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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파의 이해
들어가는 말
조선조 벼슬아치 중 역사책에 이름 석자 올린 인물치고 귀양살이 한번 안 해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조선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궁금증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각종 실록(實錄)에 한 번이라도 이름이 오른 인물치고 귀양살이 혹은 관직삭탈 등의 이유로 한양바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이는 실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떤 이는 귀양을 가서야 비로소 세상이 깜짝 놀라는 베스트셀러들을 누에 명주실 뽑아내듯 줄줄 내놓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저질렀기에 이렇듯 귀양살이를 밥 먹듯 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떠올리게 된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그 답은 어렵잖게 구할 수 있었다. 조선조 중기(선조)부터 본격화 된 당파싸움이 그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언필칭 ‘반만년 찬란한 역사…’ 운운하면서도 조선이 극동의 아웃사이더로 빌빌거리면서 이웃나라의 먹잇감 쯤으로 갖잖게 여겨졌던 가장 큰 이유는 기실 ‘사색당쟁’으로 불리는 당파싸움에 기인한 바 절대적이었다는 얘기다.
당파싸움의 가장 큰 병폐는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모든 연고를 초월하여 가장 우수한 인력을 등용할 수 있는 이른바 ‘인재 풀 시스템’이 원천적으로 가동불능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A당파가 권력을 잡았을 땐 B파에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녹사자리 하나 얻지 못했고, 어쩌다 B당파의 세상이 되면 어제까지의 재상, 명현이던 A파들은 모두 원배(遠配)를 하거나 혹형을 당했는가 하면 조그만 당하관 자리 하나까지도 모조리 B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식이었다. 자연히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였고, 그러다가 이도저도 어렵다 싶으면 반정(왕을 폐하고 자기네를 총애하는 새 왕을 옹립하는)까지 서슴없이 꾀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라고 일컫는 ‘기축옥사’ 때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천재들이 능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스러져버리는 통탄스러운 일이 버젓이 자행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비우고 철수하던 병조판서 황정국이 “기축옥사 때 정언신만 살았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절규하였노라고, 역사는 기록해놓고 있을까…….
한데, 조선의 당파를 들어다 보노라면 동인․서인(후에 공서․청서)․남인(이후 청남․탁남)․북인(이후 대북․소북)․소론․노론(이후 시파․벽파) 등 그 분파가 마치 칡넝쿨 얽히듯 마구 뒤얽혀 있어, 역사공부는커녕 사극조차 노인네나 보는 고루한 것으로 폄하하기 일쑤였던 나로서는 도대체 뭐가 뭔지 헷갈리기만 하였다.
물론, 앞에서 나열한 파벌을 큰 틀에서 본다면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 자리 때문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1591년(선조 24년) 임란 후 세자책봉 문제로 물러난 서인 영수 정철의 처벌수위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1599년(선조 32년)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었을 때 남이공(南以恭)이 반대한 일을 계기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1683년(숙종 9년) 서인은 숙종의 외척(광산김씨 김익훈)에 대한 처분을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1762년(영조 38년) 노론은 사도세자 문제 때문에 다시 ‘시파’와 ‘벽파’로 갈렸다
1804년(순조5년)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벽파 경주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김씨-김귀주(金龜柱)의 형제)가 죽자,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을 축출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전개된다
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서투른 수영솜씨로 인터넷 바다를 허우적거려 보아도 걸려 올라오는 내용들이라는 것들이 때론 너무 난해하고 때론 너무 단편적이고 때론 너무 주관적이어서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을 얻지 못하였던 게 사실이다.
더욱이, 조선의 명운마저 뒤흔들어 놓은 사색당쟁의 시발점이 한갓 두 선비 간의 사감(私感)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역사 교과서에 명망가로 묘사되어 밑줄 그어가며 달달 외웠던 유수한 인물들이 실은 사적(私的) 감정에 의해 파당을 만들고 허구헌날 싸움질에나 침몰함으로써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은 주범(?)들이었다는 점 등은 내게 적잖은 충격과 함께 많은 의구심을 안겨 주었다. 아무려면 진짜 그랬을까 하는….
하여, 사색당파가 생겨난 근본 원인에 대하여 좀더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이곳 저곳 들쑤셔 본 바, 여기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1,000원짜리와 5,000원짜리 지폐를 통해 매일 얼굴을 대하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정철․유성룡․조식․성혼․이발․우성전․송시열․허목․이산해․정인홍․이이첨․박순․윤두수․이덕형․김성일․윤선도.윤증.채제공.김종수.심환지.정약용 등등 그 면면이 가히 ‘장동건’ 급에 비견될 수 있을 만치 초호화 진용이었던 것이다.
하면, 우리 역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어쩌다가 하나같이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그들에게는 어떠한 연유가 숨어져 있었으며,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담보하면서 스스로 당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
이 같은 원론적인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어설프게나마 이 글을 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서, 사색당파의 생멸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해놓은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을 뼈대로 하고 인터넷과 사료 등을 통해 얻은 신빙성 있는 자료들로 살을 붙여서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생멸 과정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이를테면 ‘내가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정리하기 시작하였던 글이라고나 할까.)
전문적인 역사학도의 분석이 아니므로 일부 세세한 대목에서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사색당파를 이해하는데는 그런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 내용을 몇 회로 나누어 여기 올려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을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강조할 점이 있다면, 그들이 어느 날 잠실체육관 같은데 모여 ‘동인당 창당 발기인대회’나 ‘서인당 창당주비위원회’ 같은 걸 열고 만세삼창으로 창당을 결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당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시나브로 그야말로 물흐르듯이 분당과정을 밟아 나갔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책 암기하듯이 이 글을 읽지 말고 옛날 이야기책 대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동인'과 '서인'의 탄생 배경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 7년에, 문명이 높던 젊은 선비 선산김씨 김효원(1542~1590)이 전임자 광산김씨 김계휘에 의해 이조전랑으로 천거된 일이 있었다.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는 내외 문·무관을 천거·전형하는 임무를 맡아보는 벼슬이었는데, 장관인 판서(判書)는 물론 의정부의 3정승도 간여하지 못하는 특유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어 낮은 품계(品階)에 비해 중요한 관직으로 꼽히는 자리였다.
한데, 이에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청송심씨 심의겸이 공식석상에서 강력한 태클을 걸고 나왔다. 이유인 즉, 명종 때 공무로 영의정 파평윤씨 윤원형의 집에 갔을 때 그 곳에 선산김씨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봤는데 문명 있는 자가 젊은 나이에 척신(임금과 성은 다르지만 일가인 신하)에 빌붙어 아첨이나 하려 드는 것으로 보아 ‘싹수가 노란’ 자이므로 이조전랑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선산김씨 김효원으로서는, 파평윤씨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던 이조민과의 친분 때문에 자주 방문하였을 따름인데 이를 빌미 삼아 파평윤씨 심의겸이 자신을 배척하려 하니 이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없었다. 선산김씨 김효원은 우여곡절 끝에 이조전랑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심의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만무였다.
한데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그가 이임할 즈음 파평윤씨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 후보로 천망에 오르게 되자 이번에는 선산김씨 김효원이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심충겸이 사림(士林)에 아무 명망도 없는 사람인데 단지 척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조전랑의 벼슬을 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의겸은 ‘아무려면 외척이 원흉(윤원형을 이름)의 문객만 못하겠느냐’며 되받아 쳤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김효원과 심의겸 간에는 극렬한 상호 비방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심의겸은 김효원을 일컬어 이전의 원한을 그런 식으로 풀려고 하는 쫀쫀한 인간이라고 비난하였고, 김효원은 심의겸이 제 누이 ‘빽’만 믿고 설쳐대는 비루한 인간이라고 몰아세우는 식이었다.
