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기 전에 한가지 더 이야기 할랍니다. 몇일전 고도아카데미 심화과정 운영자가 강의를 부탁하여 공산성 이야기를 한마디 했더랬습니다. 사실 저는 백제사나 공산성 전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산성동지>>를 집필한 죄, 특히 여흥삼아 <공산성 이야기자원 개발전략>이라는 글을 쓴 죄로, 그런 강의까지 맡게 된 겁니다. 강의를 하면서 새삼스럽게 문득 깨달은 비기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쌍수정과 쌍수비, 특히 인절미나 도루묵 설화에 관한 것입니다. 글 제목에 '역사왜곡'이라는 말이 붙어 있어 '많이 놀라셨죠'ㅎㅎㅎ. 역사교육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니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이자 결론은, "쌍수정 이야기나 인절미 설화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그 이야기를 할 참입니다. 먼저 편의상 인절미 유래와 관련한 설화부터 이야기 해보죠.
인조의 공주 피신과 관련하여 '인절미 설화'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쌍수정 앞에 인절미 유래와 관련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 또는 백제문화제 때 금강철교 위에서 '인절미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 다 아시죠. 물론 이런 이야기를 그냥 재미거리로만 삼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몇년전 공주시에 제출한 용역보고서(<<공주 고도이야기>>)에서 인절미와 더불어 도루목이(도루묵, 도로메기) 설화도 함께 활용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함께 활용하면 이야기 자원으로서의 활용가치가 매우 클 것이라 믿어집니다.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하면, 인절미 이야기는 족보(자료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나, 공주의 '도로목이' 이야기는 구한말 <<황성신문>>에도 소개되어 있는, 그야말로 훨씬더 족보 있는 공주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인절미나 도루묵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역사왜곡을 운운한 이유는 이런 민담의 의미가 크게 왜곡 전달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인절미나 도루묵 설화의 핵심코드는 결코 "인절미는 진짜로 절대 맛있다.", 혹은 "도루묵은 사실 도루묵일 뿐이다"가 아닙니다. 이런 민담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난세(난리통)'임에도 불구하고 임금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선조나 인조에 대한 민중들의 통렬한 야유와 비난이자, '욕설'이요 '똥침'이라 해야 옳을 겁니다. 난세를 맞이하여 백성들이 하루끼니를 걱정하고 있을때, 이건 맛있고 저건 맛없다는 식의 반찬투정이나 일 삼은 임금, 그것도 임금입니까? 백성들의 슬픔과 아픔을 잘 아는 임금, 백성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임금, 또는 건국초의 민본(왕도정치) 이념을 제대로 이해한 임금이라면 그 판국에 "거 참 절미로다", "다시 도로 목어이라 하여라" 따위의 말을 버젓이 씨부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사실 인절미나 도루묵 설화는 공주사람들이 만든 것도, 혹은 공주에서만 유행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여러가지 버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인조인 경우도 있고 선조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선조와 인조를 빗댄 인절미나 도루묵 이야기가 그토록 오래도록 민중들의 입에 오르내렸을까요? '그냥 이야기 자체가 재미 있어서' 였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민중들의 촌철살인의 지혜가 돗보이는 설화였기 때문에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했다고 말해야 옳을 듯 싶습니다. 만약 이런 류의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 유언비어처럼 떠돌고 있다는 말을 당시 선조나 인조가 들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표정이 어떠했을까요? 선조와 인조가 임금노릇이 뭔지 조금이라도 배은 바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당장 잡아 들이라 역정을 내거나, 아니면 똥씹은 표정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인절미나 도루묵 이야기를 그냥 재미삼아 말하는 것, 또는 핵심코드를 살짝 비틀어 "음식이 맛 있는 것은 음식 그 자체 때문인가 아니면 마음 때문인가" 하는 식(일체유심조)의 이야기거리로 활용하는 것은 당시 민중들의 정서나 역사관, 특히 해당 시대의 역사상 자체를 왜곡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저는 공주 인절미 축제는 당시 민중들의 이같은 정서를 드러내고 알리는 축제가 되어야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골 살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 겁니다. 인절미가 아무 때나 먹어 볼수 있는 떡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잔치때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쌀 있는 사람은 쌀을 내고, 떡메를 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보태 만든, 그런 '백성들의 떡'이 인절미 아닙니까? 그렇다면 인절미 축제, 어떤 콘셉으로 구성하고 운영해야 할까요?
