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장군 全琫準 (1855 ~1895)】 「장군의 유시 '운명(殞命)'」
전봉준은 몇몇 부하만 데리고 태인에 있는 김개남을 만나려고 했지만, 순창군 피로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한신현(韓信賢)이 이끌고 온 마을 장정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황급히 주막을 빠져나갔지만 담을 넘다가 장정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고꾸라지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전봉준은 며칠 동안 순창 관아에 붙잡혀 있다가 12월 7일 일본군에게 신병이 인계되어 나주로 압송된 뒤 한양으로 가서 재판을 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아 3월 30일 동지인 손화중(1861~1895), 최경선(1859~1895)[36], 성두환(1845~1895), 김덕명(1845.10.29~1895.4.23)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천지가 모두 도왔고)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떠나니 영웅도 도모할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로 나에게는 허물이 없건만)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전봉준을 관아에 밀고했던 한신현은 금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00냥, 정창욱 200냥, 마을사람 9명 200냥 그리고 200냥은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