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사법파동 시작
← 1971년 8월 9일 사법파동 당시 향후 진로를 논의하고 있는 서울지방법원 판사들.
1971년 7월 28일,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무더기로 사표를 낸 것이다. 검찰이 이날 새벽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 이남영 서기 등 3명에게 뇌물수수혐의를 적용,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 발단이었다.
두 판사가 제주도 출장시 사건담당 변호사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제공받았다는 것이 검찰측 주장이었지만 시국 사건에 무죄판결을 잇달아 내린 이범렬 판사를 겨냥한 꼬투리 잡기였다.
영장은 기각됐지만 분개한 판사들이 들고 일어섰다. 서울민사지법 판사 40명의 사표를 필두로 전국 415명의 판사 중 153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외부 압력에 시달려 온 그동안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사태가 좀처럼 가라않지 않자 박 대통령은 신직수 법무장관을 불러 사건을 확대하지 말도록 지시한다. 신 장관이 민복기 대법원장 집을 찾아 수사 백지화 등 수습방안을 제시하고 판사들도 8월 27일 사표제출을 철회함으로써 파동은 일단락됐지만 두 판사는 판사직을 그만두었다. 무덥고 긴 여름 한 달 동안 사법권 수호를 위한 판사들의 몸부림이었다./조선
[1741년]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 사망
← 비발디, Pier Leone Ghezzi가 그린 초상화(1723)
1741년 7월 28일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의 거장인 비발디가 사망했다. 비발디는 후기 바로크 기악음악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였다.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산마르코대성당의 관현악단의 정규단원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그는 어린시절 칠삭둥이로 태어나 허약하게 컸다. 1693년에는 수도사가 되었고, 1703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여자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왕성한 음악활동을 했다.
비발디는 마르첼로와 알비노니의 영향으로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고, 여러차례 연주회도 열었다. 그는 79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18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12개의 첼로를 위한 3중주곡, 38개의 오페라와 미사곡, 모데토,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음악을 남겼다.
비발디는 생전에는 작곡가로써 보다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더 유명했었다. 비발디의 성격은 낭비벽이 심하고 자만심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비발디의 작품을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하여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신포니아 23곡’, 합주협주곡 ‘조화의 영감’,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사계’가 있다./조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프린치프가 사라예보를 순방 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이로써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가 주도한 동맹국과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이 주도한 연합국이 서로 맞서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191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었고 제정 러시아에서는 레닌에 의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으며,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떠올랐다./브리태니커
[1492년] <대전속록> 완성
← <대전속록>(목활자본, 1613 판본)
1492년 7월 28일 <대전속록>이 감교청에 의해 완성되었다. 대전속록은 <경국대전> 발행 이후 1491년(성종 22)까지 새로 제정한 법규를 모은 법전으로 이극증·어세겸·권건·이즙 등이 편찬에 참여했다. <경국대전>을 보완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이전(吏典)의 서경(署經), 호전의 창고(倉庫)·상공(上供)·당물무역(唐物貿易)·보군자(補軍資), 병전의 내명부의(內命婦儀)·기재마(騎載馬)·금렵(禁獵)·포호(捕虎) 등 신설된 항목들도 있다. 또한 인사관계에서 생원·진사는 보거(保擧:추천)가 없어도 등용할 수 있게 했으며, 대간에서 신임관리를 서경(署經)할 때는 처의 4조(四祖)도 고찰하게 하고, 혼인한 가문도 상피(相避) 대상에 넣는 등 당시 논란이 되던 사안들에 대한 규정도 포함되었다. 1493년 5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브리태니커
[1926년] 서양화가 변종하(卞鍾夏) 출생
1926. 7. 28 경북 대구~2000. 7. 29 서울.
유화·부조(浮彫)·도예 작품을 통해서 시적인 정서와 한국적인 이미지의 결합을 추구해온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8·15해방 직전 만주에 있는 신경미술원에서 공부했으며, 이 시기에 당시 러시아인 화가들의 재료에 대한 완벽한 태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해방 후 귀국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4~7회에 출품하여 수상했으며, 특히 1955년에는 국전 부통령상을 수상했다.