쌍수정(벼슬받은 나무, 쌍수비와 비각 건립, 쌍수산성 호칭) 설화도 그렇습니다. 쌍수정 앞 안내판에 써 있는 쌍수와 쌍수정과 비각(비석), 쌍수산성이라는 명칭 유래에 대한 설명, 물론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안내판과는 전혀 다른 설명도 가능합니다. 안내판에, 이괄의 난(1623년)이 일어난지 1백년쯤 지난뒤(1734년), 이수항이라는 관찰사가 "인조를 위해 세운 정자"라는 설명이 보이는데, 진짜 그럴까요? 쌍수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세운 정자일까요? 혹시나, 관찰사나 공주를 내방한 고관대작들의 시짓기나 기생놀이를 위해 풍치 좋은 곳에 정자를 하나 짓기 위해 그런 명분을 앞세운 건 아닐까? 어떤 분은 이같은 '발칙한 상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억측일듯 싶습니다.
조선왕조 정부는 이괄의 난이 끝난지 1백년도 더 지났을때,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또는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정자와 비각을 세운 것일까? 물론 저더러 정답을 말해 보라 하면, 이러저러한 사료를 인용하면서 뭔가 '그럴듯한 추론'을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적어도 "인조를 위해 쌍수정을 건립했다"는 이야기에는 뭔가 냄새나는 정치적 술수가 개입되어 있는 듯하다는 겁니다.
인조는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을때 자신이 기대 섰던 나무에게, 적선하듯이 정삼품 통훈대부 벼슬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자신에게 쌀 3백석을 바친 노숙이라는 공주선비에게도 벼슬을 권했고(조왕동 설화), 또 공주 선비들을 위해 특별히 과거까지 실시했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임금노릇일까요? 난리를 일으킨 자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남김없이 도륙하고, 자신이나 정권에 아부(충성?)한 이들에게는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아낌없이 벼슬을 하사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임금노릇일까요? 백성들아 미안하다, 네가 임금노릇을 제대로 했다면 너희들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았을 터인데, 정말로 미안하구나, 이렇게 백배 사죄한뒤 제대로 된 관리들을 뽑아 좋은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이 제대로 된 임금노릇이 아닐까요?
이수항이라는 관찰사나 비문을 찬하고 서한 우의정 신흠이나 전중추부사 남구만도 그렀습니다. 그 따위 비문을, 그것도 돌에다 깊이 새기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전혀 예상치 못했던 후세 사가의 비난, 그가 더 놀랠 일일까?). 만약 요즘 학생들에게 당시의 사회(시대) 사정을 사실대로(?) 잘 이야기해 준뒤, 인조가 제대로된 임금이었다면, 이괄의 난이나 인조의 공주피신과 관련하여 어떤 '대국민 담화'나 후속조치를 취해야 옳았을 것인지 이야기해 보라 하면, 아마도 그 지경은 아닐 것이라 믿어집니다. 특히 과거 역사를 왜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지, 또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라도 배운 학생들이라면 분노를 넘어 실소까지 머금을 겁니다.
세월호 참사때 오로지 정권이나 인기 관리에 급급했던 대통령, 기념사진 찍기나 생색 내기에 바빴던 관료들, 정권 보위를 위해 희생양 만들기에 급급한 검찰과 경찰, 심지어는 술먹다 재수 없이 걸려든 모 세종시장과 모 교육감 출마자까지, 이들은 모두 이웃들과 아픔을 함께 할 줄 모르는 사람(특히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던 것입니다. 무리한 추론이자 비유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인조도 그런 류의 임금이었기 때문에(어쩌면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백성들의 눈에 그런 임금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그를 빗댄 인절미나 도루묵 설화가 만들어진 것이고, 또 이수항이나 신흠 등도 그저저러한 아부쟁이 관료였기 때문에 그 따위로 쌍수정과 쌍수비를 만든 것일 겁니다. 내가 더 역사를 왜곡한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구라가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첫댓글 인절미 또는 도루묵 이야기를 민중들의 통렬한 야유와 비난이자, '욕설'이요 '똥침'이라 말하는 것은 조금 거시기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쩌면 임금의 권위에 기대어 유명세를 타고 싶은 민중들의 기대와 헛바람이 실려있는 것이라 보는게 더 정확한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임금이 임금답다는 것은 자신이나 정권에 아부(충성?)한 이들에게는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아낌없이 벼슬을 하사하는 것이 제대로 된 임금노릇일 것입니다. 그게 왕조시대요 봉건성의 주춧돌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이 백성을 그토록 사랑했다면 봉건질서는 진즉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역사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서 살짝 딴지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