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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스 위에 올라 앉은 카네 마을.
카풀루(Khapulu) 옛 궁전으로 오른다. 새벽에 내린 비로 공기는 청명하고 시간의 여유를 즐긴다. 다행히 카풀루에 도착하자마자 바자르에서 전에 원정대의 요리사로 일했던 임란(Imran)과 이스마일(Ismail)을 만났고, 자연스레 그들의 마을인 후세 계곡의 칸데까지 갈 차편이 해결되어서였다.
구불구불 오르는 길 언저리에 서서 아래로 바라본 강은 사막의 모래벌판처럼 펼쳐진다. 카라코룸의 동쪽 끝 티벳고원에서 발원한 샤이욕(Shyok) 강은 북서쪽으로 흘러 이곳에서 살토로(Saltoro) 강과 후쉐(Hushe) 강을 만나 대하(大河)의 면모를 갖춘다. 넓은 곳은 너비가 4km가 족히 되는 듯하다. 카풀루 원주민은 샤이욕 강과 같이 티벳이 그 뿌리이며, 여기에서 다른 지류를 만났듯 티벳 문화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받아들여 그들만의 생활방식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가벼운 호주머니 때문에 차락차 빙하로 바꿔
▲ 차락차 빙하의 침봉. 머리 위로 K7, 좌측에 C6,500Pk, 빙하 원류에 링크사르(7,041m)가 구름에 덮혔다.
착찬(Chaqchan) 모스크가 나타난다. 14세기 처음으로 들어온 이슬람 선지자 사이드 알리 함다니(Syed Ali Hamdani)가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세월의 무게에 주저앉았을 지붕은 새롭게 함석으로 덮어 조화를 이루지 못하나 나무기둥과 문들의 조각에서는 여전히 성스러움이 배어 나온다.
조금 더 오르자 바위절벽이 버티고 섰다. 카풀루는 독자적인 얍고(Yabgo) 왕조가 지배하여 오랫동안 계승되어 왔었다. 4,000~8,000m봉을 안은 대산맥에 의해 격리되었던 은둔의 왕국은 1840년 잠무 & 카시미르의 도그라(Dogra)병에 의해 정복된다. 절벽 위의 왕궁은 파괴되고 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세워졌다.
▲ 카네빙하 끝에 숨겨진 암봉. 정상부가 툭 잘렸다.
카시미르에서 옮겨 심었다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마당 좌우로 섰고, 4층 궁전 건물 전면 중앙에는 목조로 깎아 만든 발코니가 두드러져 나와 있다. 머리에 실크 숄을 두른 공주가 정원을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후둑후둑 넓은 플라타너스 잎에 비가 떨어진다. 돌아갈 시간이다.
친구들을 만난 바자르에는 군인과 보급품을 실은 군용트럭으로 분주하다. 현재 카풀루는 시아첸 분쟁에 따른 국경방어 전초기지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인도와 분리 독립하고, 카라코룸의 산에 도전하려는 등반대가 줄을 잇는다. 발토로 빙하 유역의 8,000m급 봉우리들은 가셔브룸1봉(8,068m)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1961년부터 인도 중국과의 국경 분쟁으로 74년까지 외국인 방문이 금지되었다가 국경 조정으로 다시 개방된다. 그러나 당시 파키스탄의 영토로 되어 있던 시아첸 빙하 지역을 인도군이 점령함으로써 살토로 지역은 1985년부터 다시 폐쇄되었고, 발토로와 후세는 정부에 허가를 내야 하는 규제지역으로 정해졌다.
살토로 빙하가 아우른 산들은 카라코룸에서도 가장 많은 미답봉과 대암벽들이 남아 있어 히말라야니스트에게는 꿈의 세계로 비쳐진다. 그러나 그곳은 원주민과 군인만이 허락된다.
▲ 카네 협곡의 계류와 돌로 쌓은 절벽길.
