 미국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가 프랑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된 사건은 권력무상을 절감케 한다. 미국 망명시절 LasVagas 도박장을 찾은 김 부장은 좌우에 보디가드 2명을 거느린 채 거액의 베팅과 팁을 주는 등 호방한 스타일을 보였다고 당시 목격자는 말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소리 없이, 그리고 가차없이 제거했다. 군정기간에는 라이벌이 될 만한 쿠데타 동지들을 제거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공화당내 주류와 비주류를 교묘히 조종하여 정치적 목표를 실현해 갔다. 한마디로 박 대통령의 용인술은 측근들 간에 서로 경쟁을 시키는 상호 견제시스템이다. 중간 보스를 여럿 두고 이들 간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활용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극대화시키면서 적정범위를 넘어서려는 부하를 제어하는 방식인데, 마이너스형 지도자의 통치술이라고 할 수 있다. Jung의 심리학적 유형에 의하면, 박 대통령이 정적이나 배신자를 가차 없이 제거했던 것은 호불호(好不好)와 흑백(黑白)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내향형(내향적 사고형)의 특징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의 지도자는 부(富)와 가난, 공(功)과 과(過), 칭찬과 징계처럼 국정운영 과정에서 양극화현상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박 대통령은 한번 맺은 공적인 인연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마이너스형·행정가형 지도자이기 때문인지 참모들 중에는 장수한 사람이 역대 어느 정부보다 많았다. 이후락 비서실장은 7년, 김정렴 비서실장은 9년3개월, 박종규 경호실장은 장장 14년이나 재직했다. 국무총리와 경제기획원장관 등 경제부처 장관에도 4∼5년 이상 재직한 경우가 허다했는데, 정일권 총리는 6년(1964∼1970), 김종필 총리는 4년 이상(1971∼1975), 남덕우 재무장관은 6년(1969∼1974)에 이어 경제기획원장관 4년(1974∼1978) 등 10년 이상 경제장관으로 재직했다. 예컨대 박 대통령이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이면에는 그의 추진력 못지않게 경제 부통령으로 불렸던 김정렴 비서실장의 기여가 컸다. 김 실장은 헌정이래 유례없는 최장수(9년3개월)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정치 리더십이 강한 박 대통령에게 경제 리더십을 강하게 주입했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대놓고 경제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다. 6대 국회 때 법안 문제로 여야간 대립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국회 재경위원장이던 양순직 의원은 새벽 1시에 청와대로 가서 잠자던 박 대통령을 깨워 파자마바람으로 나온 그를 2시간 동안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고 술회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박 대통령은 좋아하는 측근들은 청와대로 불러 불고기 파티를 열고 소주나 정종을 곁들여 화기애애한 대화마당을 마련했다고 한다. 2 - 청와대 운영방식 : 현대화
행정가형의 주된 특징은 엄격한 관료주의적 성향(bureaucratic style)이 강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행정가형 지도자의 조직운영방식은 체계적이고 용의주도하게 나타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근대적이었던 청와대 시스템을 자신의 행정가형 스타일에 걸맞게 근대적인 체제로 전면 개편하였다. 거기다 일본군 생활에서 터득한 근대화의 이념과 통치술을 청와대 시스템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청와대를 관료조직과 통치집단의 쌍두마차로 활용하였다. 먼저 관료조직으로서 청와대를 보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청와대의 조직과 기능을 현대식으로 확대·개편하여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중심기관으로 만들어 정책을 감독·조정·통제 역할을 맡겼다. 통치집단으로서의 청와대를 보면, 비서실장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계층적 구조를 구축하여 행정부·국회·집권당에 이르기까지 국정 전반을 관리하도록 하면서, 권력실세들을 유효적절하게 통제하였다. 국정운영스타일의 유형으로 볼 때, 경세가적(managerial)·기술자형(technician)·단일지도형 (single leadership pattern)에 가깝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비서실에는 행정부 공무원들이 상당수 파견되어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비서실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다. 5년 뒤인 1968년에는 비서실 조직을 대폭 확대, 강화함으로써 청와대 전성시대의 막을 열었다. 3공화국은 국회와 정당의 영역이 축소된 반면, 청와대의 권한은 날로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밟으면서 1970년대 후반 유신시대에는 청와대 참모정치의 전성기가 도래한다. 첫째,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다운 현대적 체제를 처음으로 갖추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정무수석·민정수석·경제수석·의전·총무수석비서실은 모두 3공화국 때 만들어진 직책들이다. 장관급인 특별보좌관과 부속실도 이때 처음 신설되었다. 둘째, 제2공화국에서 유명무실했던 비서실장이 권력의 핵(核)으로 등장했다. 자연히 청와대의 중심세력은 비서실장이 되는 이른바 실세형 비서실장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향적인 마이너스형인 박 대통령은 자기 성격과 반대되는 외향적인 플러스형 참모들을 중용하여 자신의 보호막으로 삼는 동시에 정권을 유지할 돌격대로 활용했다. 집권 18년 동안 비서실장 3명을 통해 관료조직과 정치조직을 장악하면서 권력의 틀을 짜나갔다. 초대 이후락 비서실장(1963. 12∼1969. 10)은 5년10개월간 재직하면서 권력의 안테 나라는 별명답게 박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려 돌격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후 임 김정렴 비서실장(1969. 10∼1978. 12)은 장장 9년3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주로 경제 분야에 치중하였는데, 헌정이래 최장수 비서실장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다만, 마지막 김계원 실장(1978. 