변종하는 이후 홍익대학교와 수도여자사범대학(지금의 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중인 1960년 프랑스로 가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 chaumièe)에서 공부했다. 프랑스에 머무르는 동안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이며 시인인 르네 드로앵과의 만남은 그의 예술생애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이 만남 이후 그는 런던의 쿠퍼 화랑, 파리 시립미술관 등에 초대출품했으며 독일·프랑스 교류전에 프랑스 대표작가로 선정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때의 대표작으로는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하여 특유의 서정문학적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우화〉와 〈돈 키호테〉 연작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문학적 요소의 회복을 꾀한 점에서 그의 그의 작품세계는 '설화적 상징주의' 또는 '신(新)형상주의' 등으로 불렸다.
1965년 귀국한 후에는 한국사회에 대한 풍자적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귀국한 지 10년 만에 가진 개인전(현대화랑, 1975. 10. 15~23)에서는 〈어떤 탄생〉 연작을 통해서 민화·야생초·십장생 등과 새를 함께 표현했다. 요철 위에 마포를 입히고 색칠을 하는 등의 새로운 기법과 인물·자연물의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담백하고 세련된 미적 특징을 갖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그는 투병생활중에서도 사물의 원초성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감자꽃과 태초의 새〉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9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1887년] 프랑스의 미술가 뒤샹 Marcel Duchamp 출생
← 뒤샹이 그린 유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1912)
1887년 7월 28일 태어남 / 1968년 10월 2일 죽음
뒤샹은 미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문 프랑스의 미술가이다. 1904년 기욤 아폴리네르, 프랑수아 피카비아 등과 교유하면서 야수파를 거쳐 입체파 양식의 그림들을 그렸다. 그의 입체파 경향을 보여 주는 대표작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1912)는 앙데팡당전에서 거절당했으나, 뉴욕의 아모리전에서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으로 건너간 1915년 이후에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는 대신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약국 Pharmacy>·<샘 Fountain> 등 이른바 '레디메이드'를 고안해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1923년에는 레디메이드뿐만 아니라 일체의 예술 활동과 결별한 채 파리로 돌아갔다. 이후에 발표된 그의 작품으로는 미국의 다다이즘 예술가 맨 레이와 공동 제작한 단편영화 <무기력한 영화 Anemic Cinema>(1926) 정도가 있을 뿐이다.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1942년 뉴욕으로 돌아가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오랫동안 레디메이드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전통적 가치에 대한 도발로만 간주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1960년대에 그의 작품들은 예술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표출한 적극적·창조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재평가되었고, 팝아트·옵아트 등 새로운 미술운동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브리태니커
[2004년]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 1000만대 돌파
2004년 7월 28일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가 1000만대를 돌파했다. 이로써 현대차는 1976년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 6대를 남미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한 지 28년 만에 자동차 수출 1000만대 기록을 달성했다. 금액으론 816억달러에 이르는 수치였다. 자동차 1000만대는 여의도 면적의 27배에 달하며, 자동차 1000만대를 일렬로 세우면 지구 둘레를 한번 돌고도 한반도를 두번 더 왕복할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지난 67년 창업한 현대자동차가 이날 자동차 수출 1000만대의 금자탑을 쌓기까지는 눈물겨운 곡절이 많았다. 68년부터 포드자동차와 제휴해 조립 생산한 ‘코티나’가 잦은 고장을 일으키자 고(故) 정주영 회장은 주변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미쓰비시로부터 엔진 기술을 넘겨받고,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에게 자동차 디자인을 맡겨 76년 1월엔 국내 첫 고유 모델인 ‘포니’를 자체 제작했다. 포니는 당시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대차는 그해 6월 ‘포니’ 6대를 남미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했다. 현대는 또 80년대 초반엔 캐나다에 포니 생산공장을 지었고,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프터 서비스망이 부족했던 현대차는 곧바로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유독 품질 경영을 강조하던 정몽구 회장의 취임(99년)과 함께 자동차 품질이 크게 개선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다시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대차 소나타는 2004년 미국 자동차품질 조사기관인 JD파워로부터 중형차 시장에서 1위를 인정받았고, 시장 점유율도 0.9%에서 2.5%까지 끌어올렸다. 2004년 현재 현대차의 수출국은 지난 80년 38개국에서 193개국으로 늘었다./조선
[1986년] 고르바초프, 블라디보스토크 선언
← 고르바초프(1985)
1986년 오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이른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한다.