그러던 2,000년 돈이라는 열쇠에 굳게 닫혀졌던 자물통이 열렸다. 미국의 지미 친(Jimmy Chin) 원정대가 등반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파키스탄에서 관광회사를 경영하는 나지르 샤비르(Nazir Shabir)와 손을 잡고 로비를 벌여 카풀루의 군사령관 타히르(Tahir )장군의 허가를 받아냈다. 허가를 내준 것에 얼마나 고마웠으면 자신들이 등반한 무명의 암탑에 타히르 타워(Tahir Tower)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뻔하다. 살토로, 그래 살토로 빙하에 가고자함이다. 허가를 받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면 몰래 잠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내 호주머니는 열쇠로 작용하지 못한다. 엄청난 입산허가비와 헬기 이용비, 운행비용에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하고는 씁쓸히 뒤돌아섰다.
산들은 많고 미지의 계곡도 많다. 가보지 못한 카네, 차락차 빙하로 마음을 정리했다. 1시간 반을 달려 후세강을 건넌다. 카네 마을은 80가구로 강가 테라스 위에 있다. 마을 안쪽까지 도로는 아직 공사 중이라 경적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제각기 닭, 밀가루포대, 식용유 등을 양손에 들고 원형으로 모인 동네로 들어간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은 앞집 지붕이 뒷집 마당이 되기도 한다. 마을은 씨족으로 형성되어 카네의 절반 이상이 이스마일과 임란의 친척이라고 한다.
▲ 암벽의 허리를 자르고, 동굴로 이어지는 카네마을의 관계수로.
2004년 8월22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왔는데 임란이 난데없이 텔레비전을 보러가자고 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무슨 농이냐고 비웃었다. 들어간 그의 장인댁 처마 밑에는 때가 끼고 찢어진 중국제 플라스틱 신발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집안에서 가끔 고함소리로 터져 나온다. 후끈한 열기의 방에 정말 텔레비전이 있다. 임란이 원정대와 트레킹팀을 따라다니며 번 돈으로 산 것이라며 뿌듯한 웃음을 짓는다.
20여 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빼곡하게 앉아 파키스탄 대 인도의 크리켓 경기를 보고 있다. 파키스탄 선수가 공격으로 나설 때면 ‘파키스탄 진다바드(파키스탄 만세)’를 함께 외치며 응원한다. 이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위성텔레비전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기의 소음은 응원소리에 묻혀 버렸다.
추적이는 비로 하루를 더 머무르고 카네 계곡(Khane Lungma)으로 들어간다.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마을 사람을 대동하지 않으면 혼자 여행은 제지된다. 카네 계곡은 군인이 아닌 카네 사람들의 땅이다. 주민들의 ‘허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계곡 초입은 통나무다리를 건너 북안으로 시작된다. 좌우 암벽은 높고 협곡이라 낙석 위험이 있다. 오를수록 가파르고 좁아지는 계곡은 채 2~3m도 되지 않아 계류가 작은 폭포를 이루고 길이 끊어진 듯하면 절벽에 겨우 잔돌로 매달아 쌓은 벼랑길이 띠로 연결된다. 자연적인 디딤돌을 이용하여 물을 건너길 여러 번,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다다른다. 가파른 언덕발치 백양나무 옆에는 맑은 샘물이 흘러나와 목을 적시고 그늘은 쉼터를 만든다. 꽃이 지고 빨간 몽우리를 맺은 야생장미와 버들은 물을 찾아내려온 듯 줄지어 냇가로 섰다.
▲ 고마브랑사에서의 여유로운 오후.
빙하기에 깎여 만들어진 섬 같은 30여m 테라스 위에 올라서자 땅은 바짝 말라 열기가 뿜어져 올라온다. 정신없이 걸어 드디어 넓은 풀밭과 돌집이 나타난다. 목동 한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고마 초지(Goma Brangsa·3,870m)다. 이곳에서 15분 정도 가면 맑은 물이 솟아 좋은 캠프지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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