마치 80년대 현대와 대우가 신형차 ‘소나타’와 ‘르망’을 내놓고는 ‘소나타는 차’ 혹은 ‘노망 들린 차’라고 상호 비방전을 극렬하게 전개하였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후 양자간에는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한데 양자 간의 싸움이 점차 확대일로를 걷다 보니 자연히 김효원을 지지하는 쪽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쪽으로 패가 갈리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상황은 장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싸움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심의겸은 비록 척신이었으나 일찍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교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장년층 학자이자 정치가들과 친분이 있었고, 이에 대해서 선산김씨 김효원은 선산김씨 김종직〈조의제문 弔義帝文〉 학파의 김근공에게 수학하였을 뿐더러 이조전랑으로 있으면서 많은 젊은 사림파를 등용하여 신진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시비는 선조 8년에 이르러 더욱 격렬해지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 파 중 한 쪽에 붙어서 사사건건 시비를 벌이며 반목․질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몰락한 정적(政敵) 훈구파 및 외척세력(파평윤씨 윤원형 일파 등)을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처단할 것인가에 대한 큰 입장 차이로 인해 양 계파의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청송심씨 심의겸 일파는 명종 때부터 정치에 참여해 왔던 기성세대가 대부분인 관계로 훈구파․외척의 처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선조 때부터 새로 정치를 시작한 신진세력으로 구성된 선산김씨 김효원 일파는 이들의 처단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김효원은 도성의 동쪽 낙산 밑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 터)에 살았기에 김효원 쪽 사람들은 동인(東人)으로 불렸고, 심의겸은 도성의 서쪽 정릉방(지금의 정동)에 살았기에 심의겸 쪽 사람들은 서인(西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치 70년대 ‘동교동계(DJ계)’와 ‘상도동계(YS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요, 사색당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1575년)
동인은 명종 때부터 명망을 쌓아온 양천허씨 허엽(허균․허난설헌의 부친)을 종주(宗主)로 모셨고 중요인물은 광산이씨 이발․송응개․ 박근원으로, 야은 길재의 영향을 받은 영남지역 선비들이 주류를 이뤄 ‘영남학파’라고도 불렸고
서인은 충주박씨 박순(성리학의 대가)을 종주(宗主)로 모셨고 중요인물은 윤두수․정철 등이며, 서인은 기호지방, 즉 경기와 충청 일대의 선비들로 이루어져 ‘기호학파’로도 불렸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동인은 현실비판적인 성향이 강했고, 서인은 상대적으로 현실지향적인 성향이 강했다.
한편, 당쟁의 폐해로 인해 나라꼴이 말이 아닌 지경으로 흘러가자, 율곡 이이가 이들의 중재자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아홉 번의 과거를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지던 이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었기에 중재자역을 자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의 중재로 만난 서인의 영수 정철과 동인의 영수 이발의 대면에서 정철(서인)이 이발(동인)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불상사가 일어나 동인과 서인 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이는 다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촉발한 중심인물들을 모두 중앙에서 내보내자는 조정안을 냈고, 이 조정안에 따라 나라에서는 그 근원이 되는 김효원과 심의겸을 각 경흥부사와 개성유수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조정책은 오히려 두 파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개성은 이 나라의 중요한 고장이었으나 경흥은 함경도 한 구석에 박힌 외딴 고장이었다. 때문에 개성유수라는 벼슬은 영직이었으나 경흥부사라는 자리는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벼슬이었던 것이다. 이 조치는 두 파벌을 중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을 높여주고 동인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비춰져 동인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고 급기야 이 조치의 장본인인 이이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데 그 공격의 양상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선조는 동인 측의 송응개․박근원․허봉을 각각 회령․강계․종성에 귀양보내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 것이 이른바 ‘계미삼찬’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이이는 조정자 혹은 중립자의 위치에서 어느덧 서인의 거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자연스럽게 동인(주로 영남학파)의 거두는 이황과 조식, 서인(주로 기호학파)의 거두는 이이와 성혼 등 당대의 대석학들로 진용을 재편하게 되었다.
'남인'과 '북인'의 탄생 경위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서 초반 주도권을 잡은 쪽은 동인이었다. 신진세력이다 보니 주로 ‘입 바른 소리’만 골라 했고 이이가 사망한 이후 심의겸 마저 파직되는 등 중심인물이 사라지면서 서인이 흔들리자 자연히 권력의 추가 동인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조 연간 중기로 넘어가면서 동인은 서인을 낡은 정치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기세를 드높였고 이후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모든 건 지나치게 팽창하면 분열되는 게 세상의 이치이듯이 세력이 비대해지다 보니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황과 조식이라는 당대 유림 최고의 석학들이 갖고 있던 사상과 철학이 달랐던 터이라 이들의 학풍이 공존하고 있던 동인에 있어서 분열은 어쩌면 예고된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던 사건이 선조 22년에 있었던 조선 최대의 비극 ‘정여립 모반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이황과 조식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생겨났고 분열의 기운은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하였다.(역시 80년대 YS와 DJ가 만들었던 통합민주당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나뉘어 싸움질만 일삼았던 대목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동인 몇몇 거두들의 사감(私感)에서 비롯된 반목과 갈등이었다. 그 중 가장 유치찬란한 것(?) 한 가지만 소개하면 이런 것이 있다.
이황의 문하생이자 후일 남인의 거두가 된 우성전(1542~1593)이 평양에 갔다가 기생과 정을 통하였는데, 우성전의 부친 우언인이 병으로 서울로 돌아와 있을 때 당시 평양감사가 우성전이 사랑한 기생을 우성전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마침내 우언인이 죽자 많은 조문객이 왔는데, 그때 원래 우성전과 사이가 좋지 않던 동인의 영수 이발이 우성전의 집에 그 기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부친이 병으로 벼슬을 버리고 왔는데, 아들은 무슨 마음으로 기생을 싣고 왔느냐며 비아냥 거렸다. 이것이 우성전과 이발의 경쟁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남산 밑에 살아서 우성전은 남인, 이발은 북악 밑에 살아서 이발은 북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확실히 쪼개지는 단초로 작용한 사건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저 유명한 ‘정여립 모반사건’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서인의 거두 정철이 있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던 동인의 실력자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상소가 선조에게 올라와 동인(특히 호남출신)의 선비들이 1천여명이나 옥사 또는 귀양을 갔던 비극적 사건을 말한다.
『…전주 출신의 정여립은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587년(선조 20)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승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이상 네이버 검색)
한데, 동인세력이 비대해져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던 선조는 이 사건을 동인세력 견제에 이용하면서 ‘수사책임자’(위관)로 서인의 거두이던 정철을 임명하였다.
다음은 KBS-TV 「한국사 傳」에서 방영하였던 ’시인은 왜 당쟁의 투사가 되었나?‘ 편을 발췌한 내용이다.
『…1589년 10월. 역모가 고발된다. 조정 대신들 중에는 역모자였던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동인. 선조는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에게 기축옥사의 수사를 맡기게 된다. 그로부터 1000명의 넘는 선비가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가 시작된다.
“혼인을 안 하고 한방에 안질 않아요. 정철이 손하고 우리 손하고는 한방에 앉질 않아. 방에 갔다가 정철이 손이 있으면 그 방에 앉덜 않고 나와버려.”<광산 이씨 후손 인터뷰 中>
전라도 나주 지역의 광산 이씨 집안. 200여년 전까지 그들은 성씨를 바꾼 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후손들은 정철의 후손과 왕래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수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철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을까?
기축옥사 당시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기축옥사 때 멸족 당한 이발의 집안. 사람들은 옥사를 이용해 정철이 개인적인 복수를 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 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습니다."<선조실록 84권 中>
정철을 위관으로 등용하여 옥사를 다스린 선조. 기축옥사는 선조의 지시로 이루어진 대규모 참사였다. 정철을 이용해 동인의 힘을 눌렀던 선조. 그러나 선조는 기축옥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철을 파직 한다….』
당시 정철이 파직 당했던 이유는 건저문제(建儲問題-세자책봉)를 제기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자로는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인 광해군이 가장 유력하였는데, 문제는 광해군이 적자가 아닌 서자(왕비가 아닌 빈의 아들)란 것이었다. 이를테면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선조는 늙은 나이에 얻은 인빈 김씨의 자식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의사를 영의정인 이산해에게 물어보려 하였는데, 선조의 의중을 꿰뚫어본 이산해는 ‘와병’을 이유로 궁궐에 나가지 않고 말았다. (요즘 말로 하면 아프다는 이유로 ‘땡땡이’를 쳐버렸다고나 할까)
당시 영의정은 동인인 이산해, 좌의정은 서인인 정철, 우의정은 동인인 유성룡이 맡고 있었는데, 이산해가 예고없이 ‘땡땡이’를 치자 선조는 다음 순번인 좌의정 정철에게 의중을 물어보게 되었다. 본시 동인과 서인이 광해군을 추천하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었던 지라, 정철은 선조의 의중이 신성군(인빈 김씨의 둘째아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광해군을 추천하였다.
