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능인간
카프카는 자신의 소설 <심판>에서 기능인간, 혹은 직업인간을 그려낸다. "이들 기능인간은 사회 메카니즘이
요구하는 기능을 충실히 해낼 뿐 이들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은 없다. 양심 없는 곳에 책임 있는 행위는 생기지
않는다. 무엇이거나 책임을 지고하지 않는 대신 명령만 받으면 어떤 일이건 무책임하게 해치운다.
이런 기능적 인간을 대량으로 사육해 두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권력체계의 수법이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구호만 있으면 된다. 이를테면 <중국의 장성을 쌓았을 때>에서 ‘전 국민의 일치! 일억일심! 가슴과 가슴!
국민의 모두가 손을 붙잡은 위대한 민족의 윤무..’처럼. <심판> 제 5장에 나오는 형리는 인정사정도 없이
두 사나이를 두들겨 패며, 자기 소임은 때리는 일이니 때릴 뿐이라고 내뱉는다. 프로이트파와 같이 여기에서
그 어떤 사디즘을 보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책임질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의, 파시즘적 지배 형태에
예속된 인간의 자기 고백이다"(박종서 600).
권력은 자기 보존을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자신의 비밀이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그 비밀이란
다름 아닌 앎, 정보요 지식이다. 또한 자신이 저지른 비양심적인 일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일 역시 비밀에
들어간다. 영화 <더 문>은 이 두 가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능적 인간을 대량
사육해 저장고에 넣어두고 자신의 비밀을 위해 모든 정보를 차단하며 그 기능적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로 만든다.
먼 미래, 달나라에서 보내온 청정한 에너지 덕분에 인류는 양질의 삶을 누린다. 달에는 그 에너지를 채취하는
기지가 있고 그 기지에는 루나 인더스트리라는 회사와 계약을 맺은 기술자, 샘 락웰이 고독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광석을 채취한다. 거티라고 불리는 만능 컴퓨터가 그를 보조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온갖 시중을 들어준다. 그에게는 희망이 있으니 삼년의 기한을 어서 채우고 지구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로
돌아가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상황은 극히 정상적이다.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
기술자는 돈을 벌기 위해 달에 온 것이고 루나 인더스트리는 돈을 지불하고 그 기술자를 고용한 것이다.
기술자 샘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게 당연한 것. 그러나 그 기억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의 기술과 그의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회사가 수백 개의 클론을 만들어놓고 삼년이라는 기한 후에 그를 제거한 다음, 아니
삼년이라는 내구연한이 다한 후에 또 다른 클론을 깨워 다시 일을 하게끔 시키는 것이라면? 물론 이 클론
역시 동일한 조건에서 일을 한다. 삼년이 지나면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것.
제한 된 공간, 회사측은 목적 달성을 위해 주변을 철저히 제한한다. 기지 주변은 전파 방해기가 둘러싸고
있지만 회사측은 통신위성이 고장 났다는 변명을 내세운다. 따라서 샘은 아내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으며 어쩌다가 회사측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받을 뿐이다. 어느 날 샘은 환상을 보게 되고 기지주변에서도
이상한 일을 보다가 피를 토하고 의식을 잃는다. 컴퓨터는 또 다른 클론을 깨우고 그 복제인간이 컴퓨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샘을 구해낸다.
이 클론 역시 자신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에 관해 의아해하며
티격태격하거나 의견을 나누거나 하다가 컴퓨터 거티의 도움을 얻어 그간의 기록을 보게 된다. 결국
지하, 관 밑에 숨겨진 창고를 찾아내고 칸마다 들어있는 복제인간들을 보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회사측에서 만든 기능 인간임을 깨닫는다. 샘은 지구로 돌아가 모든 사실을 밝히는데.
아주 작은 차이, 각각의 클론은 모든 인간의 내부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차이를 보여준다. 그 작은
차이가 커다란 차이를 낳는 것. 샘의 클론들은 하나같이 샘이지만 모두가 다르다. 누군가는 수염을
기르고 누군가는 모형 만들기를 좋아하며 누군가는 또 다른 일을 좋아한다. 그 작은 차이가 아주
다른 샘을 만들고 따라서 그들은 반복할 수 없는 반복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똑같은 인물이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샘이라는 틀 속에 수많은 샘, 모두가 다른 샘인 셈이다. 내안에
있는 수많은 나라고 해야 할까. 내 안에 내가 없어라고 해야 할까.
