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7:24~30
모든 사람들이 잘 되는 사람이 되고픈 마음과 열망이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역시 잘되는 사람이 되려합니다. 주향기교회 성도들은 사람이 봐도 잘되는 사람, 하나님 편에서봐도 잘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잘되는 사람의 기준을 정하면 저는 소원하는 것마다 다 이뤄지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소원대로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소원마다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큰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약속을 받았고 또 그 여인의소원대로 그대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처럼 저와 여러분이 소원을 품는 것마다 하나님께서 이뤄주시는 사람이 되는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큰 믿음을 가진 한 여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도저히 믿음을 가질 만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자 중에서는 로마의 백부장, 여자 중에서는 이 여인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하여 이런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큰 믿음은 하루 아침에 생긴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에 이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담이 있었습니다.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큰 믿음의 사람이라 인정함을 받곡 자기 소원대로 되는 잘되는 사람이 되려면 세 가지의 담을 넘어야 합니다.
1.첫 번째 넘어야 할 담은 인간의 한계상황의 담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지역에서 자랐습니다. 엘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족속이라느 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데는 태어나고 자라온 배경이 중요합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천주교인이 되기 쉽습니다. 이 여인은 믿음을 가질만한 신앙적 배경이 전혀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헬라군에 속한 사람은 헬라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께 나와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을 주 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약한 귀신 들렸나이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이런 큰 믿음이 생겼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인간편에서 보면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속에서 절박성 때문입니다. 절박한 상황이 오면 믿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딸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믿음으로 가는데 통과해야 할 첫번재 문이었습니다. 한계 상황은 주님을 만나는 문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은 세 가지의 경우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런 상황이 가가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통이 믿음을 주기 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도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질병과 죽음의 위기, 경제적 고통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믿음을 가지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2.두번째 넘어야 할 담은 자기 위선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인간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 예수님께 나와 간구하였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고 포기한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간구하였다는 말은 한 번 부탁하고만 것이 아니라 들어주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매달렸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자신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으니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드러내고 싶지않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수치스런 가정사를 드러내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딸이 귀신들린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결혼도 생각해야 하고 당시 저주 받아서 귀신들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식적으로 자신의 죄를 숨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늘 남의 허물만 봅니다. 자신안에 있는 잘못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자인데 늘 자신이 판단자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주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는데 통과해야 할 문입니다. 은폐하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할 수 없지만 드러내는 사람은 믿음이 날로 날로 성장합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세번쨰 넘어야 할 담은 자존심이 담입니다.
여인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간절히 간구하였는데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거절해 버립니다.
개처럼 취급해버립니다 그 전에 어떤일이 있었습니까? 마태복음을 보면 "다윗의 자손이여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약한 귀신들렸나이다"(마15:21) 라는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을까요? 계속 간구하니까 제자들은 그 여인의 소리를 소음으로 듣고 그 여인을 내보내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거절해버렸습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렇게도 모멸감을 받고 자존심을 짓밟혔는데 이 때 이 여인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8절) "주여 옳소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게 큰 믿음입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이 응답해 주시던지 그건은 주님이 옳습니다. 100%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되어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어도 수용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비천한 존재 개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 전적으로 타라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지금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개" 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상관하지 않고 주의 은혜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잘되는 사람이 되려면 이 여인처럼 취급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는다해도 우리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자존심은 부끄러움입니다. 지금 내 현실의 처지의 부끄러움 떄문에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큰 믿음은 예수님께서 내 주인 되시면 어떤 문제나 어려움도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큰 믿음은 정말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끝까지 구하고 찾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가장 넘기 어려운 담인 자존심인 부끄러움의 담을 넘어 끝까지 구하면 오늘 본문의 여인이 받은 축복을 받아 잘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을 극복하고 오직 은혜만을 바라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막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방여인이 평생 안고 시름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은혜의 바탕은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향기교회 성도들이 오늘 본문의 여인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의 문제들 속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주인으로 믿고 고백함으로 해결함을 받은것처럼 끝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 모든 어려움과 문제 속에서 완벽한 구원함을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