이에 선조는 격노하고 말았다. 때를 같이 하여 ‘정철이 주색(酒色)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고 있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 또한 빗발쳤다. 결국 정철은 파직된 뒤 명천․진주․강계 등지를 떠돌며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후 유성룡은 좌의정으로 영전되었고 선조는 서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다시 동인을 중용하였다.
그 후 조정에는 정철에 대한 처단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동인 내부에서도 의견이 팽팽히 갈리었다. 동인 영의정 이산해 등은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고, 우성전․유성룡 등은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는 온건론을 폈다. 요컨대, 정철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로 동인은 결국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산해가 낙북(洛北)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강경파는 북인(北人), 우성전은 남산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온건파는 남인(南人)이라고 하였다. 남북 분당은 또한 학통의 분기이기도 했는데, 북인은 이산해, 정인홍 등 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고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이덕형, 김성일 등 영남쪽 퇴계 이황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다.
이것이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기(1591년)된 경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핵분열 된 이유
옛속담에 뱀은 꿈틀거리는 버릇 평생 못버린댔다고, 오랜 단련 끝에 싸움질이 숫제 체질화되다보니 전란 중에도 그들의 당쟁은 멈추지 않았다. 1594년 남인과 북인은 이조전랑 추천문제로 다시한번 ‘다구리’를 붙고 말았다. 남인 정경세가 남이공 등이 후임자로 추천한 북인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을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문인이었으므로 이산해는 즉각 유성룡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어댔고, 1598년(선조31년) 끝내 탄핵과 함께 삭탈관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전란 때 도망(고상한 표현으로 '몽진'이라 한다)가기에 급급했던 선조 ․ 조정 대신들과는 달리 북인들은 ‘주전론(主戰論)’으로 일관하며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명분의 우위에 있었다고나 할까.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망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선조는 그 책임을 동인에게 돌리며 서인에게 잠시 정권을 주었다가 이를 다시 북인에게 주었다. 서인도 고경명 같은 이름높은 의병장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의병장의 주류는 단연 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도 북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입으로만 하는 정치에 신물이 나있던 백성들에게도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문하로 이루어진 북인이야 말로 ‘발로 뛰는(?)’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참신한 세력이었을 터이었다.
그러나 배운 도둑질 못 고친다고, 임진왜란이 끝나기 무섭게 북인은 다시 분열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1599년 북인 홍여순이 대사헌에 오르려 할 때 같은 북인 남이공이 이에 반대하자 북인은 홍여순 파(대북)와 남이공 파(소북)로 나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1602년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 오르면서 소북이 득세하여 정권을 잡고 한동안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대북과 소북이 사생결단으로 치고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세자책봉문제 때문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나라를 나누어 다스림)까지 한 바 있고 광해군 또한 전란 중 분조의 책임자로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조의 마음이 싹 변해버린 것이었다.
제위 35년(1602년)에 서른 두 살 아래의 인목왕후와 재혼한 선조는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그에게 후사를 잇게 하고 싶어 했다.
평소 조선 최초의 방계승통(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소생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조는 자신처럼 후궁 소생인 광해군 보다는 정비 소생의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함으로써 이를 떨쳐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북인은 완전히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세자 책봉 이후 16년간 함께 정사를 다룬 노장파인 대북은 당연히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광해군과 인연이 적은 소장파 중심의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다. 대북은 아기인 영창대군이 어떻게 국정을 돌보느냐고 주장했고, 소북은 왕통은 당연히 적자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북의 중심인물은 이산해, 정인홍 등이었고, 소북의 중심인물은 유영경, 남이공, 김개국 등이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이 세 살일 때 선조가 사망하면서 결국 왕위는 광해군이 이어받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대북정권의 출범이었다. 소북인 영의정 유영경과 병조판서 박승종 등이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34세의 광해군을 두고 3세의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현실적이었다.
유영경의 광해군 배척은 상식을 벗어났던 것이기에 심지어 소북 내에서도 반대파가 속출하여 류영경을 지지하는 탁소북(柳黨-류연경당)과, 그를 반대하는 청소북(南黨-남이공당)으로 다시 쪼개지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권을 잡은 대북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구한 골북(骨北), 육북(肉北)과 이에 반대한 중북(中北)으로 갈라지는 핵분열 사태를 겪게 되었다.(참으로 당 만들어내는 데는 귀신같은 조상님들이었다. 뚝딱 하면 당 하나가 만들어지곤 하였으니까)
광해군은 즉위 후 자신을 지지한 대북을 중용해 내정(대동법 시범실시 등)과 외교(등거리외교정책)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이이첨 등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적통(嫡統)인 영창대군을 살해하는가 하면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는 등 실정도 끊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재위 5년만에 터진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이었다.
영의정 박순의 아들 박응서 등 문벌의 서자로 태어난 일곱의 서자들, 스스로 '죽림칠현'이라고 부르며 무륜당이라는 거처를 짖고 시와 술을 가까이 하던 이들 일곱명이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배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왜란이 발발하고 곤궁에 놓인 조정은 서자들의 의병참여를 이끌어내려고 그들에게도 과거응시 기회를 주겠다는 공약을 하였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말을 바꾸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심한 제재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일곱의 서자가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상인의 하인에게 뒤를 밟혀 모두 잡혀버리고 말았다.
한데, 단순한 서자들의 강도행위처럼 보였던 사건은 역모로 확대되어 거대한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박응서는, 모반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강도짓을 했으며 배후에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 김씨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있다고 자백하였다.
가뜩이나 정통이나 역모에 민감했던 광해군은 광분하였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후 계속되었던, 세자책봉과 관련한 마음고생이 올곶이 되살아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하여 방을 뜨겁게 해서 데워 죽이는 증살을 당하였고,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아들 능창군(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구금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드디어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이 폐모론을 놓고 대북권력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가장 강력한 주장을 펼친 이이첨이 실권을 장악하는 대신 이를 반대하였던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김덕함 등은 귀양을 가고 말았다. 조선의 종묘사직에 최초로 대북파 '1당독립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잉행위가 반동을 낳는 것은 세상사의 원리-. 이는 한동안 은인자중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던 서인으로 하여금 반정을 결심케 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서인은 광해군의 -명나라도 후금(여진족)도 아닌 - 실리 위주의 중립외교정책을 명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는 한편 그의 폐륜행위 또한 극렬히 비판하다가 결국 광해군 15년(1623) 3월 김류․이귀․김자점․최명길․이괄․이서 등이 주축이 되어 선조의 서손 능양군(인조)을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인조반정이었다.
광해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강화도로 유배되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사실상 북인정권의 몰락아었다.
능양군(인조)은 선조가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셋째아들 정원군의 아들이었고, 선조가 총애했던 정원군의 형 신성군의 양자이기도 했으므로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반정의 명분이 있었다.
또한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신경희의 옥사’(1615년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능창군을 추대하고 양시우, 김정익 등과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대북파의 모함으로 장살됨)에 연루시켜 처형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대북정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능양군(인조)은 반란세력들에 쉽게 동조될 수 있었고, 중종이 반정 과정에서 소외된 것과는 달리 그는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사태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백성들에게 생각보다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하자 서인은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는 것으로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북인이 우당(友黨)이 될 수 있었던 남인까지 축출해 고립을 자초한 반면 서인은 남인을 끌어들여 정권의 외연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서인은 이런 유연한 정국 운용으로 쿠데타에 대한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서인은 대북(大北)이 일당독재를 추구하다가 축출된 전례를 거울삼아 이원익 외에도 이수광․정경세․이성구․김세렴․김식 등 남인들을 등용해 ‘서남연합정권’임을 내외에 과시하려 하였다.
비록 이때 등용된 남인들이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명목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이는 명분상 사대부의 화합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반정 정권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발생함으로써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괄의 난이란, 서인 사이에 논공행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에 불만을 품은 부원수 이괄이 변란을 기도하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말하는데, 쿠데타 세력의 내부 분열인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북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을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처형시켰다. 이때 희생당한 대부분의 정치범들은 북인, 특히 대북의 거물들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북인은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잔류파는 서인․남인에 흡수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하여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서남공동정권,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주도권 쟁탈전
인조가 즉위한 이후 서인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비록 쿠데타(반정)에 의한 정권찬탈이었다곤 하지만, 자신들이 손수 임금을 만들어냈으니 기실 거칠 것이 무어 있었겠는가.