정체성을 찾기 위한 클론의 몸부림도 처절하고 컴퓨터 거티의 인간미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권력의 비정함이다. 이 상황에서 절대 권력은 기지를 세운 루나 인더스트리, 달에 기지를 세워
한 세계를 만들고 인간을 거기에 두어 일을 하게 하지만 모든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자기 입맛대로
기능 인간을 만든 그들은 절대 권력자인 셈이다. 즉 샘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오로지 샘의
기술자로서의 능력만을 보고 그를 일하는 기계로 만든 것이다.
이 기능적 인간을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욕망이다.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인 욕망, 가족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마저 클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진짜 아닌 복제인간은
허공에 떠있는 존재이므로 그 욕망을 가질 권한이 없는 것. 허상인 욕망을 지속시키고 때로 그 욕망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회사측은 인간에 대해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 이익 극대화는 모든 것을
통제하도록 만든다.
한 사회 혹은 한 나라만이 저처럼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기관도, 단체도 저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으로 우리 주변에서 한 회사 내에서 권력을 쥐고 흔드는 곳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이익의 극대화, 형태는 달라도 권력이 원하는 것과 동일하다.
자본주의는 무수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속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그 속에 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는 욕망을 낳도록 만들지만 정작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욕망하는 기계인
셈이다.
박종서.「카프카 존재의 아픔.」『성/심판/변신.』카프카 저. 김정진/박종서 옮김. 동서문화사. 2009. 590-605.
|
첫댓글 절대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이 다시금 생각나네요.
복제인간이라 하더라고 작은 차이.... 몸은 과학의 힘을 빌려 복제 되더라도 영혼은 다르지 않을까요. 머리속까지 프로그램을 입력하겠지만 그 후 생활하면서 입력되는것은 달라지니 환경에 따라 성격이며 능력이 달라 지겠지요. 참 인간의 상상력은 끝이 없어요.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권력과 욕망은 더 많아지고....
어제 이 영화를 봤어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고, 재미도 좀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런. ^^ 전 만점을 주고 싶은 영화였는데요?
그럼 새로 봐야 겠군요. 그러나 닫힌 공간에서 아무 액션도 없이 답답한 일만 반복하고... 클론들끼리 서로 말싸움이나 하고..^^
흠. 더바님. 영화나 책을 보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큰 힘은 줄거리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같은 경우에는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를 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요. 왜 저런 배경인가, 왜 저런 주인공인가, 왜 저런 환경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영화 <파이트 클럽>같은 경우, 전 그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냥 좀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어요.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 생각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문득 깨달았습니다. 싸우는 대상이 무엇인지, 왜 그가 정신분열에 걸렸는지를 생각하다가 나온 것이었지요. <더 문>은 주인공 자신이 원해서 클론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환경이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창조물이었기에 주인공 자체에서 의미를 깨닫기에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 주인공을 만들어낸 주체, 즉 타자인 회사의 의도를 생각하면 이 영화의 의미가 풀립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창조물, 맥락속에 주어진 구성원일 뿐이지요. 그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라고 생각하는 주체가 바로 저 주인공과 같을 수도 있어요. 클론과 원본(진짜 인간)일 뿐이지 그 역시 철저히 자본에 농락당하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계획적이라는 점과 계획적이 아니라는 점이 다릅니다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어요.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갈수록 거대한 자본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제한된 공간을 만든 주체,
에 집중하면 소름이 돋습니다. <매트릭스>는 대상, 즉 가상 세계를 만든 주체가 기계이기에 자본이라는 설정보다는 한결 낫습니다. <파이트 클럽>같은 경우에는 그 대상이 실체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환경을 만든 주체가 구체적이에요. 게다가 그 이유가 순수하게 이득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하던 주인공이 깨달아가는 과정이기에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하고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은 답답하고 모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주인공 자신이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기에 말이지요. 관객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하다가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처럼요. 아이구, 하고픈 이야기 많은데. 잉잉. 요즘 괜찮은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잉잉 언제 쓰낭......
저는 <더 문>을 본다는게 <뉴 문>을 보는 바람에...... 한참을 보다보니 이상하더라구요.^^
ㅎㅎ 아주 다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