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막 1:9-15)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상이 복잡합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할 숙제를 내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잘해도 ‘장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도 한 가지만 잘해서는 앞서나갈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외국어도 해야 하고, 증권 정보도 알아야 하고, 요즘 유행하고 있는 골프도 배워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은 사람은 개인 방송을 하거나, 자신의 알림 채널을 만들어 새로운 소식, 정보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소위 ‘멀티 태스킹’을 잘해야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잘하던 일도 서툴게 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일을 하는 젊은이들에 비해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것이 적고, 줄어듭니다. 왜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잘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경쟁 사회에서 잘하는 것이 많으면 ‘경쟁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력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삶을 편리하게 해주지만 ‘생각’을 하는 훈련을 방해합니다. 굳이 책을 찾아 읽거나 사전을 보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요즘은 AI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고 합니다. 원하는 정보를 주면 설교를 써주기도 합니다. AI가 쓴 설교가 꽤 훌륭하다고 합니다. 사전의 정보, 신학적 해석 등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설교를 만들기 때문에 좋은 설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이처럼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무엇을’이라는 목적만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을 쫓아가기만 합니다.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고, 진리라고 생각해버립니다.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냥 쫓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좋다 하는 것이다 하면 그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을 고민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위해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다움은 더불어 사는 능력을 말합니다. 한자로 사람 人자는 두 사람이 기댄 모습이라고 합니다. 서로 의지하면서 지탱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하는 일, 자신의 삶이 어떻게 인간다움을 위해 쓰이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괴물’처럼 자기만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따라가기도 힘이 듭니다. 열심히 따라가면 행복할까요? 발전이 누구에게는 성공의 기회가 되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낙오자가 되는 슬픔을 안겨줍니다. 발전의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경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느리게 사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 자신을 돌아보는 것,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느리게 사는 삶’을 위해서 신앙인이 조금 유리할 수 있습니다. 가끔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을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열심을 냈는데 왜 내 소원 안 들어 주시느냐’고 원망과 불평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불만이 쌓인다면 잘못 믿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지 못하고 욕심으로 채워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신앙 안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 많아 보입니다. 내가, 우리가, 교회가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을 보지 않고 지식을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식인 것은 맞지만, 지식은 노력한 만큼 얻습니다. 쉽게 얻은 것은 얕은 지식입니다. 깊고 큰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부터 사순절 주일이 시작됩니다. 사순절 첫 주일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의 일들입니다.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머무시고, 비로소 세상에 나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 과정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거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을 받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형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세례를 받을 때 문답 교육을 하며 교리를 배우고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례식을 통해 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이것이 세례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세례 안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하늘의 음성이 들려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장벽과 같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곳과 죄 많은 인간이 사는 곳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 우리를 받아주신 것입니다. 죄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들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였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항상 인도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우리도 자식을 얻었을 때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그때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창 22:2)고 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을 살리는 희생제물로 생각하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도록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다고 합니다. 광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 광야로 보내셨을까요? 세상에 있으면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람들 말을 듣고 따라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고집하게 됩니다. 그러나 광야는 세상과 단절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혹이기도 하고,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걱정, 근심이 되기도 하고, 욕심과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워하고, 걱정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나약함, 무능함,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하게 됩니다. 천사들이 수종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내 생각대로 예수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를 보면서 신앙생활이 저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한 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광야체험을 하셨고, 복음을 전하면서 때때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광야로 가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거짓에 가까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광야는 홀로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루에 5분도 좋고, 10분도 좋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마주하고 앉으십시오. 처음에는 세상 것에 매여 걱정, 근심, 두려움, 분노, 욕심 등 온갖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면 요구하는 것이 줄어들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때가 오겠지요. 들을 때까지는 성경 읽기, 찬송, 성경 쓰기 등을 하면서 유혹과 시험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맡기게 되면 비로소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고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이 안 계신 곳이 광야이지,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