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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 2월 9일 지방회예배 설교
○ 잠언 27장 17절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친구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그 친구에 대해서 “나는 그 친구를 위해서라면 내 몸을 내줘도 전혀 아깝지 않아”하고 말씀하실 만한 그런 친구입니까? 그게 누구입니까? 물론 예수님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는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친구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중학교 때 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설문 조사 내용중 하나가 그 사람을 아주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을 심각하게 고민시킨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을 쓰시오”였습니다.
왜 이런 설문조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그 사람이 고민했던 이유는 이제까지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객했던 그 친구와 바로 설문조사를 하는 그 날 아침 별로 안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을 했습니다. ‘이 친구를 써야하나 아니면 반 친구 중에서 친한 친구이름을 써야하나?’ 한참 고민하다가 다른 친구의 이름을 썼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중학생 나이였기 때문에 이런 고민과 갈등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수업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자신이 고민했던 그 친구가 달려와 그에게 말했습니다. “누구야 가장 친한 친구를 쓰라고 해서 나는 너를 썼다. 너도 나를 썼지?”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그때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썼는데 그는 아침에 좋지 않은 일 때문에 그 친구가 아닌 다른 친구의 이름을 썼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생각났던 그 친구가 아마도 가장 친한 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친구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서 그 친구도 여러분을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할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친구는 그 형제보다 친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깊은 우정을 가진 친구는 둘 사이에 더없이 소중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인 잠언 27장 17절을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철 가운데는 날카롭게 사용해야 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낫이나 칼이나 송곳같은 도구가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날카로운 도구로 사용하는 철들은 다른 단단한 철로써 자주 갈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단단한 것을 날카롭게 해주는 것은 단단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철로 철을 날카롭게 가는 이유는 그 철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쉽고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참된 친구의 친밀한 우정과 교제는 자기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은 여러분들로 인해 그 얼굴에서 빛이 납니까?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 친구는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언젠가 제가 누군가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해주면 상대방의 얼굴에 빛이 날까요?”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가 그 질문을 했더니 그 사람이 말합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면 빛나지 않을까요?” 여러분 앞뒤에 계신 목사님들이나 사모님들의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얼굴이 빛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같습니까? 빛나고 있다면 친구를 잘 만나서 그럴수도 있습니다. 어둡고 그늘이 저 있다면 그런 친구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요.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 얼굴이 빛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부부가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목사님과 목사님 사이에서 서로를 빛나게 해주고, 사모님과 사모님들이 서로 빛나게 해주는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상대방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하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것 외에 뭔가가 더 있을텐데”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인 사람이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러 사람의 친구들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친구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 압살롬의 반란때 죽음을 무릅쓰고 압살롬에게 거짓 항복했던 다윗의 친구인 후새, 다윗의 큰 아들인 암논의 친구였던 요나답, 야곱의 아들인 유다의 친구인 아둘람사람 히라, 엘리야선지자 때 친구 선지자가 자기를 때려 달라고 했는데 못 때려서 사자에게 물려 죽었던 친구와 반대로 얼굴이 뚱뚱 부을 정도로 심하게 때린 친구, 사사 입다의 무남독녀의 여자친구들, 삼손의 블레셋 친구들 등 많은 친구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보면 친구인 중풍병자를 치료받게 하기 위하여 지붕을 뜯어낼 기발한 생각을 했던 친구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자기의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도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씩 찾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진정한 친구, 친구다운 친구, 그래서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친구에 대하여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고, 또 하나님과 세상에 존귀한 사람으로 쓰임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2편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결국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 안에서 존귀하게 여기시고 계심을 신약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여러 차례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는 친구는 다른 누군가의 특별한 점을 찾아 알려주면서 용기를 주는 친구, 왠지 그 친구에게 찾아가면 내가 뭔가라도 된 사람처럼 대우해주는 그런 친구, 또 앞으로 그렇게 탁월한 일을 할 사람으로 여겨지게 해주는 친구를 말합니다. 요나단이 왕자인 자기의 갑옷과 칼을 벗어주면서 다윗에게 존귀하게 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 안에 충만해 계시던 성령을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주셔서 존귀한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로인해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특별한 일군들로 변화시켜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친구처럼 대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이사야 41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벗” 다시 말해 “나의 친구”라는 말씀입니다.
