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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솔바람동요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향호
소설
그는 床石 앞에 앉아 있었다
전 세 준
- 동그랗게 모였네-
온 가족이
맛있는 음식이
한상가득 차려졌네
보고 싶은 가족들도
모두 모였네
밥상 앞에 둘러앉은
즐거운 가족들
달그락 달그락
즐거운 밥상.-
- 전홍운 지음 <밥상 앞에서>에서-
할망구가 서울 아들 집으로 떠난지 사흘이 되었다.
할아버지 밥상에는 달랑 밥 한 공기와 우거지 국 한 사발, 시들시들 해 지는 김치 한 접시, 그것이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옛날 그 둥근 밥상이 그리웠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여덟 남매가 자라는 초가 움집의 식사 시간은 전쟁이었다. 아버지와 큰 형은 따로 받은 밥상의 음식을 여유 있게 즐겼지만, 나머지 꼬마들은 둥근 밥상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먼저 젓가락으로, 아니면 숟가락으로 자기 것을 확보해야 입으로 들어 갈 수 있었고, 밥그릇이나 반찬 그릇들은 순식간에 그 밑바닥을 들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둥근 밥상이 그리워지는 것은 웬 일 일까?
그 밥상에는 언제나 가족이라는 정이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모두들 흩어져 자주 만나기도 어려있는 기회가 있어도 그것은 식탁이 아니면 네모난 밥상위에는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옛 날 떨그렁거리던 그 전쟁터 같은 둥근 밥상이 그리웠다.
오늘도 그는 아침 햇살이 이십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환히 밝힐 때야 겨우 응접실 바닥에서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이구, 또 먹어야 하냐.?-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밤새도록 똘똘 말아서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던 가벼운 이불 하나를 덥석 들고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는 먼지를 털었다. 언제나 하는 습관처럼 되어버린 아침 일과였다. 이런 일과는 잔소리 꾼 할망구가 집에 있을 때나 없을 때도 변함이 없었다. 가벼운 이불 하나, 먼지 터는 것으로 그의 하루 일과가 시작 되었다. 할 일이 많은 아침은 그의 몫이었다.
주방 냉장고 옆에 걸어 놓은 달력에는 큼직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조그마한 메모 칸에는 <서울> 이라는 붉은 싸인 펜 글자로 할망구가 떠난 날짜를 잊지 않고 기억 할 수 있었다. 달력엔 그 뿐 아니라 숱한 글자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달력은 그에게는 매일 매일의 계획표이고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메모장 역할을 하고 했다.
가벼운 이불을 차곡차곡 접어 이불장에 넣은 그는 우선 쌀과 잡곡을 찾아 전기 밥솥에 넣고 밥솥의 스위치를 눌러 놓고는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안 방은 한마디로 체력 단련장이다. 작은 런닝머신이 있고 목 맛사지 기구와,병원 물리 치료실에서 볼 수 있는 적외선 찜질기구가 방 가운데 버티고 있을 뿐 아니라 허리를 치받쳐 주는 넓적한 방석이랑 인대를 두두리는 빈 깡통. 그 뿐 아니라 족욕 기구, 어깨 맛사지 전동기구..... 하여간 그의 안방은 정말 동네 병원의 물리 치료실에 가까울 정도로 너저분한 물리 치료기랑 몇
가지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 모든 기구를 그 자신이 할부로 또는 현금으로 사들인 것이었다. 객지에 나가 직장생활하고 있는 아들 녀석이나 딸년들이 와 보면 입을 딱 벌릴 정도였을 뿐 아니라 할망구의 잔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운동하려면 밖에 나가 할 일이지 이게 뭐란 말인가! 어이구 내가 못살아 아... 방안에서 쯧쯧쯧.....