그는 이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태평양 국가들과의 경제관계 증진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본격 진출하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태평양 연안국 회의를 제창하고 태평양 경제협력체에 참가할 의사를 표시했다. 또 몽고와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소련군을 철수할 것을 시사하고 동아시아 핵무기감축안을 제시했다. 캄보디아내 베트콩에 대한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소련의 이런 전환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경제적 주도권을 깨뜨리고 소련 경제를 활성화할 실마리를 아시아에서 찾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었다.
[1984년] 제23회 LA올림픽 개막
← 개막식에 입장하고 있는 한국 선수단
140개국 7800명의 선수가 출전한 제23회 LA올림픽이 1984년 7월 28일 개막됐다. '반소활동 때문에 선수단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소련 등의 동구권 14개국이 출전을 거부했지만 개막식은 9만3천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화려하게 거행됐다.
동구권 국가중 유일하게 출전한 루마니아 선수단은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고의 스타는 육상 100m, 200m, 400m, 멀리뛰기에서 4관왕인 칼 루이스였다. 대회조직위원회는 ABC방송국에 방영권을 2억3천9백만달러에 팔고 기업으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운영해 1억5천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은 금6, 은6, 동7개로 종합 10위를 차지했다./조선
[1968년] 독일의 핵화학자 한(Otto Hahn, 1879.3.8~1968) 사망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에 화학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과 마르부르크대학교·뮌헨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친 후 2년간 T.친케로부터 유기화학을 배웠다. 1904년 런던으로 건너가서 W.램지의 지도 아래 시작한 것이 방사화학 연구의 첫걸음이었으며, 그곳에서 토륨붕괴계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캐나다의 몬트리올에 있던 E.러더퍼드의 실험실, 이어서 베를린대학 E.피셔의 연구실에서 라디오악티늄(radioactinium)(1906) 및 메소토륨(mesothorium) 등을 계속 발견하여 토륨붕괴계열을 완성하였다. 1913년에는 신설된 카이저빌헬름 화학연구소로 옮겼는데, 그 후 32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1918년에 새로운 원소 프로트악티늄 Pa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L.마이트너와 공동으로 연구한 성과였다. 또 그의 조수 E.슈트라스만과 함께 1939년에 발표한 우라늄핵분열의 연구는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는 1934년 이래 E.페르미 등에 의하여 시작된 연구를 계승한 것으로서, 우라늄원자에 중성자를 조사(照射)하였을 때의 핵반응을 조사한 것이었다. 나치스에 쫓겨 코펜하겐에 있던 마이트너는 1938년 말에 이 소식을 듣고, 자기 O.푸리치와 함께 우라늄핵분열을 이론적·실험적으로 확인하였는데, 그 결과로 거기서 약 2억 eV(전자볼트)의 에너지가 방출된다고 발표하였다(1939). 이는 당시 미국에 있던 N.H.D.보어에게 알려져 미국물리학회에 보고됨으로써(1939), 마침내 원자폭탄 제조계획으로 진전되었다. 194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1946~1960년에는 재건된 카이저빌헬름 연구소(1948년에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개칭)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1945년] 미국 B25폭격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에 충돌. 14명 사망
← Crash by a U.S. Army B-25 bomber on July 28, 1945
1945년 7월 28일 오전 9시 50분, 짙은 안개로 항로를 이탈한 미 공군 B-25 폭격기가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충돌, 13명의 사망자와 3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층 빌딩이였던 엠파이어 빌딩은 무게 12톤의 폭격기와 충돌했지만, 건물의 파손은 충돌지점인 78층과 79층 2개층에 구멍을 내는 정도의 피해만 입었으며, 파손된 사고부분도 3개월 이내에 모두 복구됐다. 충돌 비행기의 차체가 적었고 비행기 연료인 가솔린의 양이 적어 건물전체의 대형화재로 번지지 않아 대형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1902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화가 나마트지라(Namatjira, Albert (Elea)) 출생
← 나마트지라
1902. 7. 28 ~ 1959. 8. 8
사막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중부지방을 그린 수채 풍경화로 유명하다. 아란다족인 나마트지라는 루터교 선교학교에 다녔고 1934~36년 백인 화가 렉스 배터비에게서 유럽의 수채화 기법을 배운 뒤, 핑크리버 원주민 선교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6년에 그의 첫 그림이 팔렸고 1938년에는 수채화 41점이 멜버른에서 전시되어 다 팔려 나갔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작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그는 이후 20년 동안 자주 전시회를 열어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고, 그의 그림 1점은 1954년 엘리자베스 2세에게 증정되기도 했다. 1957년 오스트레일리아 시민권을 얻었지만 원주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한 예로 그는 신분 때문에 앨리스스프링스 주거지역(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인의 집')으로 이사할 수가 없었다. 말년에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 아닌 원주민에게 술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2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석방된 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큰 선교기지인 허먼스버그에서 마지막 몇 달을 보내면서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브리태니커