한데 일이 이상한 방향에서 꼬이고 말았다. 본시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이었던지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이어왔던 중립외교정책을 집권 직후 ‘친명배금’정책으로 바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후금으로부터 2차례(정묘호란, 병자호란)에 걸쳐 모진 공격을 받았고, 병자년의 2번째 공격 땐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일 효종)까지 볼모로 바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골과의 싸움에서는 40여년간 항쟁을 하였고, 왜군의 공격에 대하여는 7년간의 항쟁 끝에 격퇴한 데 반해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조선이 항복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김훈의 베스트셀러 ‘남한산성’은 이를 기록한 글이다)
‘주전론’을 주창하였던 서인 정권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을 하자고 박박 우겨댔던 건 서인이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식으로든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해서 서인 정권은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번엔 ‘북벌론’을 주창하게 되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 또한 심양에서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악연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터이라 김상헌․송시열 등을 중용하여 불벌계획을 수립하고 군정에 힘썼으나 그 사이 후금이 더욱 강성해진데다 효종마저 급작스레 사망하여 북벌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듯 서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자, 그 동안 은인자중 하며 기회만 살피고 있던 남인은 쾌재를 불렀다. 그리곤 허목을 간판공격수로 내세우고 서인에게 전격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역사는 이를 ‘예송논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송논쟁이란, 효종이 죽은 뒤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자의대비)가 상복(喪服)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2차에 걸친 논쟁을 말한다.
오늘의 시각에서야 그깟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가 뭐 그리 대수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엔 그게 그렇지 않았다. 요컨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정권교체’라는 결과까지 낳은 어마어마한 싸움이 예송논쟁이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 특히 성리학을 중시하여 정치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유교의 덕목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던 때였다. 이에 관혼상재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의식에 있어서 예학 -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 등을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 -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는데, 이 규정을 현실화 하는 과정에서 예학에 대한 학문적 견해차이가 발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라 할 것인 바, 그 전말을 살펴보면 이렇다.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인조 비)인 조대비(자의대비-당시 효종보다 5살 아래였다)의 복상은 서인의 뜻에 따라 1년(朞年)으로 정하고 곧이어 현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660년(현종 1년) 3월 남인의 허목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송시열 등은. 효종이 인조 때 제2왕자였으므로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은 1년설이 맞다고 대항하였고, 남인의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장남이나 다름없으니 3년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1년설이 그대로 채택되었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남인의 논쟁을 주도하였던 허목은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송논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1674년 효종의 아내요,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또다시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때도 조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서인은 효종이 차남임을 강조하며 9개월(大功說) 상복을 결정하였다. 이에 남인은 효종 사망 때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1년으로 정해놓았음에도 이제 와서 이를 9개월로 고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 대로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종은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이번에는 남인 측의 1년설을 받아들여 조대비로 하여금 1년 복상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남인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그 임금 숙종이 즉위하였다.
‘군강신약’의 숙종시대 - ‘남인’과 ‘서인’의 혈투 1
조선 19대 임금 숙종(肅宗) - . 많은 국민들은 그를 ‘희대의 호색한(好色漢)’ 쯤으로나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장희빈(장숙정)이라는 ‘요녀(妖女)’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장희빈은 빼어난 미모와 술수로 궁녀에서 일약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쫓겨나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다. 해서 그녀의 이야기는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수차례 극화되었다. 그때마다 함께 등장하여 장희빈의 교태에 넋을 놓고 침을 갤갤 흘리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였던 것이, 그간 우리가 보아온 숙종의 캐릭터였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숙종이 여자들의 치마폭에나 휩싸여 국정을 팽개쳐버린 나약한 임금 쯤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나약하지 않았으며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국정을 내팽개쳐버린 적도 없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통해 왕권(王權)을 되살리고 신권(臣權)을 쥐락펴락하였던 막강한 권력의 군주였으며, ‘가장 정치적인’ 임금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게임의 도구’였다고나 할까.
1674년, 35살의 나이로 사망한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숙종의 나이는 불과 14살이었다. 100여년만에 ‘적장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제왕학을 단계적으로 학습한 후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는 늘 ‘나는 날 때부터 군왕으로 태어났다’고 자부해왔으며, 즉위 4개월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최대의 당쟁가 송시열을 조정에 들였다 내쳤다를 반복하였고, 임금은 아랑곳없이 학문과 스승만을 중시하는 신하들의 폐단을 막고자 서인에서 남인으로, 다시 소론에서 노론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換局-판을 엎어버리는 것)’을 수차례 반복한 임금이기도 했다.
이때 보여준 숙종의 카리스마와 행동력은 조선의 역대 왕들과 비교해봤을 때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재위 6년 - 불과 스무살의 나이 - 에 경신환국이, 15년에 기사환국이,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서인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고,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화(士禍)에서 목숨을 잃은 정승보다 더 많은 숫자가 세상을 등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권은 왕권에 짓눌리게 되었고 신하들은 숙종의 눈치만 살피는 상황이 되었다. 자칫 잘못해 숙종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렇게 되자 서인과 남인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정글의 법칙’으로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숙종시절에 일어난 세 번의 환국으로 숱한 정치인이 주검이 되어 나갔고, 그 뒤 조선 당쟁사에서 정치보복이 일상화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개국이후 수백 년 간 이어져 내려오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권력 패러다임을 일거에 뒤집어 엎어버린 숙종 - . 이른바 ‘판 뒤엎기의 귀재’로 일컬어지는 숙종의 재위기간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 경신환국(庚申換局)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신권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앞에서 언급한 예송논쟁 자체가 신권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였다. 국왕과 왕비가 승하하였는데 신하들이 상복문제를 놓고 다툰다는 자체가 강한 신권의 반영이라 아니 할 수 없었고, 국왕이 된 천자에게 장남이냐 차남이냐, 혹은 적자냐 서자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약한 왕권의 반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은 1675년(숙종 1년) 정월 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덕원으로 귀양보내는 등 서인을 모조리 축출해버리고 허목과 윤휴 등 남인을 요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기호세력의 유생들이 결집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에 대한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은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인 내부에서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대두되어 강경론자인 우의정 허목은 ‘청남(淸南)’으로, 온건파인 영의정 허적은 ‘탁남(濁南)’으로 분파되는 등 여전히 조정이 갈등으로 들끓자 이에 염증을 느낀 숙종은 척신(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이용하여 남인세력을 견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가뜩이나 왕위에 오른 뒤 잦은 병환으로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았던 데다 인조반정이 있은 지 60년도 채 안되는 시기였던지라 언제든지 반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부담감 또한 적지 않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김석주는 본시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2차 예송논쟁 때 남인측 주장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이 제거되자 다른 서인들이 함께 축출되면서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급기야 서인세력의 발언권마저 완전히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잡고 남인세력을 몰아낼 궁리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경신년인 1680년(숙종 6년) 3월에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집에서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즈음 이번 연회에서 병조판서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독주로 죽일 것이며, 허적의 서자 허견은 무사를 매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연회에 불참하였고 김만기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일명 ‘유악(油幄)’이라 불리는 이 차일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세도가 높은 양반이라도 일체 사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왕실에서만 사용하였고, 왕의 윤허 없이는 사용 자체가 금지되었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이 왕의 윤허도 받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빌려가서 썼던 것이다. 숙종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허적의 집을 염탐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참석자의 대부분은 남인이었고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申汝哲)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울화통이 터진 숙종은 철원에 귀양가 있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에 앉히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모조리 서인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사단이 이쯤에서 일단락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으나, 이런 미묘한 갈등 상황에서 다음달인 4월 '남인박멸'에 골몰하던 김석주가 사주하고 정원로가 고해바친 '허견(허적의 서자)'의 역모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 ‘福자 돌림’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 즉,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소현세자의 손자)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고, 때를 같이 하여 도체찰사부( 조선 시대 영의정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 소속의 둔군이 그즈음 별다른 이유 없이 특별훈련을 하고 있다는 동향도 숙종에게 즉각 보고되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완벽한 '정치공작'이었으나, 남인을 축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숙종이 이를 묵과할 리 만무였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 ·복창군 ·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었으며,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이 환국 이후 드디어 저 유명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군강신약’의 숙종시대 - ‘남인’과 ‘서인’의 혈투 2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8년 10월, 궐 안에 산실청(産室廳)이 세워졌다. 숙종의 후궁 장옥정(장희빈)이 출산을 앞두게 된 것이었다. 벽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이 붙고, 바닥에는 짚자리가 깔리고, 그 위로는 백문석과 기름종이가 덮이고,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고운 짚자리와 말가죽이 차례로 깔렸다.