-치치치 치치치-
짧은 아침 운동이 끝날 무렵이면 전기밥솥은 어김없이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주방으로 다가가 아침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하듯 냉장고 문을 열고 엊저녁 먹고 들여다 놓은 반찬통을 하나 둘 꺼내 밥상 위로 옮겼
다. 밥솥을 열고 두 주걱을 퍼 담은 밥그릇은 언제 공기 밥 그대로였다. 식사 때 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 밥그릇이었다.
“어이구! 그것도 밥이라고...쯧쯧쯧.”
할망구의 잔소리는 그것뿐만 아니었다. 그 작은 공기 밥도 남기고 수저를 놓는 그가 안쓰러운 것인지, 아니면 언제나 한 숟가락 쯤 밥을 남기는 그 습관 때문인지 잔소리는 언제나 밥 상 머리에 붙여 다녔다. 사실 누구나 다 그렇듯 젊은 시절의 큰 밥그릇을 언제나 텅텅 비웠고, 그것도 모자라 더 받
아 먹던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한낱 지나간 젊은 날의 기억일 뿐이었다.
밥상을 번쩍 쳐들고 거실 바닥으로 옮겨왔다. 주방 옆에 식탁이 있었으나 그 식탁을 쓰지 않은지도 퍽 오래 되었다. 식탁 앞에 앉아 식사를 하던 젊은 시절의 그 의자는 포근하고 따스했지만, 이젠 엉덩이가 차가워지거나 딱딱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이 을시련스럽다.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거실 방바닥이 좋았다. 따스한 방바닥뿐만 아니라 텔레비전도 볼 수 있어, 그는 언제나 거실로 밥상을 들어 날랐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했다. 그럴 때도 그는 할망구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마이동풍으로 흘러 보내곤 했다.
이제 삼일 째 되었지만, 할망구의 잔소리는 거실에서 사라졌고, 그는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텔레비전의 채널을 바꿔가며 밥상 앞에 앉아 식사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십 분도 좋고, 삼십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밥상 앞에 앉아 있어도 잔소리 할 할망구는 그의 앞에 없었다. 어쩌면 그는 즐거운 식사 시간에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그의 밥상은 차츰차츰 그릇 숫자가 적어지고 있었다. 할망구가 해 놓고 간 반찬 그릇은 하나 둘 비워져 갔다. 이제 나머지 반찬 그릇은 오늘 점심과 저녁 식사로 텅 비워질 수 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는 한참이나 밥상을 앞에 놓고 TV 아침 연속극을 보았다. 아침 마다 즐겨보는 드라마였다.
_......허어, 밥 먹다 왠 싸움이람! 쯧쯧쯧...._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밥상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 그 먹음직한 식탁에 놓인 반찬들을 두고 아침부터 싸움질이라니 그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허어, 연속극이니..... 그러나 음식을 앞에 놓고 싸움질이라니 에이! 철없는 것들!-
그는 영 못 마땅한 듯 씽크대에 빈 그릇을 쏟아 붓고 덜거덕 거리며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허어.... 이래서 소리가 나는구만... -
그는 혼자 밥상을 대하고 설거지를 한 이후부터 할망구가 설거지를 할 때 마다 덜거덕 거리던 소리에 시끄럽다고 타박을 준 것에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할망구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대충 설거지를 마친 그는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고 한 잔의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이 모든 것이 할망구가 하던 일이였지만, 할망구가 서울로 떠난 후 모든 것이 자신이 해야 할 몫이 다.
“허허.... 이 나이에...”
막상 할망구도 없으니 아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출가한 아들딸들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그는 왕처럼 군림했고, 아침저녁으로 놓여지는 밥상도 푸짐했다. 말 한마디면 가만 앉아 있어도 심부름꾼이 많아 좋았다. 평상시 보지 못했던 푸짐한 밥상도, 그의 마음을 흐믓하게 했고, 더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비록 네모난 밥상이지만 온 가족이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식사하는 그 모습이었다. 그 시간은 밥상뿐만 아니라 온 방안에 정이 가득 넘쳐났다. 그러나 그런 즐거운 시간은 일 년에 몇 번 있을 뿐 그에게 아쉬움을 남기곤 했다.