[1902년] 미국, 프랑스 파나마운하회사로부터 파나마에 대한 권리를 4천만불에 매수
프랑스의 레셉스는 7년 만에 운하를 완공하겠다고 장담하고 동시에 1881년 양대양(兩大洋) 주식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지형 때문에 수평식 굴착계획을 변경하여 갑문식 운하를 파기로 하였으나 황열(黃熱) ·말라리아 등이 만연한 데다 자금이 달려 9년 만에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94년에 프랑스계 새 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이 회사는 그 당시 파나마 횡단철도를 완성하고 운하건설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던 미국에게 가능한한 비싸게 운하굴착권을 팔아넘기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1903년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사들이려던 계획은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그 후 파나마는 미국의 지원으로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건설공사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1821년] 페루,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532년, 에스파냐의 F.피사로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지로서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에스파냐는 1535년 리마에 부왕청(副王廳)을 설치, 인디오를 노예로 삼아 금과 은을 채굴함으로써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부(富)를 누렸다. 그러나 에스파냐 귀족들의 영화도 1781년 콘도르캉기(두파크 아마르)가 이끄는 인디오들의 대규모 반란을 계기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814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인디오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821년 7월 '페루의 보호자'로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 장군이 리마로 들어와 페루의 독립을 선포한 뒤, 시몬 볼리바르가 다시 리마에 입성(入城)해 1824년 아야쿠초전투에서 에스파냐군을 격파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하였다.
[1750년] 바흐(Bach, Johann Sebastian) 사망
1685. 3. 21 에르네스티네 작센 튀링겐 아이제나흐 ~ 1750. 7. 28 라이프치히.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 오르간 제작자로 존경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randenburg Concertos〉·〈B단조 미사 Mass in B Minor〉·〈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Das Wohltemperierte Klavier〉 등 수많은 종교음악과 기악곡을 남긴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음악사의 전성기를 살았던 그는 이전 시대의 작곡가들이 발전시킨 주요양식과 형식, 민족적 전통들을 종합해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유명한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도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다./브리태니커
[179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 기공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土築)된 읍성(邑城)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華城)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禦牧軒池)·관청전지(官廳前池)·문루전지(門樓前池)·객사후지(客舍後池)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長安門)·팔달문(八達門)·화홍문(華虹門)·장악당(長樂堂), 북동(北東)·북서포루(北西砲樓), 봉수당(奉壽堂)·낙남헌(洛南軒)·서장대(西將臺)·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강무당(講武堂)·북옹성(北甕城)·북포루(北鋪樓)·남암문(南暗門)·적대(敵臺)·남옹성(南甕城)·만석거(萬石渠)·남장대(南將臺)·영화정(迎華亭)·창룡문(蒼龍門)·남공심돈(南空心墩)·화서문(華西門)·남수문(南水門)·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북암문(北暗門)·동북노대(東北弩臺)·서포루(西砲樓) 등을 갖추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성설(城說)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조심태(趙心泰)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擧重機)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794년] 프랑스 급진적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Maximilien) 처형
1758. 5, 6 ~ 1794. 7. 28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16세가 처형(1793년 1월)된 뒤 프랑스 전역에 공포정치가 몰아쳤다. 권력을 장악한 자코뱅당의 산악파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공안·보안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피의 역사가 시작됐다.