내의원 전의(典醫)가 순산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말고삐를 거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며칠 뒤인 10월 27일, 고고(高高)의 성(聲)의 울리며 마침내 왕자가 태어났다. 드디어 숙종이 첫아들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즉위한 지 14년만의 경사였다.
돌이켜 보면, 첫 번째 부인 인경왕후(1661~1680, 김만기의 딸)가 죽은 후 국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의 송시열․김수항 등이 결정한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인현왕후 민씨)을 새 왕비로 맞아들인 지도 어느덧 6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후궁 장옥정의 ‘득남’ 소식은 집권파인 서인에게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것이 필경 장옥정의 배경이 되는 남인세력의 입지강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기실 역관(통역관) 장경과 종 사이에서 태어나 5촌 당숙 장현(역시 역관이었다)의 집에서 성장한 장옥정은 경신환국으로 정국이 요동치는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세력과의 결탁으로 조대비(자의대비-인조의 비)전에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남인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타나는데, 숙종이 문안 갔을 때 남인측인 조대비가 의도적으로 장옥정을 연결해주어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도 그렇거니와 당숙 장현이 경신환국 때 역모로 죽은 복선군 형제(三福)의 심복이면서 남인세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로 함경도에 귀양을 갔었던 과거지사 또한 남인이 정권탈환의 일환으로 그녀를 궁녀로 밀어 넣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장옥정은 일개 궁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꽤 자주 등장하였는데, 국왕의 총애를 받는 궁녀가 조정에서 논란의 핵이 된 것은 장옥정이 유일하였거니와 비난을 제기한 측이 하나같이 서인이라는 점 또한 당시 서인세력이 장옥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때문에 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다시금 실권(失權)의 악몽에 떨게 할 수 있을 만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당시 서인의 심사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옥교(8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다가 큰 수모를 당한 일이 그것인데, 당시 이를 주도한 서헌부 지평 이익수가 바로 서인이었던 것이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비록 천민(賤民)이었다곤 하나 유일한 왕자의 외할머니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옥교에서 내려지고 노비들은 흠씬 두들겨 맞았으며 옥교는 불태워져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컨대 장옥정의 아들은 사직을 이를 왕자가 아니라 남인가(南人家)의 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서인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숙종을 진노케 하였고, 상황은 오히려 장옥정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왕자 균(昀-후일 경종)이 태어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숙종은 원자정호(元子定號), 즉 세자예정자 정하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만약 선뜻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
이에 서인 일색이었던 조정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중전(인현왕후)이 아직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는 것이었다. 특히 숙종의 처가세력인 민유중, 김만중(김만기의 동생) 등의 반발이 거세었다.
하지만, ‘꿈에 시어머니가 나타나 장옥정은 전생에 왕이 죽인 짐승이 환생한 요물(妖物)이므로 가까이 두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숙종에게 고변하는가 하면 장옥정에게 회초리질까지 하는 등 투기(妬忌)성 언행이 잦아진 인현왕후에 노여움을 갖고 있던 숙종이었던 지라,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사태가 너무 늦어 버린 감이 있었다. 게다가 정적인 남인까지 숙종의 결단을 전폭 지지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결국 처음 얘기를 꺼낸 지 불과 닷새 만에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종묘사직에 고해버렸다. 그리고 장옥정은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명실상부한 ‘장희빈’의 탄생이었다.
한데 원자 정호문제가 이렇게 마무리되어 갈 즈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려 조정은 다시 불난 호떡집처럼 시끄러워지게 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인 즉, 송나라의 철종은 열 살이 지나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뭐가 그리 급해 간난 아기를 원자로 정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며 이에 격분하였고 서인이 집권한 상황 하에서는 원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숙종은 정권을 남인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한 후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서인가(西人家)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있는 한 원자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씨를 내쫒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안국동 사저로 좇겨나고 그 열흘 뒤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로써 경신환국으로 축출된 지 9년 만에 남인은 정권을 탈환하였으며, 조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궁녀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인에게 정치보복을 단행하였다. 그간 서인으로부터 받은 정치탄압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남인의 보복의 칼날은 당연히 서인 영수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향하였다.
남인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특히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며 그를 공격하자 숙종은 송시열을 삭탈관작 시킨 뒤 제주도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송시열이 살아있다는 자체를 불안해한 남인은 그를 국문(鞠問-왕의 명령에 의하여 국청에서 범인을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당시 83세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도중 정읍 땅에서 사약을 받고 목숨을 거두었다.
이후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 김수흥, 김수항과 홍치상 등 거물 정치인 18명이 죽고 59명이 귀양을 갔으며, 이밖에도 26명이 파직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100명 이상의 서인들이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기사환국’의 전말인 것이다.
○ 갑술환국(甲戌換局)
장희빈을 떠올리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인현왕후 민씨이다. 서인의 거물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의 본부인 인경왕후(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가 즉위 6년만에 스물의 꽃다운 나이로 일찍 죽자 서인의 중심인물들에 의해 국상 중에 급히 후임 왕비로 결정된 인물이었다.
원래 왕비에 대한 간택권은 왕실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당시 대비였던 명성왕후(현종비)가 서인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세력과 명성왕후의 후광으로 인해 민씨는 손쉽게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 장희빈이 먼저 왕자를 낳게 되자 정치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서인세력과 함께 궁궐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비가 된 장희빈의 행태가 점차 오만방자해지고 그의 오빠되는 장희재 또한 많은 문제를 야기하자 숙종은 장희빈을 멀리하는 한편 민씨를 폐위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듯한 언행을 자주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인(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세력의 민암 등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영원히 축출해버릴 심산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폐비사건 이후 장희빈과 연합한 남인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되는 것이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을 뿐더러, 그즈음 새로 사귄 여자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에게 사랑과 정열을 마구 쏟아붓고 있는 중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이후 되려 김춘택 등을 옹호하고 남인을 맹비난하면서 궁지에 몰아넣어버렸다. 판을 다시 엎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하였던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은 언제, 어떤 연유로 다시 판을 엎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남인의 지나친 세력팽창이 눈에 거슬렸다는 이유만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엔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서인의 치열한 물밑 공작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서인의 ‘정권 재탈환 프로젝트’는 쌍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소론의 한중혁이 남인의 막후 실력자 장희재(장희빈의 오빠)와 동평군(인조의 손자 )에게 뇌물을 주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한다’는 '양해각서'를 받아내는 프로젝트였다. 이를테면 남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서인의 정계진출을 도모한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신뢰를 최대한 추락시킨다는 프로젝트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서인은 당시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숙빈 최씨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숙빈 최씨로 하여금 남인과 왕비 장씨의 잘못을 지속적으로 일러바치도록 하였다.
예컨대, 왕비 장씨가 자신을 괴롭혀서 못살겠다는 투정을 숙종에게 자주 하는가 하면 남인에 대하여는 소론측 인사들이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시켜버리는 작전이었다.
결국 숙종은 이 같은 서인의 양대 프로젝트에 의해 왕비 장씨와 남인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그들을 내쫓아바리기로 마음 먹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문을 주도하였던 민암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귀양조치하였으며, 폐비 민씨를 지지하던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또한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켜 궐 밖의 취선당에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병술환국이다.
이 환국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집권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에서 분기된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후부터는 노 ·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 사족(蛇足)…
취선당으로 나간 이후 몇 년 동안 장희빈은 숙종에게서나 역사 속에서 ‘잊혀진 여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 장희빈은 또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또 다른 여인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가,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밀고를 한 때문이었다.