커피 잔을 비운 그는 밥상 앞에서 큰 소리 치며 싸우는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Tv를 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때였다. 거실 벽에 붙어있는 스피카에서 한동안 삐삐 소리를 냈다. 관리실에서 또 무슨 전달사항이 있나보다 생각하며 귀를 기우렸다.
“아파트 노인회에서 알림니다. 오늘 열 두 시 반에 경로당에서 부녀회에서 노인들을 모시고 점심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하니 한 분도 빠지지 마시고 참석해 주시길 바람니다. 다시 한 번.......”
방송은 다시 한 번 반복 되었다. 가끔 있는 방송이었다. 아파트 부녀회에서 아파트 노인들을 위해 경로당에서 식사 대접을 하곤 했다. 아파트 노인들은 긴 밥상에 놓인 음식과 소주로 한 끼 식사를 마치곤 돌아가곤 했지만, 두 번인가 참석했을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 점심식사가 어쩐지 정성을 찾아 볼 수 없었고, 술잔이 몇 잔씩 돌아가면 훤한 대낮인데도 영락없이 서로들 큰 소리가 오고갔다. 이젠 그 나이쯤 먹었으면 체면도 생각할 나이들인데도 몇몇은 자기를 내세우면서 분위기를 어지럽게 했다.
그는 부녀회의 식사 대접에서 정을 느낄 수 없어 경로당 출입을 삼갔다. 가끔 아파트 경로당 앞을 지나치려면 안에서 들려오는 화투치는 소리가 밖으로까지 흘러나왔고, 창문으로 스치는 노인 노인의 모습은 언제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김 박사! 오늘도 안갈 생각인가?”
바로 윗 층에 살고 있는 최 노인이 방송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걸어왔다.
방송이 있을 때 마다 최 노인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그는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했다.
“난, 안 갈 랍니다. 형님이나 맛있게 잡숫고 오소.”
“허어, 사람도.... 가서 한 끼 떼우고 오지 그래...”
최 노인은 혀를 차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시간을 보내는 데는 컴퓨터가 최고였다. 아이들이 올 때마다 조금씩 배워 이젠 제법 이메일을 열어 보기도 하고 몇몇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는 돋보기 실종 사건으로 할망구와 한바탕 언쟁을 하고 한동안은 컴퓨터 앞에 앉지 않았으나, 결국 다시 돋보기를 스스로 사들고 와 다시 앉게 되었다. 그가 컴퓨터 앞에 자주 앉는 이유는 친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객지로 출가한 아들 딸 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젠 편지를 쓰던 잉크와 펜대는 책상 속 깊숙이 틀어 박혔고, 목소리를 높혔던 전화기도 한가하게 되었다. 전화로 말 할 수 없는 사연도 이메일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보고 듣지 않아 속 깊숙이 있는 하고 싶은 말을 얼마든지 뱉을 수 있어 그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이메일을 몇 장 가득 보내곤 했다. 더 좋은 것은 아이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을 할망구는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할망구가 알면 좋지 않는 일도 그는 몰래몰래 마음껏 떠들 수 있어, 그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 좋았다.
...... 직장에서 늦게 들어와도 항상 가족들과 같이 밥상 머리에 앉아 즐겁게 식사를 하면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가족애를 돈독히 하도록 해라....
그의 이메일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아들에 대한 부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바램 일 뿐 돌아오는 답변은 그의 기대를 벗어났다.
.....예,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아이들과의 식사 시간이 잘 맞지 않네요. 모두들 제각각 시간들이 달라서.... 그렇게 하도록 노력은 해 보겠으니 너무 염려 마세요.......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구나. 모두들 하는 일들이 다르고.......
