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12월 13부터 43년 2월 18일까지의 소련군의 동계공세도 (확대해 보시길....)
1943년 2월 16일 소련군은 쿠르스크의 남방에 위치한 하르코프시를 탈환하는데 성공하게된다. 소련군의 공세는 43년 1월 13일 개시되었으며, 공격의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해방과 이를 방어하는 75개 독일 사단의 격파였다. 공세에 임하는 소련군은 그전에 벌여졌던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전으로 자신감이 충만해있었다.
하르코프는 소련의 중요 공업도시들 중에 하나이며, 또한 그 중요성을 반영하듯 거대한 빌딩들과 현대적인 구조물들, 그리고 시 중심가에 위치한 거대한 드제르스키(Dzerzhinsky)광장과 거기에 위치한 가스프롬(Gosprom)복합단지는 하르코프의 자랑거리였다. 드제르스키 광장 또한 소련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였다.
드제르스키광장과 가스프롬 복합단지
4개의 소련집단군들은 우크라이나의 독일 B집단군와 돈(Don) 집단군을 공략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돈강 너머 소련군의 선공으로 전투는 개시되어 소련의 제 40군 (K.S. Moskalenko)은 얇고 넓게 퍼진 헝가리군의 왼쪽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40군이 벌려놓은 그 간격은 곧 제 3전차군(P. S. Rybalko중장)에 의해 개척되어 헝가리 7군단, 이탈리아 알피니 군단과 그들을 지원하는 독일 예비병력의 후방을 파고들었다. 독일 방어선의 전전선이 붕괴되었으며 더 많은 소련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1월말에 이르러서는 그 갈라진 틈은 보로네즈Voronezh와 보로실로브그라드Voroshilovgrad사이에 200마일 이상 벌어져 버렸다. 1월 25일 소련군은 공격축을 북부로 돌렸고, 40, 13(N. P. Pukhov중장)군이 선도를 담당했다. 1월 28일에 이르러 그들은 독일 제 3군과 3군단의 얇은 남방 측면을 뚫고 그들을 포위하게 되었다.
독일군을 압박해 들어가는 소련군
그 사이 새롭게 가동되기 시작한 SS전차군단이 프랑스에서 하르코프에 도착해 사령부를 차렸다. 그러나
현재 가용가능한 SS기갑척탄병사단은 Leibstandarte-SS Adolf Hitler와 Das Reich뿐이었다. 도네츠Donetz 남부의 B집단군 방어선은 2월 1일 붕괴되었으며 소련군은 곧 기동집단군을 창설해 포포프(M.M, Popov)중장에게 지휘를 맡겼다. 기동집단군을 창설한 이유는 그들이 새로이 개척한 40마일에 이르는 간격을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도네츠남부의 B집단군 패잔병들은 Gebirgstruppen(산악부대)의 후베르트 란쯔(Hubert Lanz)대장에게 넘겨져 하르코프를 방어하고 북부 측면의 돈집단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SS는 하르코프의 동부와 남동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쪽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은 2월 5일 이지움(Izyum)을 점령하고 돈집답군의 후부 측면 돌파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르코프 외곽에 배치된 다스라이히사단의 맹수
소련군의 공세 2단계는 2월 2일 보로네즈전선에서 개시되어 2개의 군은 쿠르스크와 오보얀(Oboyan)방면을, 40, 69군과 제 3전차군은 하르코프 방면으로 향하였다. 제 40군은 벨고로드를 통과한 다음 하르코프 남서부외곽의 독일군 측면을 두드릴 예정이었다. 제 69군은 볼챈스크(Volchansk)를 향해 남부로 진격하고 제 3전차군은 남서부로부터 진격할 것이었다. 소련군은 지난 전투의 성과들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제 3전차군은 2월 4일까지 하르코프의 남부에서 20마일 떨어진 도네츠강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반이 온다! 독일군의 병력이동으로 분주한 하르코프 시내
한편 돈강의 북부제방을 지키는 SS아돌프히틀러 사단(LAH)의 병력들이었다. 이 사명감에 불타는 병
력을 대상으로 한 전면공격은 희생만 커진다는 것을 소련은 몇 차례의 성과없는 공격후에나 깨닫게 된다.
북부로 향하던 소련의 제 40군은 2월 9일 벨고로드(Belgorod)를 점령하고 독일군 169사단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로써 도네츠강 도하를 위한 교두보가 만들어졌다. 제 69군은 숙련된 독일군의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척탄사단을 맞아 진격이 지연되었지만 2월 4일에 이르러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벨고로드의 함락과 함께 란쯔는 하르코프 동부의 독일군들을 도시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였다. 이 명령의 이유는 이들을 고립시키려는 소련군 측방의 움직임때문이었다. 다스라이히와 아돌프 히틀러사단은 하르코프를 향해 철수하였고 그로스도이칠란트는 벨고로드와 하르코프에 이르는 도로에 저항선을 설치했으며, 168사단도 이에 따라 철수가 지연되었다.
하르코프로 진입하는 소련군
소련군은 하르코프에 대한 전진을 계속해 2월 9일 제 3전차군은 마침내 야음을 틈타 도네츠강을 건네는데 성공했으며, 12전차군단 또한 강의 남부에서 뒤따라 도하했다. 도네츠강을 건너는데 성공한 소련군은 하르코프에서 10마일 떨어진 아돌프히틀러사단의 방어선을 강타했다. 그러나 결의에 가득한 아돌프 히틀러 사단의 분전은 이들의 전진을 11일, 14일 사이에 겨우 4~8마일만 전진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14일에 이르러서야 아돌프 히틀러 사단은 방어선 안쪽으로 철수하였고 하르코프의 공장지대에서 소련군 15전차군단, 160 소총, 48 근위소총사단과 격전를 벌이게 되었다. LAH는 동부에서 진격해 들어오는 소련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지만, 진짜 한방은 북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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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클..! Dzerzhinsky -> "졔르진스키" 혹은 "지에르진스키"입니다. 이 양반은 체카(후일 NKVD를 거쳐 KGB, 그리고 FSB로 거듭나는..)의 창시자인데.. 뭐랄까.. 여러 의미에서 무서운 분이었다는군요. 은영전의 오벨슈타인을 혁명 러시아의 무대로 옮기면 지에르진스키가 나온다고 할까.. --a
. . . . 은영선은 잘 모릅니다만 . . 베리야보다 덜 찌질하고 더 무서운 인물임미카?(덜덜덜)
뭐랄까. 솔직.. 담백.. 청렴.. 비타협.. 굳센 의지.. 혁명에 대한 불타는 열의..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함.. 동정 없는 무자비함.. "철의 사나이" 스탈린이 이전에 이미 '강철의 펠릭스' 였던 인물.. 이라고 할까요.. 베리야는 아무리 설쳐봤자 증오받는 사람이지만, 지에르진스키는.. 식은 땀 날정도로 조낸 겁나는 사람.. 이라고 하는게 적절할지도.. 뭐, 대충 그런 분위기입니다.
폴란드출신의 창백한 흡혈귀신입죠. 그나저나 그런사람 이름 딴 광장도 있었군요. 뭐 베리야가 은혜입은게 많았으니..
이제 슬슬 만슈타인의 대활약이 펼쳐질 때인가...
kwessa님//태클 감사합니다. 제가 실수했네요. ^^;;(드제르스키라고 읽힐턱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