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지역 답사기
영남유학연구회 류현우
무던히도 춥던 지난겨울~~
해마다 지구의 온난화를 걱정하며 우리나라에서 이제 겨울은 없어진다고 걱정을 했는데 지난겨울은 참 추웠던 것 같다. 입춘도 보름여 지난 봄 냄새가 물씬 몰려오는 지난 2월 20일 영남유학연구회 약 80여명이 영천지역 답사를 떠났다. 우리 연구회가 발족된 지 여섯 달째이고 답사는 지난 영주지역에 이어 두 번째다. 스스로 배움을 청해 온 회원인지라 타 배움의 현장보다 열의가 있고 정신적으로 성숙함을 느낀다.


9편의 가사와 70여 수의 시조를 남겼고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3대시가인으로 불린다는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1). 그리고 그를 배향한 도계(道溪)서원. 입구에는 蘆溪선생의 詩碑가 우리를 반겨준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모두가 출세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이름을 남기고자 하지만 역사는 극히 일부만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후세에 전한다. 큰 벼슬을 한 것도 아니면서 더욱이 임진란 때 의병활동을 한 무관의 이름으로 조선 3대 시가인의 이름을 올린 蘆溪야 말로 진흙속의 진주와 비견될 조선시대의 대표적 선비가 아닐까?


영천 대창의 좁은 길로 버스가 한참 들어가니 제법 여유로운 저수지가 나타나고 그 저수지를 벗 삼은 서원이 있으니 도잠서원이다. 잠(岑)자가 새로워 자전을 찾아보니 山小而高. 산 작고 높을 잠字라고 한다. 도잠(道岑)이란 이름의 숨은 뜻이 무척 궁금해진다. 애초에는 지봉서원(芝峯書院)으로 명하다가 숙종임금이 도잠서원이란 편액을 내렸다하니 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의 학문이 곧 도잠의 이름으로 승화한 건 아닐까. 대문엔 지수문(止水門)이라는 현판이 있는 걸로 봐서 산골을 내려온 물이 이곳 저수지에 멈춘다는 뜻이겠지? 잘 정리된 정원에 강당이 있고 좌우엔 봉원재(逢原齋)와 희안재(希顔齋)가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다. 강당의 마루에 걸터앉아 솟을대문(止水門) 사이로 푸른 빛깔의 저수지가 보이고. 좁은 산골에 이런 절경을 가진 곳도 흔치는 않으리라.

다음 도착한 곳은 冑孫이 직접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은 호연정이다. 금호강 물결이 유유히 흘러가는 거북바위 위에 세워졌다고 하여 호연정(浩然亭)이라고 부른단다. 300년 전 국내 실학의 토대인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세운 정자다. 홀연히 앉아 차 한 잔 마시면서 자연을 벗하여 인생을 논하며 실학사상의 기초를 세우던 병와의 활발한 기풍이 다가오는 것 같다. 원래 고향이 서울이고 선조의 세거지가 상주 함창이었으나 장자와 장손은 고향에 남겨두고 이 곳 영천에 평생을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실학사상이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호연정이야말로 조선실학의 본거지인 듯하다.
다만 궁금한 것은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4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관직을 그만 두고 타지인 이곳에 머무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병와는 효령대군의 10世孫으로 왕족이며 문과에 급제했고 학문적으로는 西人에 계보를 둔 지도층으로 조금만 처신을 잘 해도 출세는 보장되어 있잖은가. 더욱이 영남지방은 남인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도 영천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또한 소론의 일파인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우고도 집권층인 노론의 모함을 받아 투옥된다는 설명은 병와의 정치적 뿌리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이어 찾은 곳이 조양각(朝陽閣)이다. 조선의 통신사가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의 3대루로 불렸다고 하니 꽤나 경관이 수려했던 모양이다. 특이한 건 건물의 북쪽에는 조양각(朝陽閣)이라는 현판을 달고 남쪽으로는 서세루(瑞世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는 점이다. 한 건물의 앞 뒤 간판이 다른 점이 이채롭다.
이 건물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당시 부사였던 이용이 건립했으며 일명 명원루(明遠樓)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는 당나라 문장가 한퇴지(韓退之)의 시에서 따온 말로 “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사가(四佳)서거정(徐居正)선생이 쓴 명원루 기문(記文)에 나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현대화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는 가 보다. 이 수려했던 조양각의 강 건너엔 우람한 아파트 두 동이 경관을 가로 막으니 四佳선생이 이 현장을 보면 꽤나 실망하실 것 같다. 詩板은 약 80개며 이 고장을 거쳐 간 수많은 명현, 풍류객들이 남긴 흔적이지만 시간관계상 일일이 찾아보지 못하고 그 뜻을 새기지 못한 체 자리를 떠남이 아쉽기만 하다.