그는 아들의 심정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메일을 보낼 때 마다, 그 잔소리를 빼 놓지 못했다. 그 때마다 그는 옛날의 둥근 밥상이 그리웠다. 정이 넘치는 밥상, 형제간의 정이 듬뿍 담아있던 밥상의 먹을거리는 비록 초라했지만, 형제의 우정과 가족의 돈독함에 마음은 흐뭇했다. 그땐 과외 공부란것이 없었고, 학교가 끝나면 모두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었기에 밥상머리 교육이 가능했다는 것도 그는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요즘의 밥상머리 교육의 아쉬움을 버릴 수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기에게 온 이메일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컴퓨터를 껐다.
그는 주섬주섬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주차장엔 텅 빈 자리가 많았다. 모두 출근하고 나면, 저녁 무렵 꽉 찼던 아파트 실외 주차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래도 갈 곳이 없어 주차장을 떠나지 못하는 승용차들은 침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유난히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아파트라 집에서 놀고 있는(?) 노인들이 많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아파트 경비실 앞을 지나며 거수경례를 하는 경비 직원에게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언제나 하는 습관이었다. 큰 길을 건너 한참 걸었다. 언제나 그가 걷기 운동을 하는 코스였다. 제방 둑을 내려가면 수양버들이 늘어진 남대천이 나왔다. 시냇물 옆으로 길게 뻗어나간 자전거 도로와 걷기 좋게 만들어 놓은 산책길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옆으로 씽씽 달려 나가는 자전거는 붉는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한 자전거 도로 위로 굴러갔다. 벌써 집 안 일을 마친듯한 여인들은 두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산책로 뚫고 나갔다. 고수부지에 마련된 가가가지 운동 기구에도 제각각 열심히 몸을 흔들고 있었다. 모두 그와 엇비슷한 또래의 노인들이었다.
--허허, 모두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지......---
그는 앞만 보고 걸었다. 옛날 성냥갑 같은 것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아파트 방구석에서 돋보기를 걸치고 신문을 읽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길게 목을 빼고 신경을 쓰는 것 보다 훨씬 좋았다. 남대천 끝,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온 몸을 소독이나 해 주듯 시원했다. 산책로 옆으로 말없이 바다로 흘러가는 시냇물은 대관령 눈 녹인 물을 끊임없이 실어가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었다. 월드컵 다리를 건너고 다시 제방 둑을 따라 시내로 들어오는 남대천 다리 입구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다리가 아팠다. 다리 입구 노인들 쉼터에는 벌써 많은 노인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그는 시계를 보지 않아도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점심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마침 잘 되었네.... 오늘은 여기서 점심을.....-
그는 다시 큰 길을 건너 노인들 쉼터에 줄 서 있는 장소를 찾아 맨 뒷자리에 슬그머니 섰다.
처음이었다. 시내로 나오거나, 집으로 귀가 할 때 언제나 쉼터를 지나면서 점심 식사를 하는 노인네들을 보곤 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무심코 집으로 향하곤 했다. 점심시간이 아닐 때는 언제나 많은 노인들이 여기 저기 탁자에 모여 바둑이나 장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술좌석에 모인 탁자에서는 고성방가도 들을 수 있었지만, 며칠 전 부터 CCTV를 설치한 후로는 쉼터의 분위기는 조용해졌다.
줄을 선 사람들의 행색도 가자가지였다. 멋쟁이 차림의 노신사가 있는가 하면 며칠이나 세수도 하지 않은 듯한..... 할머니들의 모습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낡은 점버 차림에 하나같이 쓴 운동모자, 그 운동모자도 가지 각색 일 뿐 아니라 모든 행색이 마치 노인 백화점 같았다. 노인들을 위한 점심 무료급식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다. 노인들을 위한 점심 대접. 어느 날은 교회에서, 어느 날은 지방 기관에서, 또 어느 날은 사회 봉사단체에서.... 이렇게 급식봉사는 이어져 가고 있었기에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어디선가 한 둘 이 쉼터로 모여든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 곳에서나 한 끼 떼우고 오지...”
