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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너그러운 사람들
사도행전 17:10-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이다. 부활절 절기 내내 그리스 사람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모든 가정에서 자녀들은 언제나 기쁨이지만, 종종 멍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녀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괴테가 이런 말을 하였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두 가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뿌리와 날개다.” ‘뿌리와 날개’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뿌리와 날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공유할 의무와 책임이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에게 뿌리를 주는 데 있어서 세계 일등일 것이다. 세상이 험하니 자녀의 일이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자녀교육은 병적이고, 성인이 되어도 자식을 감싸고돈다. 뿌리를 주는 일에 관해서는 그 열정이 대단하지만, 반면에 날개를 주는 일은 별로 준비되어있지 않다.
서양 아이들이나 일본 애들도 성년이 되면 법적으로 집을 떠난다. 대학만 입학하면 다 날개를 펴고 부모 곁을 떠난다. 아이들은 그날을 기대하고,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데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품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 결과 서른이 된 아이, 마흔이 된 아이, 쉰이 된 아이도 있다.
뿌리와 날개는 상호 모순적이지만, 그러나 꼭 필요한 인생의 여정이다. 5월에는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이 연달아 있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하면서 산다. 여러분의 인생 여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1)
뿌리와 날개를 모두 학습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짧은 시간 스스로 독립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을 따라가 보는 여정은 사도 역시 유대인의 뿌리와 이방인의 날개 모두와 씨름하는 과정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 주요한 세 지명을 언급하고 있다. 곧 ‘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이다. 이번 성지순례 중 세 곳 모두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2천 년 전의 사도 바울을 기억하는 기념물이 존재하였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내려왔다. 빌립보에서는 기쁨도 있었지만, 체포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등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이다. 지난 2004년 그리스 올림픽 때 중계방송에서 자주 데살로니가가 언급되었다. 성경의 이름이 현재에도 생생하게 느껴져 아주 신선했던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그 이름의 무게를 실감하였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3주 동안 지속적으로 성경을 강론하였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가리켜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17:3)라며 복음을 전했다. 많은 헬라인은 바울을 따랐으나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앞세워 훼방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도망치다시피 피난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들른 곳이 베뢰아이다. 그런데 바울의 행적을 쫒던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무려 80킬로나 떨어진 베뢰아까지 몰려와 소동을 벌였다. 사실 바울은 그런 유대인의 열심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회심하기 전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체포하기 위해 이웃 나라 다메섹까지 갈 만큼 종교적 열심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베뢰아를 떠나 이번에는 배를 타고 아덴까지 내려갔다. 베뢰아 사람들이 뱃길로 안내해 주었고, 비로소 바울은 안심하고 아덴에 머물 수 있었다. 그리고 뒤 따라올 실라와 디모데 일행을 기다렸다. 아덴은 그리스 최대의 폴리스로 당시 헬라문명권의 중심이었다. 이곳 아레오바고에서 한 바울의 설교는 16절부터 기록하고 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의 주요 거점인 ‘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을 차례로 다니면서 느낀 점이 있다. 바울이 전전한 이방도시들은 생전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였다. 아마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잘라버리기 힘든 유대교적 뿌리와 새로 품어야 할 이방인의 날개가 지닌 어려움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는 유대교라는 뿌리를 늘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후계자로 삼은 디모데를 전도자 일행으로 받아들일 때에 바울은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둔 그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다. 비록 예루살렘 회의(행 15:1-21)가 새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에게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지만, 바울은 아직 유대인의 신앙적 뿌리를 존중했다. 시시비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에 얽매이면 그것이 굴레가 되어 날개가 있어도 날아갈 수 없다. 사실 바울에게는 더 큰 날개가 필요하였다. 그 날개를 통해 더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해야 했다. 전도여행을 계속 이어가면서 바울은 마침내 이 모순을 극복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뿌리가 아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새로운 믿음의 뿌리와 함께 새로운 믿음의 날개를 달아 주려고 하였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2)
데살로니가를 피해 찾아간 베뢰아는 사정이 데살로니가와 달랐다. 누가는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11).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면서도 데살로니가에서는 곤욕을 치루고 쫓겨났는데, 베뢰아에서는 믿는 무리를 많이 얻었다. 그 이유를 베뢰아 사람은 “더 너그러워서”였다고 설명한다. “더 너그러워서”를 이전 개역성경은 “더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하였다. 나는 이 번역이 가슴에 와 닿았다.
복음을 들을 때에 분노한 데살로니가 사람이 있는가하면, 더 너그러운 베뢰아 사람이 있다. 그 결과 베뢰아에 복음이 뿌리 내린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11-12).