내용인 즉, 장희빈이 취선당 뒤편의 사당에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을 꽂거나 화살을 쏘는가 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귀신에게 새 옷을 지어주면서 인현왕후를 죽여달라고 빌었다는 것이었다. 이 밀고로 인해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두달 뒤 끝내 사약을 받고 말았다.[이를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한다]
그렇다면, 숙종은 왜 한때 총애하였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리고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되었을까.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은 숙종이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국정지표’였다. 숙종의 이 같은 의지는 장희빈의 사사를 명하면서 내린 비명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국가와 세자’를 위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숙종의 의지는 세 번의 '환국’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싹쓸이 하고 패자에게는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르던 환국, 이를 통해 숙종은 신하를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또한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정략(政略)에 이용당한 측면이 크다. 혹자는 숙종의 여성편력을 꼬집기도 하지만, 조선의 역대 임금치고 축첩을 하지 않은 임금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오히려 축첩이 왕권의 상징으로까지 회자되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유독 숙종 대에서 여자문제가 화두로 대두되었던 것은 장희빈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한명의 첩이 아니라 남인이라는 정치세력의 대표 브렌드마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요컨대 숙종은 환국정치를 통해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아니라, 그들의 뒤에 있는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택하였다는 얘기다.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나가던 시기 ―. 역관의 딸로 태어나 궁녀가 되고 빼어난 미모와 남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바탕으로 왕비라는 당대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인 장옥정, 그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숙종은, 이 같은 희생을 대가로 얻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이유
서인은 언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이렇게 서두를 떼는 것이 이 단원의 시작으로 합당하겠으나 갑술환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미 - 뜬금없이 - 소론의 몇몇 중요인물들이 등장해버렸으니 이건 이제 서두로서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할 듯 하다.
하여, 서인은 언제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기에 갑술환국 이후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가 ― 라고 서두를 바꾸면서 이 단원을 새로이 시작하려고 한다.
노론과 소론의 탄생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의 시계바늘을 10년 정도 거꾸로 돌려놓아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잠시 ‘삼복의 변(三福之變)’ 직후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1680년 ‘삼복의 변’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은 내친 김에 남인세력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도모하였다. 김석주․김익훈 등이 김환이라는 첩자(정보원)로 하여금 남인 유생 허새(許璽)와 허영(許瑛)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자질케 하여 이들을 비롯한 남인 잔당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 또한 척신 김석주의 계략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김석주는 경신환국으로 물러난 남인들이 자신을 보복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김석주는 남인의 암살기도를 우려해 서울에 집을 아홉 채나 구입해두고 하루씩 돌아가며 잤다고 한다.
이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김석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남인소탕작전’을 기획하고는 김환이라는 작자에게 허새의 옆집으로 이사가서 그들과 교분을 튼 뒤 역모기미를 포착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김석주는 사은사(謝恩使-은혜 보답을 위해 파견한 임시사절)로 청나라를 향해 떠나게 되었고, 매형인 김익훈에게 이 일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였다.
한데 그즈음 김환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김익훈은 일을 서둘렀고, 결국 김환은 허새와 허영이 인평대군의 셋째아들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고변을 하게 되었다. 연이어 김중하와 김환의 사주를 받은 전익대가 김환과 유사한 고변을 하였다. 불과 일주일 동안에 일어난 이 3건의 고변은 모두 남인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사는 이를 ‘임술고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허새․허영은 사형되고, 남인계열의 다수가 파직․유배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사(국청) 과정에서 그와 같은 고변은 사실이 아니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김석주가 김환을 허새의 이웃으로 이사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작정치라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정국은 들끓었다. 남인은 물론이고 서인의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도 척신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서인 소장파인 조지겸, 유득일, 유명일 등은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인 김익훈을 조사하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민정중, 우의정 김석주 등 서인 노장파는 김익훈을 옹호하였다. 서인 내부에서 노장파(노론)과 소장(소인)파의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숙종은 당시 사대부들의 인망이 두텁던 송시열, 박세채, 윤증을 조정에 불러들여 파문을 잠재우려 하였다. 그런데 강직한 성품으로 소장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송시열이 김익훈을 맹비난했던 당초의 태도와 달리 한양에 도착하여 노장파를 만난 이후 돌연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김익훈이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소장파의 실망은 컸다. 그들은, 이번에는 윤증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숙종의 부름을 받고 고향 논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윤증은 과천에서 아버지의 제자인 나량좌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먼저 한양에 와 있다가 이를 전해들은 박세채가 윤증을 찾아갔다.
윤증은 박세채와 시국을 논하던 중 조정에 나가는 조건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남인과 서인의 화평이었고, 두 번째는 3외척(김만기, 김석주, 민정중)의 배척, 그리고 셋째가 당색이 아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겨냥한 것이었다)이었다. 이는 소장파의 주장과도 괘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솔직히 토로하였고, 결국 윤증은 사직 상소를 올린 다음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박세채 또한 고향인 파산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조정에는 세 사람 중 송시열만 남게 되었는데, 그 역시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요컨대, 서인내에서의 송시열 대 윤증․박세채의 인식 차이가 분당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얘기다.
한데, 송시열과 윤증이 갈라선 데에는 윤증의 송시열에 대한 구원(舊怨)도 상당부분 작용하였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7년쯤 거꾸로 돌려 이들의 관계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송시열과 윤증은 본시 사제지간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1673년(현종 14년)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윤증은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였다. 한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남인 윤휴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이를 아주 성의없게 써주었다. 비문의 내용인 즉, ‘강화도사건’이라 불렀던 윤선거의 약점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갔던 윤선거의 가족은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난을 맞았다. 청군(淸軍)이 밀려오자 윤선거 아내는 오랑캐에 몸을 더럽히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목을 매 자결하고, 또 권순장․김익겸 등 그의 동료들도 자결하였지만, 윤선거는 평민복장 하고 마부로 변장 후 몰래 강화성을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하였다.
늙은 부친이 살아있어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강화도,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외치며 청군에 항전하거나 자결한 상황에서 혼자 성을 빠져나온 사실은 명분을 중시하는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윤선거는 이를 일생의 치욕으로 여겨 이후 벼슬도 마다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갔는데, 당시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았던 송시열이 이를 다시 문제 삼은 것이었다. 윤증은 송시열의 유배지인 장기까지 찾아가 이를 고쳐달라고 졸랐으나 송시열은 자구 몇 개만 고쳐줄 뿐 문구는 고쳐주지 않았다.
이는 결국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까지 이어졌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당시 송시열이 살던 곳이 대전의 동쪽에 위치한 회덕(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이산(尼山)이어서 이를 ‘회니시비’라고 하였다.(윤증은 이때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사망할 때 자신의 비문은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지금도 그의 묘비에는 비문이 없다고 한다)
이때에 서인의 영수이자 노장이었던 송시열 지지파가 노론(老論)이 되고 한때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증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선비들이 윤증을 따르게 되면서 소론(少論)이 되었다. 따라서 그 성향도 노론은 다분히 보수적이었고 소론은 개혁지향적이었다.
노론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석주․민정중․김익훈․이선․이수언․이이명․이여․김수항 등이었으며, 소론의 중심인물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조지겸․오도일․한태동․박태보․임영․이상진․남구만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양 파벌은 마주치면 으르릉 대기만 하였을 뿐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고 나선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1970년대 YS계와 DJ계가 당시 신민당이라는 제1야당의 울타리 안에서 사사건건 대립하였던 것과 유사한 형태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렇듯 오랜 갈등관계에서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던 소론(소장파)와 노론(노장파)의 관계가 마침내 비등점을 넘어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쪼개져버리는 사태가 도래하고 말았으니, 그 단초를 제공하였던 사건이 이른바 ‘무고의 옥’이었다.
병술환국 이후 소론이 정권을 잡았을 무렵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동생에게 보낸 서신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는 문구가 있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했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 뒤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조정은 장희빈에 대한 처분 문제로 연일 시끄러웠다.