언젠가 할망구가 내 뱉은 소리가 귓속을 찾아 들었다.
“허어... 할망구 말이 맞네그려. 아무 곳에서나 한 끼 먹고 가면 할망구가 얼마나 편했을까?”
그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줄로 선 노인들은 하나 둘 급식 차 앞에 놓인 급식대 앞으로 다가섰고, 그 역시 식판을 받아들었다.
그가 받은 것은 김치 미역국 꽁치 두 토막과 밥 두 주걱이었다. 배식은 그는 한동안 사방을 둘러 보았다. 앉아서 먹을 자리는 이미 빈 자리가 없었다. 여기저기 놓인 탁자에서는 무언의 식사가 진행 중이었다.
-......................-
모두들 서로 안면은 있는 듯 했지만, 매일 배식 받는 순서에 따라 식탁의 임자가 바뀌는 탓인지 서로의 대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식판을 들고 쉼 터 구석에 자리 잡은 나무 아래로 갔다.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의 뒤에 섰던 늙은이가 그를 따라 앉았다. 이렇게 앉아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빨리 왔으면 식탁에 앉을 수 있었지만, 여기서 식사를 한다는 것을 그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로 말이 없었다. 이곳에 나와 한 끼 밥을 얻어먹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은.... 그는 그저 한 끼 식사를 떼운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식판의 밥과 반찬이 없어질수록 이상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반찬은 보잘 것 없었지만 맛이 있었다. 할망구와 같이 식사하는 분위기와 혼자 아파트 방에서 먹던 밥 맛 보다 더 마음의 흐뭇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밥상을 받고 느껴보는 흐믓함이었다. 출가한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이 모여들던 밥상 앞에서 느끼던 그 즐거움. 아니 어렸을 때 많은 형제들이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전쟁을 벌이던 그 밥상의 즐거움이 떠올랐다. 쉼 터 노인 백화점에 들어 온 그는 오랜만에 사는 것 같았다. 식사를 하면서 주위를 살펴 보았다. 다행히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극빈자? 아니 극빈자만이 아니어도 좋았다. 지나가다 자기처럼 쉼터에 멈춰 한 끼 식사를 하는 노인이면 어떤가 싶었다. 이렇게 모여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그는 행복했다.
식사가 하나 둘 끝나고 식판을 반납하고 자리를 뜨는 노인들, 다시 식탁에 모여 앉아 바둑과 장기판을 벌리는 사람들, 나무 아래 모여 무엇인가 얘기를 나누는 구면인 듯한 노인들...... 그야말로 노인들의 마을이었다. 밥상이 식판으로 바뀌었고, 반찬도 별것 아니지만, 그는 어디서 받는 밥상 보다 더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장의 식판으로 점심 한 끼를 떼운 그는 곧장 집으로 갈 일이 없었다. 다음 차례는 시장을 한 번 삥 둘러보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아파트에서 신문을 읽거나 TV를 보다 눈이 아파오면 언제나 아파트 단지를 나와 가까운 중앙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는 일이 그의 일과 중 하나가 된지 오래 되었다.
그의 시장 구경은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끝났다. 밥상에 올라 갈 봄 철 푸성귀도 많았지만, 그는 눈요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저녁 밥상은 라면 한 그릇과, 냉장고 김치 한 접시로 끝났다. 스스로 찾아먹는 밥상이었지만, 먹는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늘 따라 할망구가 보고 싶었다.
-어째 전화 한 통도 없냐?-
그는 텅 빈 라면 그릇을 싱크대 안으로 집어 놓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일분도 지나기 전에 설거지는 끝이났다.
아침에 눈뜨는 시간은 언제나 같았다.
쌀 씻고, 냉장고 안에서 반찬통을 찾아 밥상에 놓고 또 한 끼를 먹어야 했다. 할망구가 해 놓고 간 봄 나물 반찬도 이젠 시들시들 해 졌다.