베뢰아 사람들이 날마다 상고한 성경은 바로 구약성경이다.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감춰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계시를 찾고자 하였다. 디모데후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감추어진 보물처럼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누구나 겸손히 성경을 읽고 배우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춰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난다”고 하였다.
아덴에서 한 설교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인들과 우리 모두를 향해 말한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17:31).
베뢰아 사람들이 얻은 믿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가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에 앞서 먼저 대사면을 준비하셨다.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판자이신 구약의 하나님, 율법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신약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베뢰아 유대교 회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복음전도자 바울의 진정성을 느낀 모양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나, 듣는 이나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인격적으로 말씀과 만나야 한다. 더 열린 마음으로 그 사랑 안에 겸손히 참여하라. 겸손히 나를 사랑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라.
베뢰아에는 바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는 바울의 일대기 세 장면을 모자이크 그림으로 새겨 놓았다. 가운데 바울을 중심으로 왼편 벽에는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오라마’가, 오른 편에는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베뢰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가까이에 성경을 손에 든 바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너무 크고 높아서 나는 바울의 손은 못 만지고 대신 발을 만져 드렸다. 그 분의 수고가 참 크고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베뢰아 사람들에게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들의 행동도 실천적이어서 베뢰아 사람들은 80킬로가 멀다 않고 바울을 뒤 쫒아 온 성난 데살로니가 사람들로부터 바울을 피신시켰다. 바다를 통해 아덴까지 인도하였으며, 또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오도록 부탁한 바울의 말에 순종하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그들의 너그러움’을 칭찬한 이유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베뢰아 사람 소바더는 바울의 3차 여행 때 동행하여 예루살렘까지 갔다(20:4). 여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도 동행했으니 바울의 선교는 두루 성공한 셈이다.
지난 주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4.3 70주년을 맞아 평화의 섬 제주를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다. 흔히 제주도 목회자들은 공통적으로 제주도 사람의 배타성에 대해 말한다. 10년은 지나야 마음을 열기 때문에 목회하기가 참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 폐쇄성이 모든 섬의 특징인줄로만 알았다. 특히 제주도의 경우는 정치하기도 어려워 여당 야당이 아닌 ‘괸당’이 지배한다고 한다.
괸당은 혈연관계와 지연까지 포함한 제주도 사람만의 공동체성이다.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삼촌이라고 불렀다. 강정마을 천주교공소 대표인 정선녀 님은 제주에서는 이웃사람을 사촌보다 가까운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들은 아이 젖도 나눠 먹이고, 제사밥도 나눠 먹는다. 처음으로 4.3을 알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제목의 유래를 비로소 알았다.
정선녀 님은 마을공동체든, 해녀공동체든 본래 제주도 사람들은 참으로 인정미가 있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다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로 육지 사람들에게 겪은 무지막지한 피해의식이 배타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73년 동안 서로가 품은 적대감과 증오심이 풀리고 서로 이해하기 위해 결코 성급하게 해치울 일이 아니다. 그 공감의 범위를 이해하고, 차근차근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날마다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 상대가 있다. 공감하고, 필요를 나누고, 채널을 맞추어야 한다. 사람의 눈높이에 하늘의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사랑의 복음은 그렇게 자리 잡아나가는 것이다.
3)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진정성에 마음을 열었고, 진심으로 바울을 도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었다는 점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더 잘 알고자 성경을 상고하였고, 그 결과 믿는 무리가 늘어났다. 모두 그들이 “더 너그러워서” 얻은 결과이다.
복음에는 인격이 있다. 전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 진정성이 통하면 진실한 고백과 사랑이 가능하다. 베뢰아 사람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좋은 모범이다. 그들은 말씀을 받았고, 말씀을 사모했으며, 말씀의 뜻에 순종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를 최선을 다해 도왔다.
우리는 ‘눈높이 교육’이란 말을 안다. 교사가 학생들에 따라 눈높이를 낮추어 각각 맞춤식 교육을 한다는 의미이지만, 학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꼭 필요한 방식이다. 눈을 낮춘다는 것은 사랑의 교육이란 뜻과 통한다.
대표적으로 성경의 눈높이가 있다. 사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눈높이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입장은 한결같다. 하나님은 저마다 사람의 현실에 눈높이를 맞추신다. 사람의 신분이나 신앙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신다. 우리 생각보다 하나님은 더 너그러우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자리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비참의 자리에 내려오셨고, 또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하나님의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시고, 희생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그 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친밀하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딴 세계의 사람들, 나와 관심과 취미가 다른 사람들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가 그 사랑을 전하고 싶다면 공감하는 자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나부터 더 너그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내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되 친밀하고, 너그럽고, 사랑해야 한다. 믿음을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며, 고백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너그러움으로 사람마다 가정마다 기쁨과 평안과 감사를 누리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