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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을 나왔던 문주왕이 즐겨 마셨다는 우물 : 논산시 상월면 지경2리 소재. 왕우래, 왕우정)
왕우정 우물을 통해서 웅진백제 전후의 사정을 재위한 왕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굳건해야할 왕권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는 왕국은 약세를 면치 못하다가 영명한 왕이 국사를 잘 처리하자 비로소 웅진백제는 빛을 발합니다. 바로 무령왕 때(501-523) 23년간입니다.
삼국사기 원전을 들여다 봅니다.
웅진백제 (475년 - 538년 : 63년간 )
출처 : 삼국사기 권 24 김종권 역 1972년 판 광조출판사
(417쪽) 백제본기 제3
(*부분은 카페지기가 임의로 첨가한 것임)
20 개로왕(蓋鹵王) 혹은 近蓋鹵王이라고도 함)의 이름은 경사(慶司)
비유왕(毗有王)의 장자인데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서기 455)
18년(서기 472년) 고구려와 싸움 중, 위(魏)에 구원 요청..
재위 21년(475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 長壽王)이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서울 한성(*현재의 몽촌토성 일대)을 포위. 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와 싸우지 않으니 고구려군은 군사를 4도로 나워 협공하며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우므로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혹은 나와 항복하려는 자가 있었다. 왕도 군색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성문을 빠져 나와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추격을 당하여 살해되었다.
이보다 먼저 고구려 장수왕은 몰래 백제를 도모하고자 간첩을 구하여 백제로 파견하였다.
이 때에 중 도림(道琳)이 응하여 말하기를
“우승이 능히 도를 알지 못하나 국은을 보답할 생각이 있아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그 사명을 맡겨주시면 반드시 어명을 욕되지 않게 하겠나이다.“
도림의 흉계 : 거짓으로 나라에 죄를 지고 백제로 도망왔다 하고, 근개루(개로왕)은 바둑을 즐겼는데, 도림은 궁성문을 찾아가서 신은 어려서부터 바둑(碁)을 배웠으므로 번번히 그 묘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원컨대 좌우에 모시도록 하여 주십시오... 왕이 상객으로 맞이하여 바둑을 두며. 조언.. 성곽 수리 궁전, 선왕의 능묘 수축 등 국가 대역사 추진 권고.. 국력 피폐, 백성 원망 극대... 이후 도림은 고구려로 도망감. 장수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백제 침공. 왕자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병 요청.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은 본래 백제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임. (*백제침공의 길라잡이 역할을 함).
( 삼국사기 권 25)
21. 문주왕(文周王) (475∼477) (*재위 3년 만에 시해 당함)
문주왕 (혹은 汶洲王이라고도 함)은 개로왕의 아들
개로왕 재위 21년(서기 475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서울)을 포위하므로 개로왕은 성을 굳게 지키고,
아들 상좌평인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 1만명을 얻어가지고 돌아왔으나 이미 고구려 군사에 의해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음.
드디어 즉위. 왕은 성격이 부드럽고 잘 결단하지 못함. 백성 사랑이 크고 왕을 애중함.
(*475년) 10월에 서울 한성을 떠나 웅진(공주)로 천도함.
3년(477) 왕제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미숙아로 태어났나?)을 태자로 삼다.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음.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정권을 전단하고 왕을 시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음.
9월에 왕은 사냥을 나가 밖에서 유숙하였는데 해구는 도적으로 하여금 왕을 시해하게 하여 드디어 돌아가셨다.
22. 삼근왕(三斤王)(477∼479) (*재위 3년)
삼근왕(혹은 임걸왕壬乞王이라고도 함)은 문주왕의 장자로 왕이 돌아가자 그 뒤를 계승.
즉위 (477)시 나이가 13세이므로 군국정사(軍國政事)의 일체를 좌평해구에게 맡김.
*2년(478)봄에는 좌평 해구는 은솔 연신이 무리로 더불어 대두성에 의거하여 모반하므로 왕은 좌평 진남에게 명하여 군사 2천명으로 이를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덕솔진로에게 명하여 정병 5백명으로 해구를 격살하니, 연신(燕信)은 고구려로 도망하므로 그 처자를 거두어 웅진에서 참형하여 효시(梟示)하였다. (* 장기대나루의 어원 추정 ? 비선거리와 관련해서..)
3년(479) 11월에 왕이 죽음.
(*삼근왕의 뜻 새겨보기: 13살의 어린 나이에 문주왕의 장자로 왕위에 즉위, 즉위한 지 3년만에 돌아가셨으니, 작다는 의미의 “세근”이란 뜻의 삼근왕(三斤王)으로 시호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또는 미숙아로 태어나서 얻어진 이름은 아닐지?)
23. 동성왕(東城王) (479∼501) 12월 에 훙(薨) (*재위 3년만에 시해당함)
13살에 즉위한 어린 삼근왕이 즉위 3년 만에 돌아가자 뒤를 이어 즉위
이름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라고도 함.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로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
사냥을 즐김. 8년(486) 2월에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으로 삼다. (*현재의 대통령 경호실장 격)
23(501)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진수(鎭守)케 하였다.
처음에 왕은 백가로 가림성(*현재 부여 임천 성흥산성)을 진수하게 하였는데 백가는 가고자 하지 않고 병이라 하였으나 왕은 이를 원망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왕을 시해하게 하여
12월에 마침내 왕이 돌아가므로 동성왕(東城王)이라 시호하였다.
(*왕이 동쪽 변방에 아니면 동방 즉 백제라는 나라에 성을 많이 축성하였으므로 붙여진 시호?...)
(-호랑이 남산에서 싸움)
<2023. 11월 21(화) 부여 성흥산성(가림성) 답사시 사진>
24.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 23년간)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 隆이라고도 함
모대왕(동성왕)의 제2자인데 키가 8척이고 용모가 그림과 같고 성품이 인자하고 관후하여 민심이 잘 귀부하였는데 모대왕(동성왕) 재위 23년(501)에 왕이 돌아가자 그 뒤를 이어 즉위
23년(523) 5월에 왕이 돌아가심 (*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백제무령왕릉의 주인공)
<일본인 고교(자매학교) 교사 2명 무령왕릉 안내시 무령왕릉 모습. 1996년 >
25. 성왕(聖王) (523∼554) (* 538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현재 부여)로 천도함) 관산성(현재 옥천) 전투에서 전사함.)
- 무령왕의 장자. 지혜와 식견이 영특하고 사리가 올바름
- 16년 (538) 봄에 왕은 서울을 사비(泗沘, 또는 소부리所夫里 지금 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불렀다.
- 32년(554)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기 5천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에 이르렀으나 신라는 복병을 내어 싸움으로 군사들이 혼란하게 되고 왕은 (*구진베루<궂은벼랑에서 생포 당한 것으로 추정) 해를 입고 돌아가심. 성왕이라 시호
26. 위덕왕 (554∼ ) 이름은 昌. 이후 백제는 의자왕 때인 660년에 멸망함.
*사비백제 시대 : 538∼ 660년 백제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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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 기간 475 ∼538년: 63년간 공주(웅진백제 시대)
무령왕릉 이외 다른 왕들의 왕릉은 아직 발견치 못함...(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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