-허어.... 이젠....-
그는 문득 박목월(1916-1978) 시인의 <素饌>이란 시가 머리를 스쳤다. 까마득히 잊어버린듯했던 그의 시였다.
- 오늘 나의 밥상에는
냉이국 한 그릇
풋나물 무침에
新苔(신태).
미나리김치.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중략>.............................................
가나한 자의 盛饌을
黙禱(묵도)를 드리고
젓가락을 잡으니
혀에 그득한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
봄나물로 한창 입맛을 돋우는 밥상에다, 끓는 장찌개까지 있으니 얼마나 싱그러운 밥상인가. 그래도 누군가 봄의 밥상 앞에 같이 앉아 먹으면 얼마나 즐거운 밥상이 될까 생각하니, 혼자 진수성찬을 받는다 해도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시인은 혼자 이 소찬을 받고 즐거웠을까? 혼자만이 이 밥상을 받았을까?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봄 냄새가 풍기는 밥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가 밥 먹는 시간은 언제나 짧았다. 그에게 식사 시간은 하루의 일과 중 하나에 불과했다. 혼자 마주 앉은 밥상이 초라하거나 진수성찬이나 아무 변함이 없었다.
빈 밥그릇 하나를 댕강 싱크대에 넣고 행주를 한두 번 돌리고 설거지 끝을 냈다. 습관처럼 커피 한 잔을 위해 커피포드의 전원을 넣었다.
_따르릉 따르릉_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들 점심 모임이 있다는 전갈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학교 동기들의 모임 소식이었다.
- 장군 뷔페. 12시 반. -
오늘은 뜻밖의 외식 소식이었다. 반가웠다. 요즘 들어 밖에서 외식 한번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점심시간이라 한 식 집 뷔페 식당은 식판을 들고 늘어선 식객들이 많았다.
그는 식객들 같이 늘어놓은 음식들 앞을 지나며 몇 가지를 식판에 담아 친구들 사이에 앉아 점심을 시작했다. 비록 만난서 헤어진지 한 달 밖에 안되었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모처럼 밥상 앞에서 작은 즐거움을 느꼈다. 푸짐한 반찬을 마음대로 선택해 먹고, 또 다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친구들과 잠시나마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먹을 수 있는 반찬이 많아서도 좋았지만, 그것보다 더 그를 행복한 밥상으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과의 대화였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 마주 앉아 가족들과 나누던 그런 식사였다.
그는 오랜만에 즐거움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집으로 향해 걸었다. 뱃속이 푸짐했다. 골목길을 빠지고 다시 큰길로 나왔다.
---......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 ---
오거리 한 쪽 귀퉁이에서 우렁차게 스피카가 울려왔다. 며칠남지 않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후보자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여기저기 서 있는 인형 같은 유권자를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언제나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우리 고장을 위해서.....한 몸을 다 바치겠다는, 참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 얼마나 있겠는가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저렇게 일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고맙기까지 했다.
--쯧쯧쯧...----
그는 혀를 찼다. 그들이 과연 국민을, 나라를, 고장을 위해 저렇게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그들이 이때쯤 차려 놓는 선거의 밥상에는 의례 부정, 부패, 불법. 무능, 선심의 반찬이 놓일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탐욕도 가득 밥상에 오를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연설을 들을 가치조차 없다는 것은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 온 그는 아침에 보지 못했던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할망구가 온다는 전화가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를 반갑게 했다. 할망구가 온다는 그 사실보다 그를 더 기쁘게 한 것은 모처럼 외손녀와 동행한다는 전갈이었다. 그는 이제 조금이나마 밥상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할망구와 모처럼의 외손녀와의 밥상은 그를 즐겁게 했다.