의회인 국민공회는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개칭하고 공포정치를 승인함으로써 힘을 실어줬다. 부자들에게는 강제로 부채가 부과됐고, 최고가격제와 물자통제는 더욱 강화됐다. 위반자는 가차없이 처형했다. 30만∼80만명이 용의자로 체포됐고 4만∼5만명이 처형됐다.
공포정치의 한가운데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있었다. 검소·단정했고, 여자도 돈도 쾌락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한 그는 남에게도 엄격함을 요구했다. 1인 독재가 본격화되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반대파들은 선제공격을 준비했다. 국민들도 공포정치에 지쳐 있었다. 내부에서조차 비판을 받게 된 로베스피에르가 파리코뮌에 지지를 요청했지만 반대파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체포됐고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공포정치도 끝났다. /조선
[1769년] 영국의 장군 로(Lowe, Hudson) 출생
← Lowe
1769. 7. 28 ~ 1844. 1. 10
나폴레옹이 유배되었을 때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을 지냈으나 전황제 나폴레옹을 냉대했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1793년부터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지자 중요한 전투를 지휘했고 1814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1816년 4월 그가 나폴레옹의 마지막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 섬에 부임하자 웰링턴 공작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적합하지 않은 발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양심적이지만 사무적인 사람이어서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맡은 책임의 중압감으로 인해 그는 명령을 철저히 수행했고 나폴레옹에게 지나치게 딱딱하게 대했다. 1816년 10월 미국에 있는 보나파르트파들이 구명운동을 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나폴레옹을 더욱 엄격히 통제했고, 다음달 자신의 가혹한 처사를 알리는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라스 카즈 백작을 추방했다.
1817년말 나폴레옹을 죽게 한 질병의 징후를 처음 발견했을 때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뿐더러, 영국 정부에게 나폴레옹의 하인 수를 반으로 줄이자고 요청했다. 나폴레옹이 죽은(1821. 5. 5) 뒤 영국으로 돌아와 국왕 조지 4세에게 치사를 받았으나 여론은 그를 비난했다. 그뒤 실론 섬 주둔 영국군을 통솔했지만(1825~30) 1830년 그곳의 총독 자리가 비었을 때 총독에 임명되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4년 농촌운동가이자 용신봉사상 제1회 수상자인 이한옥 여사 별세
2003년 미국 사이클선수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서 5연패 달성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문육지씨 별세
1990년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취임
1989년 하세미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에 선출
1985년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에 취임, 40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
1983년 북한 청진항 중국에 개방
1981년 한국-인도네시아 해상화물 분담에 관한 해운협정 체결
1981년 정부, 교육세 신설
1980년 영국-사우디 외교관계 재개 합의
1980년 첫 여성기술사(박광자, 정영선) 탄생
1979년 한국 레슬링선수단에 몽고서 첫 비자
1978년 경북도교위 가짜교사 자격증사건 관련 74명 구속
1961년 혁명재판 개정
1957년 멕시코시와 아카폴코 부근에 지진
1953년 제1차 판문점 정전회담 개최
1945년 미군 B29기 일본 중소도시 폭격 격화
194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해체
1937년 화북주둔 일본군, 총공세를 개시 북경 점령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개막
1926년 미국-파나마동맹조약 성립
1902년 철학자 칼 포퍼 출생
1858년 대서양에 해저전선 매설작업 시작
1804년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