당시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이때 좌의정이었던 노론 이세백은 세자의 청을 외면했고,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눈물을 흘리며 세자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당시 정국은 세자에 대한 지지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고, 서인 중에서도 온건파였던 소론은 후일 왕위를 잇게 될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소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희재와 무속인, 그리고 장희빈의 주변인물들을 국문하여 죽였으며, 장희빈에 대한 처벌을 만류하였던 소론세력을 조정에서 쓸어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 소론의 중요인물들이 귀양을 가거나 파면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 뒤 조정은 다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경종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혈투
마치 수백년 뒤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거라는 걸 예견이나 했던 듯 파란(波瀾)과 반전(反轉)으로 점철되었던 숙종시대는 1720년 6월 숙종이 즉위 45년 10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20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정점으로 치닫는 정쟁의 한 가운데에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생생히 지켜보아야 했던 경종. 그런 경종의 등극은, 장희빈을 죽이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노론에게 정치적 박해가 뒤따를 것임을 알리는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경종으로서는 즉위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그다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경종(당시는 세자)의 나이는 14세였다. 한마디로 ‘알 것 다 아는’ 나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 엄청난 사건은 골수에까지 사무쳤고 이후 경종은 줄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없었다. (그가 후사를 잇지 못한 이유로, 일설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마신 직후 옆에 있던 경종(당시 세자)의 ‘거시기’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렸기 때문이라고도 하나, 확인된 사실이 아니기에 긴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숙종은 세자의 이런 약점들을 거론하며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연잉군에게 왕세자 대신 편전에 참석하여 정치를 배우라는 명을 내렸다. 소론이 대뜸 이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났다. 건강을 핑계로 세자를 바꾸려는 수작을 즉시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소론과 노론 간에 너죽고 나살자는 식의 싸움이 벌어졌고,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숙종이 사망하자 경종이 가까스로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데 워낙 병약하여 ‘종합병원’으로 불리는 경종이다 보니, 즉위 초부터 소론과 노론 간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터져버렸다.
첫 번 째 사건은 그해 7월 유학 조중우의 상소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조중우는 상소를 통해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의 명호(名號-이름과 호)를 높일 것을 건의하였다. 즉 장희빈의 작호(爵號-관작의 호칭)를 빨리 회복시켜 나라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그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은 선대왕마마(숙종)의 엄중한 결정을 위배하였다 하여 조중우를 죽이고, 동조자인 박경수 등을 귀양 보내 버렸다.
이후 경종을 만만하게 본 노론은 곧바로 또 다른 도발을 획책하였다. 노론계인 성균관 유생 윤지술은 숙종의 묘지문에 장희빈이 민비 시해죄로 처형된 사실을 명백히 기입하자는, 임금 앞에서 감히 하기 어려운 방자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소론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의 망언을 규탄하고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노론의 비호로 무마되고 말았다.
이 두가지 사건을 기화로 노론과 소론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야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노론은 이정소라는 자를 앞세워, 임금이 비실비실 하는데다 후사까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하여 사직이 흔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소론의 반대가 거셌지만, 경종은 노론의 위세에 눌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이에 소론 유봉휘가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의집중포화를 맞고 유배에 처해졌다.
한데, 보자보자 하니 보자기로 안다고, 그 두 달 뒤 노론은 조성복을 앞세워 이번엔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왔다. 요컨대, 경종이 병도 많거니와 1717년 선대왕(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케한 사례(정유고사)도 있었으므로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경종으로 하여금 아예 정사에서 손을 때라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경종은 이 요구 또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론의 좌참찬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이 간절히 말리고 중앙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지방의 유생까지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취소를 간청하고 나섰다. 게다가 당사자인 연잉군 또한 4차례나 이의 철회를 간청하고 나섰다. 노론은 결국 자신들의 주장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종은, 한 번 내뱉은 말 바로 거둬들이는 건 체통에 관계된다고 생각하여 "나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려버렸다. 그러자 노론측은 경종의 마음이 대리청정 쪽으로 굳어졌다고 판단하여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대리청정 요구 취소'를 다시 '취소'하고는 재차 대리청정을 요구하게 되었다.(이를테면 경종과 노론간의 심리전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노론의 태도가 다시 대리청정 요구 쪽으로 선회하자 이번에는 경종이 적이 당황하였다. 의례적인 '립서비스' 차원의 '외교적 하교'일 따름이었는데 노론측이 이를 자신의 참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소론 조태구를 불러들여 이의 해결을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대리청정은 숙종이 춘추가 높은데다 병이 중하여 부득이 행한 조치였으나 지금은 전하의 나이가 불과 34세이고 즉위한지도 1년밖에 안될 뿐더러 병세 또한 숙종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므로 대리청정은 부당한 것'이라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대신들도 다른 명분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노론 측은 얼마 전 재차 올렸던 대리청정 요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또다시 이의 '취소'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대리청정 요구를 두고 일관된 명분을 보여주지 못한 노론 측에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졌음은 물론이고, 정적인 소론으로부터도 무차별 적인 비난성명이 연일 쏟아져 나왔다.
한편, 명분에서 앞서있던 소론은 이 기회에 노론을 박멸하기로 하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워버렸다. 그 해 12월 김일경 등 ‘7인의 특공대’가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노론의 4대신(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에게 '부당하게 정권교체를 획책한 역모자'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 상소 ‘한 방’으로 갑술환국 이후 지속되어 왔던 노론의 권력기반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동안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물경종’이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해야 했던 경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4대신을 파직한 후 지방으로 내쫓아버렸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 또한 대부분 조정에서 쓸어내 버렸던 것이다.(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판 엎기(환국)’이다보니 적절한 타이밍에 이를 제대로 한번 써먹은 셈이다)
그리고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을 기용하는 등 소론의 중심인물들을 정권의 최일선에 배치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소론정부시대’의 도래를 만방에 알렸다.
한편, 조정을 장악하면서 탄력 한번 제대로 붙은 소론은 이 절호의 기회를 어찌 헛되이 보내랴를 줄창 외치며 노론측 인사들에 대한 축출작업을 더욱 가속화하기 시작하였다.
한데 타이밍 한번 절묘하게도, 그즈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이란 지관이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 : 칼로 살해, 소급수 : 약으로 살해, 평지수 : 모해하여 페출)을 들고 나와 주었다.(하지만 소론이 노론 척결을 위하여 목호룡을 매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숙종 말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노론이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었는데, 신분상승을 위해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곡예를 하던 목호룡이 소론에게 권력이 넘어가자 새삼 예전의 음모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김용택․이기지․이희지․심상길․홍의인․김민택 등 대부분 노론 4대신의 자식 또는 조카, 혹은 추종자들이었다.
조정은 다시 발칵 뒤집어졌고, 노론의 운명은 벼랑 끝에 매달린 형국이 되었다. 경종은 기다렸다는 듯 국청을 세웠고 관련자들을 모조리 처단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쫓겨가 있던 노론 4대신 또한 한양으로 압송하여 도륙을 내버렸다.
왼쪽부터 ‘노론 4대신’인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초상. 노론 영수인 이들은 경종을 제거하고 연잉군을 추대하려던 노론 당론을 추진하다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모두 사형당했다. 영조가 즉위한 후 모두 복관되는데 노론 쪽에서는 이를 신축·임인년에 발생한 선비들의 화(禍)라는 뜻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렀다.
당시 노론의 피해상황을 보면, 사형된 자가 20여명, 맞아 죽은 자가 30여명,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끌려와 죽은 자가 13명, 귀양 114명, 자살한 부녀자가 9명 등으로, 졸지에 불어닥친 피바람으로 노론 집안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이 모해음모사건의 보고서에는 왕세제 연잉군도 가담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전례로 봤을 때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를 왕자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을 뿐더러 연잉군이 대비 인원왕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까지 내놓겠다는 배수진을 치며 결백을 호소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노론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소론은 강경파인 준소(峻小), 주모자만 처형하자는 온건파인 완소(緩少), 왕세제의 보호를 표방하는 청류(淸流) 등으로 나눠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폭로한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하여 역사는 이를 ‘신임사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임사화 이후 조정은 소론세력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늘 비실비실하던 ‘비운의 왕’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만인 1724년 8월, 소론이 권력의 단 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훌쩍 세상을 떠났으며, 그를 떠받쳤던 소론의 전성시대도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52년)을 재위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살았던(83세) 타이틀 2관왕의 소유자 '영조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영조시대① - 탕평(蕩平)정국
조선시대 궁궐에서 근무한 여자들 중 실제 궁궐 살림을 책임졌던 상궁 이하 실무자들의 품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궁,상의(정5품)⇒상복,상식(종5품)⇒상침,상공(정6품)⇒상정,상기(종6품)⇒전빈,전의,전선(정7품)⇒전설,전제,전언(종7품)⇒전찬,전식,전약(정8품)⇒전등,전채,전정(종8품)⇒주궁,주상,주각(정9품)⇒주변치,주치,주우,주변궁(종9품)
위에서 나열한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오늘날로 볼 때 행정서기보․전기주사…등등에 해당하는 직류․직급별 분류라 할 것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과 '나인'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종5품 이하의 궁인직 여인을 말한다. 그러다가 대체로 35∼36년쯤 근무하면 정5품을 제수 받게 되어 이때부터는 ‘상궁’이라 불리었다.