-허어.... 이제야 밥맛이 나는군... 역시 자네가 있어야 해!-
할망구, 그리고 외손녀와 밥상머리에 앉은 그는 새삼 식사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집 나가 마음대로 살다가 돌아온 아들과 그런 아들을 감싸 안으며 용서하는 아버지.....
그 어떤 것보다 가깝고 소중한 것은 가족.,
어디에선가 본 듯한 문구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혼자 외손녀를 건너다보며 빙그레 웃으며 밥상의 즐거움을 오랜만에 느꼈다. 역시 가족과 함께 밥상 앞에 앉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그는 즐거웠다.
“왜 혼자 좋은 것 실컷 사 잡수시지 그래요!”
“허어... 사람... 혼자 무슨 맛으로.... 진수성찬이면 뭘 하나? 식구들과 같이 밥상 앞에 앉아야지... 허허허.”
그는 밥상 앞에 앉아있는 외손녀를 바라보며 가슴을 활짝 열었다. 모처럼의 즐거운 밥상이었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이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덜거덕 거리며 밥그릇과 반찬 그릇을 몽땅 비워내던, 그 즐거움이 다시 그의 머리에 떠올리며, 집나가 객지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모두 밥상머리로 찾아오는 그 날이 기다려졌다. 그때의 밥상은 진수성찬이 아니어도, 음식의 맛을 저울질 하지 않아도 그저 즐거운 밥상이 될 것 같았다.
둘이 밥상머리에 앉아 토닥거리던 할망구와의 식사 시간이 즐거운 것이었음을 그는 새삼 느꼈다.
“할망구, 고맙네..... 같이 밥상머리에 앉으니 좋구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람?”
“사실은.... 할망구가 아들네 집으로 떠난 이후 사실 밥 먹는다는게 별로 즐겁지 않아서 좀 그랬어......”
오늘따라 할망구의 존재가 크게 눈앞에 펼쳐졌다.
“할망구는 혼자라도 오래 살 수 있다지만, 영감탱이들은 혼자 오래 살지 못한다는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난 이번 실감했단 말이네....허허허.”
“아이구, 이제 철이 드는 모양이네. 그러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앞으로 내 말 잘 들어요. 내가 집 나가기 전에.....”
할망구는 싱크대 앞에서 그릇을 씻으며 혼자 중얼 거렸다.
“허허허... 내, 갈수록 태산이구려.....”
그는 외손녀를 끌어안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할망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幽宅 床石 앞에서 그는 혼자 밥상을 받고 있었다.
밥상의 즐거움도, 진수성찬도, 맛깔나는 음식도 그는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끝-
약력; 강릉 출생
0.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입선
0.한국아동문학연구 동화 신인상 당선
0.한국교육신문 신춘 꽁트 입선
0.동도신문 꽁트 연재작가
지은책; 동화집<아빠를 찾았어요><잘 키워드릴게요><삐뚤빼뚤 엄마얼굴><고향을 잃어버린 소나무>
꽁트집 <비틀거리는 바다>
회상집<회상의 문턱에서>
동요곡집<기다림><시골장터>
장편소설<벽화지우기> 중편<타는 횃불>외 단편소설 다수발표
중편동화 <어달리 아이들>외
0.한국문인협회 회원. 강원문인협회 강릉문협 관동문학회 솔바람 동요 문학회.한국아동문학연구회원.
0. 제1회 강릉문학상 수상. 관동문학상 아름다운 글 문학상. 불교가요동요대상 등
현; 강릉시 율곡로 2733 노암 현대 아파트 102동608호
* 010-6371-1371 (033)646-1371
첫댓글
“그의 幽宅 床石 앞에서 그는 혼자 밥상을 받고 있었다.”는
선문답을 제시하시며
성탄과 함께 오신 향호리님!
너무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면서
살아 숨 쉬는 그 자체가
축복이고 영광임을
되새깁니다.
*졸작 좋게 봐 주셔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점점 글쓰기가 어려워져요..... 큰 힘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