항상 짙은 그늘로 나그네의 땀을 씻어 주던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은행나무는 추운 겨울인데도 옷을 모두 벗고 앙상한 가지와 육중한 몸체로 500년의 나이를 자랑한다. 정성껏 차린 깨끗한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이 나무 아래에 갖다 놓고 성의껏 기도드리면 부녀자는 생남하고 병자는 소생한다지만, 나무에 해를 주는 자는 크게 벌을 받는다고 한다. 아마도 大賢의 정기를 은행나무도 받았나보다.
전 국민이 崇仰하고 있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요, 동방성리학의 宗師로써 文廟에 종향된 大賢 圃隱선생께 謁廟禮가 있었다. 문과에 장원한 후 많은 벼슬을 거쳤고,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향교를 세우고 유학을 진흥하여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세웠다. 함경도, 전라도 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왜구를 격퇴하는데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마지막 고려사직을 지키려다 순절(殉節)한 선생의 나라를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과 애국충절(愛國忠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되고 있다.
다만 圃隱의 충절을 의심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圃隱이 고려의 충신과 역적의 갈림길에서 是非가 있고, 그가 순절한 선죽교를 두고도 의심을 하는 등 異見이 제기되고 있다. 모름지기 학자라면 여러 의견이나 연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확정된 역사적 史實에 대한 반론이라면 충분한 근거와 증거가 함께 첨부돼야 할 것이다. 학자들의 말 한 마디와 한 줄의 글은 역사를 바꿔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한 圃隱에게 조선은 최고의 忠臣으로 평가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확실하게 연구하고 논의해서 우리의 교훈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기를 바란다.


오후에 찾은 오천정씨 하천묘역은 우리나라에서 문중묘역 중에서는 제일의 명당자리로 80여기의 묘소가 안치된 곳으로 그날 답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다. 봄, 가을에 걸쳐 벌초를 하는데 참여하는 자손의 수가 무려 4~5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명당자리가 맞는 가 보다. 자손의 번성도 중요하지만 자손들이 이렇게 뭉칠 수 있도록 조상이 음덕을 내리고 있으니 세세손손 가문이 번성하는 게 아닐까.
하천묘역 바로 옆에 江湖亭이 있다. 강호정은 호수 정세아(鄭世雅 1535~1612)가 자호(紫湖)언덕에 세운 정자로 여러 교우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이웃해서 사의당,삼휴정이 강호정과 더불어 1970년대에 이건해왔다. 모고헌은 옥간정과 바로 이웃해 위치해 있는데 모두 迎日鄭氏 유물들이다. 모고헌의 향나무는 지수 정규양(鄭葵陽 1667~1732)이 심었다는데 300년의 긴 세월 속에 모양도 참 잘 갖췄다. 향내가 진동하는 마당에서 일행의 기념촬영을 하니 이른 초봄의 짧은 해는 서산을 뉘엿뉘엿 넘어간다. 우리 일행은 이어 송계 한덕련(韓德鍊 1881~1956)을 추모제향한 연계서원을 더 찾아보고 이 날 행사를 마무리했다.


2월 날씨로는 따뜻한 날. 영남유학연구회의 두 번째 답사인 영천지역의 일정이 훌륭하게 진행되었다. 오늘의 행사를 계획하고 준비해 주신 오용원교수님, 장세완선생님, 그리고 해박한 설명으로 이해를 돋워주신 전민욱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버스 두 대를 가득 메운 회장님이하 모든 우리 연구원 여러분도 수고가 많았다. 스스로 노력하고 견문을 쌓아 가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살찐 나를 발견할 때가 있으리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