그렇다면, 『무수리』는 어떤 일을 맡은 여인이었을까. 각 처소에서 물 긷기, 불 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 나인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통칭하여 무수리라고 불렀다. 그들은 대부분이 기혼자로서, 가슴에 패(牌-출입증)를 달고 주로 궁 밖에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궁녀가 정규공무원이었다면 무수리는 이를테면 잡급직 혹은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조선조 21대 왕 영조는 바로 이런 무수리의 아들이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재임 중 3명의 왕비(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두었으나 슬하에 아들은 한 명도 두지 못했다. 정작 그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주인공들은 장희빈과 무수리 최씨 등 이른바 ‘창밖의 여자’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경종을 낳은 여인이 장희빈이요, 영조를 낳은 여인이 무수리 최씨였던 것이다. 더욱이 최씨는 결혼까지 한 전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경종과 영조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긴 자식들이었다는 얘긴데, 요즘 같으면 만사 재치고 가정법원부터 직행하였을 중차대한 가정파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궐 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잔치까지 성대히 벌어졌을 터이니, 세상 참 불공평(?)하단 말밖에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각설하고, 영조에게는 이처럼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즉위 초기엔 일부 반대파 - 특히 소론 강경파 - 에서 그를 임금으로 간주하지 않는 행태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임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야 말로 이를 불식시키는 첩경임을 직시하고 평생 근신하는 자세로 국태민안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짐으로써 조선의 발전을 크게 앞당긴 입지전적인 임금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즉위와 함께 영조가 내지른 제일성은 ‘탕평책(蕩平之策)’이었다. 기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붕당의 폐해가 누구보다 뼛골 깊숙이 와 닿았을 것이었다.
영조는 이를 몸소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있었던 소론의 이광좌․조태억을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세제 책봉을 격렬히 반대하였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조정의 기강을 다잡는 차원에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만들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 첫 번째 타켓은 뭐니뭐니 해도 ‘7인의 특공대’중 대장 격이었던 김일경이었다. 때마침 노론 송재후로부터 신임사화 조사결과서(교문)에 연잉군 시절의 영조를 음해(경종을 독살하려했다는)하는 문건이 있으므로 김일경을 단죄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 이후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처에서 빗발쳤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심문)하였으나, 영조에게 ‘나으리…’ 운운 하며 임금을 임금으로 대하지 않는 방자함으로 일관하던 김일경은 끝내 공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처형되었다.
또한 노론 역모설을 고변하여 신임옥사의 또 다른 단초를 제공하였던 목호룡도 친히 국문하였으나 같은 행태를 보임에 따라 당고개에서 목을 자른 후 3일간 거리에 매달아놓는 참형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하였던 나머지 6명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의 왕세제 시절 소론이 저지른 행위들이 모함으로 속속 드러나고 공작정치에 대한 비난이 비등해지자 기를 편 노론이 다시 벌떼처럼 소론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영조는 이광좌, 조태역, 유봉휘 등 소론 핵심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민진원, 정호, 이관명 등 노론측 인사들로 진용을 다시 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아울러 노론의 4대신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임옥사를 ‘거짓으로 죄를 꾸민 것’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신원하는 조치를 단행하는 한편 과천에 노론 4대신을 기리는 사충서원도 세웠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하지만 노론 측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조를 압박하였다. 이를테면 즉위를 도와준 자신들에게 정치적 빚을 갚으라는 ‘빚 독촉’이었던 셈이다.(이 정도면 지지세력이 아니라 반 공갈․협박세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특히 민진원, 정호 등이 주동이 되어 신임옥사에 대한 보복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국정의 제1목표로 설정하였던 영조로서는 소론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이 같은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노론은 ‘얼음과 숯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빙탄불상용)’는 논리를 내세우며 차제에 소론과 노론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다시 압박하고 나왔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정국이 다시 정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전가의 보도 같은 ‘판엎기(환국)’를 통해 이를 타개하였다.
민진원, 정호 등 노론 대신들을 전격 파면시켜버리고 그 자리에 얼마 전 몰아냈던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 등을 다시 기용하는 한편 소론세력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그리고 경종 연간에 있었던 세제책봉 상소 건과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 상소 건 등을 모두 불충(不忠)한 행위로 규정하였다. 하여, 을사처분에 의하여 ‘사충(四忠)’으로 신원되었던 노론의 4대신은 졸지에 ‘사역(四(逆)’으로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즉위 4년째 되던 1728년 3월, 뜻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났다. 한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과격세력이 경종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의 교체를 기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름하여 ‘이인좌의 난’이었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주군을 잃은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일부 소론 과격세력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의 급진세력을 포섭하여 영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설의혹이 있으며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반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모반를 정당화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박필현 등은 영조 즉위 직후부터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지방의 유력인물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양과 지방에 속속 조직이 만들어졌고 지역별 대표도 선임해놓았다. 아울러 평안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도 구어 삶아 놓았다.
이윽고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의 동생 심유현의 말("주상께선 승하하시기 전 검은 피를 쏟으셨다"는 말)을 빌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곳곳에 이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돌아다녔다. 이들은 이 소문에 동요를 일으킨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동기가 모호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동조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용인에 퇴거하여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조정에 고변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김중만 등은 반역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모반자들의 색출을 명령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반역세력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1727년 3월 15일 청주의 이인좌가 청주성을 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이순신의 손자), 군관 홍림 등을 살해한 뒤 성을 접수하였다. 그리고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고 스스로를 대원수라 지칭하며 곳곳에 격문을 만들어 붙이고 관의 곡식을 풀어 민심의 동요를 획책하였다. 그는 모든 군사에게 흰옷을 입히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인좌의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하였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새로 도순무사(변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에 파견되어 군무를 맡기도 하고 지방관들의 비정(秕政)도 살폈던 벼슬)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고 말았으며, 청주성을 지키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성에서 밀려나온 뒤 상당성에서 패함으로써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것은 소론이었다. 그러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다는 이유로 인해 이후 소론의 입지와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반면, 영조는 이 사건으로 국정의 제1목포로 설정하였던 탕평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소론측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반란이었고, 영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론을 정책에 반영할 명분이 제공된 고마운(?) 반란이었던 셈이다. 왕을 제거하려 한 반란이 도리어 왕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런 역설이 세계의 반란사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아가자 영조는 당파싸움 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라는 명목 하에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노․소 안배의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탕평책이었다.
그는 노․소론간의 ‘충역(忠逆-충신과 역적)시비’를 똑같이 인정하고 똑같이 처벌한다는 ‘양시쌍비(兩是雙非)’ 논리에 의해 편파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때까지 노론과 소론 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을 절충해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그리고 소론의 조문명․조현명․송인명․서명균 등과 노론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 등 탕평파 인사를 주축으로 ’노․소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책을 실현하였다.
영조는 관직을 임명할 때에도 반드시 노․소론 관원을 1:1로 배치하는{쌍거호대(雙擧互對)}정책을 시행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吏曹)의 인적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을, 참의에 소론 서종옥을 앉히면, 전랑에는 노론 신만을 앉혀 상대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리하여 정국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늘 명치 깨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채증 증세 같은 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경종 연간에 자신을 추대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노론측 인사들의 신원(일종의 명예회복)문제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는 영조 자신의 도덕성이나 정통성 문제까지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을 간곡히 설득하고 이들의 양해를 얻어 점진적으로 노론의 피화(被禍)자들을 신원시켰고, 1740년 노론 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함께 신임옥사가 조작된 무옥(誣獄)임을 인정하면서 이를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로써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과 소론은 물론 전 백성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영조는 노․소론 사이에서만 진행하였던 종전의 소극적 탕평을 남인과 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으로 확대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노․소론을 1:1로 배치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정책{유재시용(惟才是用)}을 도입하여 오광운․채제공 등의 남인과 남태제․임개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선조 이후 때론 치열하게, 때론 격렬하게, 때론 사생결단으로 싸워왔던 사색당파가 조선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 역사가 이쯤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방점을 찍을 수 있게 흘러왔더라면 이 글도 여기서 끝맺었을 터이고, 조선이란 나라 또한 이즈음부터 강성부국의 토대를 확고히 마련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몸이 근질근질 해진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며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762년에 터진 ‘사도세자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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