모세에 대하여는 출애굽기 33장 11절에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사이는 친구처럼 다정한 사이와 같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는 어떠십니까? 자신과 언제나 함께 있었던 모세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여러분의 얼굴도 빛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과 친구처럼 관계를 맺은 선지자를 찾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를 보면 하나님과 참으로 가까워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엘리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가 열왕기하에 만도 무려 26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성경의 인물들 중에 가장 많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 스승 엘리야도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움을 받았지만, 엘리사는 많은 사람이 그를 그렇게 부를 정도로 엘리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심지어 수넴 여자가 자기 아이가 죽어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그녀의 안색을 보면서 ”이 여인이 마음에 근심이 있다마는 하나님이 내게 이르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거의 숨기는 것이 없을 정도로 가까운데 자신이 이 여인의 가정을 위해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이 침묵하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숨기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과 엘리사 선지자 사이에는 아주 각별한 친구처럼 서로 나눔의 시간을 가졌고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넘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그 비밀을 친구로 여기시는 엘리사선지자에게 상당히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셨고, 그렇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왕과 백성들에게 전해주어서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엘리사처럼 가까운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가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엘리사의 관계처럼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을 다 말씀해주실 정도로 가깝고도 믿을만한 특별한 존재들이라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가지셨던 친구관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야 할 사람들까지도 포함이 되었던 것을 봅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욕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을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장로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먹었던 가룟 유다, 그리고 자기를 군인들이 잡아가게 하기 위해 위선적인 인사를 하고 있는 가룟 유다에게까지도 친구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저는 이 부분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닯기 원한다고 하면서 살고 있는 나의 친구관이 예수님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볼 때 예수님의 친구관은 매우 폭이 넓었던 것을 봅니다. 그들 가운데 예수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혀 유익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을 은 삼십에 팔아먹는 사람까지도 “친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배반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와 온갖 모욕과 죽음을 선사한 사람, 자신에게 매우 큰 해를 끼친 사람에게까지도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하찮게 여김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던 어부가 사람을 낚는 사도가 되었고, 죄인으로 여김을 받던 소경이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었고,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하반신 장애인이 5,000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교회사 속에서도 이런 사람들의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이 친구가 되심으로 인해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들의 얼굴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빛났고 사람들은 그들의 빛나는 인생을 보았습니다. 시편 21편 5절에 했던 다윗의 고백대로 된 것입니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고백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이 친구삼으려고 하시는 사람과 여러분이 친구 삼는 사람이 같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친구로 삼아야 할까요? 누구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누군가의 친구가 되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그러려면 예수님이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보십니까?
첫째로,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 앞에 있는 누군가를 친구로 삼고자 하시는 예수님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식하고 계십니다. 둘째로, 여러분 앞에 있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인식하고 계십니다. 셋째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사람에게 맞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 사람 만의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고 인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분을 친구 삼으셨고, 또한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이 여러분 앞으로 보내신 그 사람과 친구가 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기는 쉽습니다. 마음을 닫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과 누릴 수 있는 영육간의 풍성함도 같이 끝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자 하신다면 오늘부터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셔서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친구가 된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하며 존귀한 사람으로써 그 얼굴이 빛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6편 3절의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는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40일 동안을 시내산에 있었던 모세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얼굴을 빛나게 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빛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분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곁의 목사님들, 사모님들, 여러분에게 맡기신 성도들, 그리고 여러분 교회 주변에 있는 많은 불신자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존귀한 신분으로 바꾸셔서 그들로 자기만 알던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친구관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각과 뜻에 맞추어짐으로 인해 여러분들에 의해 여러분들이 친구삼은 사람들의 얼굴과 인생이 존귀하게 바뀌어 가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들의 삶과 사역을 통해 계속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