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金道演 (1894~1987) "대한인여자애국단 총단 서기, 독립운동자금 지원"
1894년 1월 28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금화면(金化面)에서 태어났다. 1916년 ‘사진신부’로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삭도(朔都, Sacramento)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윤응호(尹應鎬)와 결혼하였다.
1919년 김재신·김복덕·송덕경·권영복(權永福) 등과 함께 대한인여자애국단(大韓人女子愛國團) 삭도지부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여자애국단은 미주 각 지방에 난립한 여러 부인회를 통합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미주 최대의 한인 여성단체이다. 1920년 3월 삭도지방회에서 주최한 3·1운동 기념식에 참여하여 한인들과 함께 항일 의식과 독립 정신을 강조하였다.
1920년 4월 대한인여자애국단 맥스웰Maxwell지부 조직에 앞장섰으며, 단장 이성례(李聖禮), 재무원 양대진과 함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1921년 11월 27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강영소(姜永韶)가 성탄절을 맞이하여 독립운동 자금 수합을 목적으로 「포고서」를 발포하자, 맥스웰지방 수합위원으로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자금 수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9월 8일 서재필의 외교활동비 지원을 목적으로 임초(林超)가 맥스웰 지방에 방문하자, 임치호(林致昊)·임인재(林仁載) 등과 함께 환영행사를 주최하고 후원금 모집에 앞장섰다.
1924년 7월 맨티카Menteca 지역에 있던 한인교회 내에서 주일학당을 설립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며, 도덕과 민족교육을 중시한 교육 내용으로 한인2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독립운동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1927년에는 김자혜(金慈惠)·양제현 등과 함께 1917년에 조직되었다가 유명무실하게 된 ‘부인 전도회’를 재조직하였다.
1932년 8월에는 상항한인교회 내에 주일학교를 설립하고, 박경신·이일영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면서 한인 청년들의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3년에는 대한인여자애국단 나성지부에서 회장 박경신, 총무 허에스더와 함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대한인여자애국단 총단 서기로 선정되었으며, 나성지부 단장으로 선출되어 부단장 권영복과 함께 한인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였다.
1939년 3월 활동 지역을 델라노Delano 지방으로 옮긴 후, 델라노지방회에서 개최하는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하였으며, 1940년 11월 11일 김경자·한영숙과 함께 대한인여자애국단 델라노지부를 조직하였다. 1943년에는 델라노지부에서 재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지부의 재정 건전성과 독립운동 자금 수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11월 17일 대한인국민회 델라노지방회에서 주최한 국치기념식에 대한인여자애국단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국권회복 정신을 강조하였다.
1919년 6월 14일부터 1940년 8월 29일까지 의연금 명목으로 총 7차례에 걸쳐서 29원 50전, 1930년 3월 13일에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후원하고자 1원, 1931년 9월 24일에 나성지방에서 운영되던 삼일(三一)국어학교 후원금으로 1원,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을 지원하려고 1940년 11월 17일 델라노 지방회원들과 함께 500원, 1944년 1월 13일과 11월 9일에 독립금 명목으로 12원 등을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