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이 기도하는 집
(2025.03.09. 사순절 첫째 주일 예배)
본문 말씀 : 마가복음 11:15-19
주 제 :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통하여 성전은 성령과 교통하는 곳임을 널리 알리고자 하셨다.
1. 사순절
오늘이 사순절 첫째 주일이고 사순절은 육주간 계속됩니다. 저는 어릴 때, 선생님이 아무 설명도 없이 사순절이라고 하니까 사순절이 뭘까? 상당히 궁금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순절의 사순은 넉 사에 열을 뜻하는 순 그렇게 해서 사십일간의 절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로부터 역으로 사십일간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중간에 주일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5일부터 4월 19일까지가 사순절 기간이 되고, 3월 5일은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보통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고, 올해 부활절은 4월 20일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면서 지내고, 되도록 어떤 기쁨의 행사는 잘 가지지 않습니다.
2. 성전 정화
사순절의 중심은 역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마지막 일주일이 될 것이고 그 마지막 일주일 중 가장 처음으로 일으키신 사건은 ‘성전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상징같은 것입니다. 그런 성전이 제사에 쓰일 제물을 준비하는 일로 인해서 마치 시장같이 되어 버렸어요. 제사에 쓸 제물은 운반 상의 이유로 성전에서 파는 것만 사서 써야 했습니다. 그런 물건을 사고 파는 것으로 성전 앞이 항상 시끄러웠어요.
둘째는 돈을 바꾸는 일로 시끄러웠어요. 성전에 가면 성전세를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세는 반드시 이스라엘 화폐로만 바쳐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평소에는 로마 화폐만 가지고 있었는데 돈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돈을 바꿀 때는 약간의 환전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므로 돈을 바꾸어주는 일로 거룩해야 할 성전이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겠습니까? 성전을 새롭게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3. 무화과 사건과의 관계
이 성전 정화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의 머릿속에 콕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건과 무화과 나무를 말라죽게 한 사건과 나란히 놓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시간 상으로 같은 시간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보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말라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무엇인가 먹을 만한 것이 있을까 해서 무화과 나무를 찾았는데 그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무에 열매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먹을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셨는데 그 다음날 보니까 그 나무가 말라 죽어 있었습니다.
그때 무화과 나무는 열매는 없었지만 잎은 무성했어요. 잎이 무성하니까 굉장히 쓸모 있는 나무처럼 보이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열매는 하나도 없고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마치 당시의 유대교 같았습니다. 유대교의 중심은 제사입니다. 제사는 지금의 예배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연기가 올라가고 냄새가 진동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지내고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제사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은 죄를 사하는 제사여야 하는데 실제로 죄를 사해주시는 분은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실제로는 여기 계신 예수님께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그들은 엉뚱한 곳에서 마치 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마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의 시장터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기자는 이 두가지 사건을 같이 묶어 두었던 것입니다.
4.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과의 관계
요한 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과 같이 묶었어요. 두 사건은 분명히 시간상으로는 완전히 다른 시간대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은 예수님이 최초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시간상으로는 3년이나 차이가 나는데 왜 요한은 이 두 사건을 같이 묶어두었을까요? 같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찬물이었는데 따뜻한 물로 변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온도만 바뀐 것이지요. 조금 있으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닙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시키는 것은 성전을 전혀 다른 성전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지요. ‘기도하는 집’과 ‘도둑의 소굴’은 전혀 다른 것이지 않습니까? 잎만 무성한 무화과는 필요없으니까 죽여버리는 것은 쓸모 없는 것은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유대교를 완전히 바꾸어서 기독교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어요.
5. 유대교의 맹점
왜 유대교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일까요?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 자체를 사람이 흠없이 지킬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율법에도 분명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없잖아요. 이것이 안되는 것을 아니까 유대인들은 그것을 살짝 바꾸어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구원하신다 이렇게 바꾸어요.
그래서 그들은 형식적으로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것들에 집착합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있어요. 음식 규정입니다. 무엇은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어서는 안되고 그것을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유대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지요. 또 있어요. 절기 규정이요. 안식일법 같은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는 빵도 굽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엘리베이타도 타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전쟁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교를 완전히 바꾸려고 하셨어요. 아예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전정화의 뜻입니다.
6. 율법의 준수
예수님께서는 이런 쓸데 없는 것들은 폐기처분 하시고 실제적으로 율법을 지키게 하시려고 하셨어요. 실제로 율법을 제대로 지키게 하시려고 하셨어요. 율법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가능하지 않지요. 예수님은 이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오셨어요.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셨어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성령이 계십니다. 로마서 8장 3-4을 보십시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육신으로는 즉 우리가 지금 그대로는 이런 율법을 그래도 준수하기가 어렵지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런 모든 율법을 다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지금 그대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이 나와 함께 해주시면 우리도 충분히 그런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유대교는 무화과 나무를 완전히 말라 죽이신 것처럼 유대교를 완전히 없애버리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처럼 유대교를 완전히 변화시켜 기독교로 완전히 바꾸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1-33을 보십시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을 돌에 새긴 율법 즉 십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 두며 라고 한 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돌판에 새겨 있습니다. 즉 내 밖에 있어요. 그러나 성령은 내 마음에 기록되어 있어요. 즉 내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항상 내 안에 있습니다. 떠나지 않아요.
7. 성령을 부르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이 성령이 와 계십니다. 성령을 부르시면 성령은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못한다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부르십시오. 성령께 가르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성령은 우리가 부르짖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흔히들 성령의 역사라고 하시면 몸이 아플 때, 기적적으로 낫는 것 아니면 정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간절히 기도하여 그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 것만 성령의 역사라고 잘못 알고 있어요. 물론 그런 것도 성령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원래 성령의 역사는 내가 하나님의 바른 율법을 바르게 지키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8을 보세요.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보십시오.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능력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능력을 구하세요. 주십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성경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이 성경에 부합한지 검토하셔야 합니다.
때로는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실수를 하면서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립보서 2장 12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안에 성령이 와 계신다고 믿으시면 모든 일을 성령과 상의 하십시오. 어제 같은 날, 광화문에 갈까 가지 말아야 할까? 가되 어느쪽으로 갈까? 그 시간에 교회에 가서 기도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옳을까 저것이 옳을까 그런 것도 물어보십시오. 성령께서 답을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것을 물어보라고 성령은 내 바깥에 있지 않고 항상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한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