12∼1979. 10)은 군 참모총장 출신인데도 유약해서 특별한 자기영역을 찾지 못한 채,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밀려 제역할을 하지 못했다. 셋째, 청와대가 인재(人材)의 집합처·고급관료의 사관학교로 부상했다. 각 부처에서 유능한 관료와 전문가들을 청와대에 배치함으로써 정부조직 가운데 가장 우수한 전문가집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경제정책팀의 강화였다. 3공 초기에 경제수석실, 중화학공업을 담당하는 경제2수석, 관광산업을 담당하는 경제3수석, 그리고 필요할 때 설치하였다가 폐지하는 태스크포스형 팀제 형식의 외채관리비서관을 따로 두고 경제분야에 주력했다. 다섯째, 경호실장의 득세였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이후 우울증(depression)에 빠져있던 박 대통령의 심기를 돌리기 위해 과잉 경호를 했던 차지철 실장이 최대 실력자로 떠올랐다. 이는 대통령의 개인적 심리상태가 청와대의 세력판도를 바꾼 셈이다. 박정희 정권 제2기인 4공화국 유신시대에 접어들면서 비서실 인원은 227명으로 늘어나고 권한도 확대되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연임에 성공하고 국회에서 다수 여당을 출범시키자 자신감을 갖고 청와대를 확대 개편하면서 권력기반을 한층 공고하게 하였다. 이후 국회와 집권 여당(공화당)을 가급적 멀리하는 대신 청와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친위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비서실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Neustadt(1991)는 강력한 비서실장의 독주를 막으려면 행정부 각료와 다른 참모들을 두루 활용하라고 제안한다. - 비서실의 군대식 현대화 3 - 권력기반 : 중앙정보부 내향적인 마이너스형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관리하는 방식도 은밀하고 치밀한 특징을 보인다.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대중연설과 같은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수단보다 공작정치와 같은 간접적·비공개적인 통치수단을 곧잘 사용한다. 마이너스형 리더십인 박정희 대통령도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정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정보공작정치를 선호했으며, 이러한 의도에서 출범한 것이 중앙정보부였다. 유신작업 준비, 기획, 집행의 전(全)과정을 자연히 남북대화의 중추기구였던 남북조 절위원회의 남측위원장직까지 맡고 있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정보기관이 주도했다(김성진, 중앙일보, 2005. 4. 22). 준(準)군사조직인 중앙정보부는 음험하고 강권적이며 치밀하다는 점이 군사 권위주의형 리더십과 비슷하다. 박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은 무장세력에 의한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했다는 Freud의 강박신경증이론으로 설명된다. 박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5.16 주체세력은 강력한 통치기반을 구축하려고 미국의 중앙정보부(CIA)를 모델 삼아 1961년 6월10일 준(準)군사조직이나 다름없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김종필씨를 임명했다. 김종필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최고 권력자의 파수꾼이자 권력내부에 대한 감시 보안장치의 책임자를 맡았다. 중앙정보부장은 국내정치 감시자, 행정기관 조정자, 대북전략 책임자로서 대통령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고, 따라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대공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사찰, 국가 하위부서 간의 정책조정, 기타 정치적 반대세력 탄압에 이르기까지 억압기능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정권유지 기능을 수행하는 핵심적 권력기관이었다. 대통령 이외에 의회나 사법부 등 어느 기관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 초월적 권력기구로서 대통령의 절대권력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경찰·보안사 등과 함께 권력보위의 중추를 이루면서 박정희 정권의 억압구조는 이승만 정권의 경찰보다 훨씬 고도화되고 조직화되었다. 이처럼 막강한 중앙정보부는 야당 인사 탄압, 여권 핵심부의 동향파악, 대북 공작을 주도했고, 유신체제의 출범과 유지·관리과정에서도 대통령과 직통채널을 통해 권력의 제2인자 기능을 수행했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11명의 중앙정보부장이 거쳐가는 과정에서 이후락·김형욱이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을 제치고 대통령 직보(直報) 채널을 통하여 극비리에 대북 정책을 주도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대북정책의 최대 치적으로 꼽는 7·4 남북공동성명(1972년)과 남북 이산가족 재회를 제안하고 추진한 사람도 이후락 부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비리에 평양으로 잠행해 김일성과 직접 두 차례나 만났고, 7·4 남북공동성명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1973년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한 것도 중앙정보부였다. 당시 권력기관인 검찰·경찰·국세청은 중앙정보부의 서슬 퍼런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은 묵묵히 밀어붙여 성과를 내는 과업지향적 리더십과 행정가형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암시해준다.
[최진 교수] - 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
첫댓글 측근들 간에 서로 견제하고 경쟁 시키는 시스템으로, 중간 보스를 여럿 두고 이들 간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활용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극대화시키면서 적정범위를 넘어서려는 부하를 제거 했던 비열한 방식은 박정희 아니면 할 수 없는 통치술이지요...당시에도 온 국민이 보는 청문회를 통해 인물을 기용했다면 밀실공작의 대가 박정희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